아는 맛이 유독 당길 때가 있다. 세기말 구원 서사 같은 거 말이다. 근데 얼마 전에 <에반게리온>과 <세일러문>은 다 봐 버렸다면? 그래서 오늘은 보다 유통기한 널널한 구원 서사 텍스트를 들고 와 봤다. 소년만화 st 세기말 구원 서사 텍스트 5선. (링크 너머에는 각 작품의 조금 더 긴 필사본이 있다. 물론 책 사서 전문으로 읽는 게 가장 짜릿하다.)

틀림없다. 달은 두 개다.

하나는 옛날부터 있던 원래의 달이고, 또 하나는 훨씬 자그마한 초록색 달이다. 그것은 원래의 달보다 모양이 삐뚜름하고 밝기도 덜했다. 얼결에 떠맡은,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못생긴 먼 친척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부정할 수 없이 그곳에 분명히 존재했다. 환영도 아니고 착시도 아니다. 실체와 윤곽을 가진 천체로서 확실하게 그곳에 떠 있었다. 비행기도 아니고 비행선도 아니고 인공위성도 아니다. 누군가 장난 삼아 종이로 만든 연극 소품도 아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바윗덩어리다. 오랜 숙고 끝에 찍은 구두점처럼, 혹은 숙명이 내려준 몸의 점처럼, 그것은 말없는 가운데 흔들림 없이 밤하늘 한곳에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개의 달의 모습은 덴고에게 현기증과 같은 어지러움을 몰고 왔다. 신경의 균형이 손상된 것 같다. 그는 미끄럼틀 위에 앉아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그것을 지그시 견뎠다. 주위의 인력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듯한 감촉이 있었다. 어디선가 바닷물이 차오르고 어디선가는 바닷물이 빠지고 있다. 인간은 insane과 lunatic 사이를 무표정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

1Q84,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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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마저도 흐릿한 와중 눈에 들어온 건 우영의 둥그런 어깨였다. 나에게 겉옷을 벗어주고 민소매만 걸치고 있는 우영의 어깨. 산지기의 딸인 우영은 허구한 날 돌산을 오르내려서인지 잔상처가 많았는데, 그날만은 유난히 희고 매끄러워 보였다. 물에 젖었기 때문일까? 꼭 흰 뱀 같았다. 아빠와 아쿠아리움에서 보았던 물뱀이 떠올랐다. 좁은 어항 안에서 나풀거리는 게 꼭 춤을 추는 것 같기도, 발악하는 것 같기도 했지. 어항 속 물뱀의 비늘을 떠올리며 나는 우영에게로 손을 가져갔고, 곧 검지 끝에 축축한 피부가 닿았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우영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사방에서 파도가 일렁였다. 나는 우영에게 물었다.

"내가 밉지 않아? 나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우영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고작 숨바꼭질 때문에 죽게 생겼는데도?"

"네가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우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오한이 드는 듯했다.

"난 이 갯벌에 언제 물이 차는지 알아. 그래도 널 찾고 싶어서 찾은 거야."

"왜?"

"내가 술래였잖아."

"너한테 술래를 시킨 것도 난데."

우영이 피곤하단 듯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깨에 걸친 우영의 겉옷을 벗어 들고 우영의 옆으로 가 앉았다. 내 겉옷과 우영의 겉옷을 겹쳐 우리의 어깨에 둘렀다. 내 왼쪽 어깨와 우영의 오른쪽 어깨가 닿았고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쳤다. 우리가 몸을 숨긴 암석 위까지 물이 밀려왔다. 우리는 휩쓸려가지 않도록 어깨를 붙이고서 힘을 주고 버텼다. 우영의 불규칙적인 호흡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호흡과 떨림도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온통 암흑뿐인 밤바다를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한 우영을 바라보았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물소리와 암석의 이끼 냄새를 타고 우영의 목소리가 닿았다.

"내가 찾지 않으면 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거든."

우영은 언제나 그랬다. 엄마와 아빠보다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그 어떤 친구들보다도 나에 대해 잘 알았다. 20년 후의 그 역시 알았을 것이다. 

이딴 식으로 사라지면 내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만조를 기다리며, 조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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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드라마나 영화라면 지금이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영대의 얼굴에 드리운 거리의 빛을 보며 형식은 생각한다

겨울밤
사람들의 입에서는 조금씩 영혼이 흘러나오고 있다

조명이 꺼진 실내로 크리스마스캐럴이 흘러들어오고 있었고, 형식과 영대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어떻게 이 작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까

형식은 사랑을 시작하려다 말고 밖을 보며 생각한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온 침묵을 견디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때를 천사가 찾아온 것이라 한다고, 형식은 영화에서 들은 말을 떠올린다 그 또한 영화의 마지막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밤은 고요하고 거룩한데
사람들은 아직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밖을 헤매고

말 없는 영대의 입에서 영혼의 흐린 빛이 흘러나왔다

침묵의 천사가 이 자리에서 우리를 찾아와 다시 떠나고 있다
형식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이 장면을 구성하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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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절이 있어야 할 것 같았어. 그 사람의 마지막에 내가 끼면 안 될 것 같았어. 우리가 만났을 때 너무 연속되어 있었으니까. 그게 널 오래 혼란스럽게 했으니까. 이번만큼은 제대로 분절, 마디, 매듭을 만들고 싶었어. 내가 돌아와도, 바로 그 사람 대신은 아니게. 그래도 많이 힘들었지?"
"...... 안 돌아올 줄 알았어."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말을 오래 안 해선지, 자주 토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리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는데 그걸 믿는 날 믿을 수가 없었어. 믿으면서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어."

고장난 고래어 번역기처럼 한아가 말했다. 경민이 한아를 위로하기 위해 목덜미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러고 나서 팔을 풀고, 한아를 앞으로 돌려 다시 안았다. 돌아와서 처음 입을 맞췄다.

아, 입술이 거기 있었다.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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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지역 내에서 〈동키콩〉 오락기를 찾으면 더 싸게 구할 수 있다. 운반에 드는 비용이 대단히 절약될 것이다. 하지만 그 오락기의 메모리는 이것과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 K타운의 윌셔 대로에 있는 동&봉 뉴욕스타일 피자하우스에서 최고 점수를 기록한 〈동키콩〉 플레이어는 S.A.M.이라는 이니셜을 쓰는 사람이란 것을 그 오락기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기계가 케임브리지에 도착했을 때, 오락기는 여전히 잘 작동했지만 최고점 기록은 지워져 있었다. 이런 초기 오락기들의 메모리는 불안정했고, 지워지지 말아야 하는 정보가 날아갔다. 백업 배터리는, 그런 게 있었다 한들, 오래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동현의 오락기가 이제는 텅 빈 명예의 전당 화면을 로딩했을 때, 세이디는 여전히 어렴풋이 S.A.M.을 볼 수 있었다. 그 점수가 워낙 오래 자리를 지킨 탓에 모니터에 번인 자국이 남았던 것이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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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볼빙이라는 이름 때문인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러시안룰렛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 할아버지, 러시안룰렛이 뭔지 알아?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총알을 하나만 넣은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야. 휴, 이번 달은 살았다.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네. 하지만 과연 다음 달에도 무사할 수 있을까? 그런 조마조마한 심정.





용기에 대해서라면 나는 마치…… 다 쓴 치약 튜브 같았다.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아주 조금씩 남아 있는 것들을 쥐어짜내지 않으면, 중요한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애써 쥐어짜낸 것조차도 퐁,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 칫솔 대신 세면대에 떨어져 낭비되어버리는.





진행자로 추정되는 마법소녀가 연단에 올라섰다.

“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 주관 제3회 마법소녀 직업 박람회 주제 심포지엄 ‘지속 가능한 지구와 마법소녀’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오늘의 연사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전마협 의장이자 한국인 최초 마법소녀……”

소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대 위에 문이 하나 나타났다. 거기에서 흰 티셔츠와 검정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사람이 나왔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우와…… 이건 마법소녀이니까 가능한 퍼포먼스겠지? 나도 손뼉을 치면서 생각했다. 진행자가 당황하며 수습하기 전까지는.

“여러분, 이분은 전마협 의장이 아닙니다. 공간의 마법소녀 최희진씨입니다.”

박수 소리가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최희진은 진행자에게 마이크를 달라는 손짓을 했다. 스태프 한명이 무선 마이크를 가져다주었다.

“아 죄송. 지금 마법소녀가 제일 많은 곳이 어딜까 생각하면서 왔더니 너무 눈에 띄는 곳에서 튀어나와버렸네요. 용건만 말할게요. 마법소녀 딱 세분만 나오세요. 테러리스트 잡으러 갑시다, 이상.”





“그동안 많이 생각해봤어요. 아로아미러가 당신을 그토록 뚜렷하게 보여준 이유에 대해서.”

나는 침 삼키는 소리가 아로아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고 거울의 모든 기능을 다 아는 건 아니거든요. 사용설명서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만 모든 마구가 그렇듯 아로아미러 역시 사용자의 상상력에 응답하게 되어 있어요.”

갑자기 아로아가 우뚝 멈춰 서더니 내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전에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던 거 기억해요?”

언제 그랬지? 아, 히드로공항에서 그랬던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아로아가 내 두 손을 잡았다.

 “그거예요.”
“그게 뭔데요?”
“지켜주겠다고 했던 거요.”

예? 하며 눈을 가늘게 뜨자 아로아는 맞잡은 내 양손을 붕붕 흔들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지켜줘야 할 단 한 사람이었던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마법소녀가 아니라,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라고요.”

비는…… 어느새 그친 걸까?

문득 아로아가 손에서 우산을 놓았는데도 어째서 우리가 비를 맞고 있지 않은지 신경이 쓰여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아로아의 우산이 저 혼자 둥실 떠올라 우리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었다.

“당신이 나의…… 운명인 거예요!”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아로아의 목소리가 어쩐지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똑바로 서서 걷는 네발동물처럼 말이지. 역시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시간의 마법소녀가 되어서 잘된 게 아닐까. 아니다, 무능하지만 우리 편인 거랑 유능하지만 우리 편이 아닌 것 중에는 전자가 좀 낫지 않나.





멀리서 관찰할 수 있다면, 이런 것을 보고도 균형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대륙에서는 산불이 타오르는데 동시에 어떤 대륙에서는 대홍수가 일어나는 것. 이 행성 표면의 어느 한 점이 극도로 고온건조해졌을 때 다른 편 또 어느 한 점은 대야에 떨어진 종잇조각처럼 흐물흐물하게 젖어서 퍼져버리는 것. 한파도, 무더위도, 해수면 상승도 토네이도도 이 거대한 구체의 어느 한 점 위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 그 모두를 합치면 그저 평균이 된다…… (되겠지?) 한 행성의 기온과 습도의 평균.

멀리서 관찰하는 눈이 실제로 있다면, 그 눈의 주인은 아마 그 점 하나하나에 엄청나게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산불이 일어나면 수많은 동식물이 목숨을 빼앗긴다. 태풍이나 해일로 대홍수가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 곳을 잃고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일어났을 것이다. 딱히 기후 재난이 아니더라도. 이 행성이 물을 품고 있고, 약간 기울어진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으며, 거대한 열과 빛의 구체 주변을 크게 둘러 달리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 비슷한 이유에서 이 행성에는 생명체가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태어난 생명체들은, 저항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적과 공존하기 위해 계속해서 발버둥질해왔을 것이다. 기후라는 친밀한 적으로부터…… 최소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니까 기후의 잔인성이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고, 애초에 인격을 갖지도 않은 어떤 현상에 자비심을 바라는 것이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그렇지만 원래도 전혀 다정하지 않았던 그것이 이제는 재난이라 불리는 데에도 까닭이 있을 것이다. 수천수만년간 함께해왔기 때문에 얼마간 파악된 것처럼 보였던 그것의 성향이 어느덧 훨씬 사나워지고 종잡을 수 없어졌다는 것. 더위와 추위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물론, 일년에 한두번 우리나라를 지나갈까 말까 하던 태풍이 여름 내내 발생하고, 빙하가 녹아 흐른 물 때문에 땅이었던 곳이 바다가 되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더 많은 변화가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입안에 물고 있던 사탕이 작아질수록 점점 더 빨리 녹아가는 것처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는데 술래가 너무 오래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오금이 저리고 눈이 시리고 등이 가려웠다.





“그럼 혹시,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는 건가요?”
“……네.”

이미래는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무서운 것과는 별개로 빈정이 상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하더라, 그…… 재수 없다?

그래, 재수 없다.

“제가 실수를 하긴 했네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간을 멈춘다고 했어야 했는데 마법소녀의 시간만 멈춘다고 했죠. 아니 그래도, 설마 여기에 마법소녀도 아닌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죠. 그걸 실책이라고 하긴 좀.”

한참을 웃은 다음에 이미래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만…… 주머니에서 마구를 꺼내 마패처럼 내밀었다.

“그건 뭔데요?”
“제…… 무기예요.”

이미래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웃느라 무릎을 휘청거리다가 곁에 있는 마법소녀의 어깨를 짚으며 눈가를 닦았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이나 웃겼구나, 내 마구가.

“아니, 정말…… 미치셨어요?”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다시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그걸로 뭘 어쩌시게요. 그걸로 저 긁어 죽이시게요? 아니면 저를 뭐, 한 이십사개월 무이자할부로 사시려고요? 혹시 직업이 코미디언이세요?”





이겼다……는 생각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생각한 것만큼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더 큰 희생은 발생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 이긴 거지?

아니, 그보다. 인류멸망이 결국 저지된 거라면, 나한테는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닌데?

“지금 몇시죠?”
“열시 조금 넘었어요. 왜요?”

맥이 탁 풀려서 헛웃음이 나왔다.

“출근해야 했는데 망했네요.”

아로아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흔한 얘기인걸요, 세계를 구하고 본인은 망하는 거.”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단군 할아버지는 환웅의 자식이고 환웅은 천상의 제왕 환인의 후계자였는데 환웅이 강림할 때 환인으로부터 받은 세가지 보물을 천부인이라 하며 그것은 다름 아닌 청동검과 청동거울과 청동방울이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이 물건들이 지배계층의 권위를 드러내며 종교적, 제례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환웅이 천계로부터 가져왔다는 세가지 물건은 신묘한 힘이 담긴 기다란 무기, 둥근 도구, 작은 장신구…… 친숙하게 들리는 게 착각은 아닐 것이다. 마법소녀의 요술봉, 마법소녀의 변신 거울, 마법소녀의 액세서리 참(charm). 요즘은 마법소녀의 아이템 범주가 무척 넓어졌는데 천부인은 기준을 조금 강경하게 잡더라도 넉넉하게 합격선에 든다.

요술봉과 같은 시그니처 아이템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마법소녀를 정의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사실상 마술사 소녀지 마법소녀는 아닌 ‘천사소녀 네티’가 은근슬쩍 마법소녀 카테고리에 들어 있는 것이나, 변신을 하지 않는 ‘카드캡터 체리’를 마법소녀라 부르는 데에 사회적 합의가 따로 필요 없는 점 등을 감안하면.

그러니까 놀랍게도 우리는…… 마법소녀의 민족이다.

받아들여.





그렇다면 <세일러문> 신드롬은 우연한 것인가?

질문을 바꿔본다. 마법소녀 장르에 덧씌워진 오랜 오해를 결부하여, 소녀적인 것은 '덜 중요한 것'인가? 실체적이지 않은 것인가? 즉 '소녀적'인 세계는, '세계'가 아닌가? 소녀들의 세계는 향긋한 느낌과 예쁜 이미지와 달콤한 환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피와 땀으로 표상되는 짭짤하고 씁쓸한 세계와는 무관한가?

실체적인 세계는 바꾸어 말하면 파괴 가능한 세계다. 그래서? 소녀들의 세계는 파괴되지 않는가? 거기에는 고통이 없는가? 물론 아니다. 훨씬 파괴되기 쉬운 세계라고 보는 편이 옳겠지. 고통에 더욱 취약한 이들이 주인공이기도 하고. (굳이 덧붙일 필요가 있겠는가 싶지만 그것은 그들이 연소자이기 때문이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똑같이 지구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데도 마법소녀들이 거대 로봇에 비해 약하다거나 시시하다는 평가절하를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그건 체급 차이를 떠나 명백한 과소평가다. 전투가 끝난 자리가 많이 파괴된 쪽보다 적게 파괴된 쪽이 강하다. 덜 파괴한 쪽이 보다 많은 사람을 구한 쪽일 테니까. 마법소녀물에서 파괴의 이미지가 비교적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약해서, 소녀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만큼 유능하다는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 전투를 벌일 때마다 마천루가 무너지고 철도가 끊어지고 폭발이 연쇄된다면 그게 어떻게 지구를 '지킨' 것이 되는가? 전투에 승리한 것은 될 수 있어도 진정 인류를 구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마법이 대가 없이 멋지고 편리했던 시대 그리고 능력과 어떤 기회비용을 교환하는 시대를 경유하여 내가 발견하고 싶었던 마법소녀의 힘은 아마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극에 달할 때 자그마한 긍정적 전망이나마 될 수 있는 가능성.

그건 원래 이 세계에 있던 건데, 지어낸 이야기인 척 내가 누설해버린 거라고 믿는다.

이제 창문을 닫아도 와닿는 공기가 제법 차다. 첫눈이랑만 인사 못 했지 완연한 겨울이 온 듯하다. 이런 날에는, 무엇보다 전기장판을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번데기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서 적당히 감도 있는 텍스트를 두세 시간쯤 읽고 싶다. 잘 데워진 모짜렐라 치즈처럼 늘어져 있고 싶다. 그래서 모아 봤다. 전기장판 위에서 귤 까먹으면서 보기 좋은 책 5선. (이어지는 링크에는 각 책의 조금 더 많은 문장이 필사되어 있다. 물론 책의 물성을 느끼며 전문 읽는 쪽이 훨씬 짜릿하겠다.)

파도를 피해 포구에 몸을 누인 목선은 흔들리면서 지구를 읽는다. 

이런 상상을 자주 했었다. 지구는 둥그니까. 바다는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배는 그 위에 또 매달려 있고. 

매달린 채 흘러내리지 않는 바다. 

물론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면 설명이 충분한 일이지만 동원하고 싶지 않다. 

바다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목선들은 그 바다에 매달려 있다. 불온한 상상일지라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너에게 시시한 이름은 없다, 허연
https://mcger.tistory.com/140

결혼을 결정하고 시댁인 밀양에 첫인사를 하러 갔다. 집에서 시부모님께 인사드린 후 밀양시립박물관에 가게 되었다. 첫인사에 박물관이라니 약간 의아했다. 그런데 맙소사, 박물관에 독립운동가셨던 시할아버지의 흉상이 있었다. 1차 충격. 게다가 흉상의 시할아버지와 우리 남편이 똑같이 생겨서 2차 충격이었다. 그 후 남편의 독특한 성정을 발견할 때마다 어쩐지 자꾸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흠, 저렇게 고집이 세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겠군.'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렇게 선해한다. '카카오톡 또 읽씹하네. 그래, 아마도 저렇게 입이 무거워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겠지.'

질문하는 세계, 이소임
https://mcger.tistory.com/121

중국집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원탁 한 곳에만 두툼한 메뉴칩이 올라가 있고 젓가락과 숟가락이 각 자리에 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예약 손님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손님들은 아직 오지 않았고 거기에는 손님이 올 것임을 암시하는 젓가락과 숟가락만 놓여 있었다. 올 거라는 약속, 채워지리라는 표지, 추후를 예비하는 노력 같은 것.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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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머리가 컴퓨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수히 많은 윈도우 창이 화면 가득 열려 있는 컴퓨터. 온갖 폴더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바탕화면. 내 안에는 동그란 무지개색의 로딩 중 아이콘 같은 것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 한다. 수없이 열려 있는 윈도우 중 몇 개라도 닫아버릴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바탕화면을 꽉 채운 아이콘을 몇 개만이라도 휴지통 속으로 던져 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면 나도 좀 괜찮아질 텐데. 하지만 다들 하나같이 너무 필요해 보이는데, 어느 창을 닫을지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이 세상이 이미 과부하 상태인 마당에 내 정신이 과부하되는 걸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우리는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해서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데,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우는 전원을 다시 켜려면, 가끔은 이런저런 스크린을 꺼버릴 수 있을 만큼 용감해져야 한다. 

재접속을 위해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한다.

불안의 밤에 고하는 말, 매트 헤이그
https://mcger.tistory.com/111

네가 많이 보고 싶다. 브뤼노, 쉬즈, 나, 우리 모두 네 얘기를 자주 해. 이곳에서 함께 웃을 수도 있었는데, 미치겠다.
 
돌아가면 우리 열심히 토론하자. 미국과 우리에 대해서. 왜냐하면 내가 너를 잃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구멍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그건 아마 내 잘못일 테고, 그래서 신경 쓰여. 
 
나와 함께 프랑스 남부에서 열흘 보낼 수 있게 일정을 조정해줄래? 나는 1월 초에 거기 있을 거야. 내일은 뉴욕, 뉴욕 시 파크 애비뉴 34번가 밴더빌트 호텔에서 다시 집결할 거야. 그쪽으로 편지하고, 날 잊지 마. 곧 보자.

인생은 너무도 느리고 희망은 너무도 난폭해, 프랑수아즈 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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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섯 시. 늘 밝았던 퇴근길이 어둡다. 나는 그제야 계절을 실감한다. 아, 겨울이 왔구나. 온도에도 타인의 시선에도 영 둔감한 나는 대개 비주얼로 계절을 인지한다. 좀 밝아졌으면 여름, 좀 어두워졌으면 겨울. 그래서 내게 겨울, 은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저명도'다. 그래서 골라 봤다. 초겨울 저명도 낭만 무드 노래 6곡.

https://youtu.be/d-UMBguNiv0?si=_hScMui0LrN2yGwy

그저 난 괜시리 깊게 잠든 그대가

깨어나 떠날 것만 같은 걱정을 하게 돼요

분명 눈을 뜨면 내 옆에 그대는 없을 거야

이 비가 그치면 더 이상 흘릴 나조차 없을 거야

그냥 여기에 있어줘 깨어나지 말고

차라리 이대로 죽어줘

아가미, 쏜애플

https://youtu.be/G7id_9gS-yE?si=Ny-1MZ7ALMzFB9qf

기묘한 웃음소리 넌 심술궂었지

날 사랑하지 않는 게 이기는 줄 알지

새벽의 벨소린 나의 목을 감싸고

파블로프 개처럼 난 너를 기다려 

나의 위성, 장재인

https://youtu.be/pyYsTmGJEWY?si=OKGVVcUxOxHOQpcj

너와 내가 떠난 이 알 수 없는 여행

너를 바라보다 잠이 들었는데

밤이 찾아와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

이 꿈 같은 곳으로 나를 데려온 거야 

빛나는 하늘과 떨리는 두 손과

나를 바라보는 너의 그 깊은 미소가

난 울지 않을래 피하지 않을래

어둠 속의 빛으로 넌 내게 머물러

백야, 짙은

https://youtu.be/MjQjaB-HedA?si=K_ngx1zvhYltf7dn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나대로 가고 멈추고 풀었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서 살게 해

Track 9, 이소라

https://youtu.be/jyd8xQjPB1Y?si=7orFNLPGNWTSMR2Z

창문을 열어도 계절은 가고

두 눈을 떠봐도 진달래는 지고

긴 꿈에 헤매도 아침은 오고

돌아서 있어도 흔들리는 마음

Ever Ever (Feat. 계피), 보이

https://youtu.be/YsPwe1DXdEE?si=8X6bh1sV2kolvvjY

친구들을 만날 땐 옷장을 뒤적이지

제일 비싼 옷을 입어야 돼

구김없이 말하는 법을 연습하지

제일 똑똑한 단어를 써야 돼

사랑했던 사람과 모터보트 위에서

말리부에 오렌지를 타서 먹는 상상을

하다 아랫집 소리가 들리네

잃어버린 시간과 사람들을 모아서

취기어린 고백들을 밤새 하는 상상을

하다 숙취에 고개를 숙이네

말리부오렌지, 박소은

“찬란하다.”

콜리는 세상의 채도가 저렇게 높다는 것에 놀랐고 자신이 이 단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러자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졌다. 콜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창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단어를 무작위로 뱉었다. 화려하다. 예쁘다. 아름답다. 노랗다. 붉다. 파랗다. 빠르다. 무섭다. 소름 끼치다. 서늘하다. 춥다. 덥다. 쨍하다. 아프다. 힘들다. 괴롭다… 몇몇 단어는 동사형이나 형용사형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콜리는 끝도 없이 읊었다. 단어가 화물칸에 가득 쌓여 포화되기 직전에 목적지에 도착했으며 콜리가 아는 단어도 거기서 멈췄다. 천 개. 콜리가 떠올린 단어는 천 개였다. 그 단어로 만들 수 있는 문장은 더 많을 것이다. 콜리는 자신이 몇 개까지 문장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문이 열렸고, 콜리의 전원이 켜져 있음을 확인한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전원을 껐기 때문에 더는 문장을 만들 수 없었다. 

어느 날, 콜리는 경기 직전 경호원이 보고 있던 경마 방송에서 나오는 해설자의 말을 들었다.

“투데이와 기수의 호흡이 잘 맞는 결과라고 볼 수 있죠.”

호흡. 콜리가 아는 단어다. 그 지식을 미루어보아, 콜리는 숨을 쉬지 않는다. 몸이 공기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무언가를 흡수하고, 분해하고, 배출하는 과정은 생명이 가진 특권이었다. 콜리의 몸은 그 어떤 것도 흡수하고, 분해하고, 배출하지 않는다. 콜리는 에너지를 몸에 쌓아두고, 형태를 전환하고, 소비하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왜 호흡이 맞는다고 표현했을까.

“그냥 비유지. 합이 잘 맞는다는 이야기야. 파트너십이 좋다고나 할까.”

민주는 그렇게 대답했다. 콜리는 민주의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부정하고 싶어졌다. 콜리는 자신이 호흡한다고 믿었다. 민주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쉬었고, 숨을 쉴 때마다 미세하지만 몸이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그건 콜리가 마주치는 모든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이었다. 호흡을 하면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콜리도 원치 않지만 몸이 스스로 움직일 때가 있다. 투데이의 등에 앉아 주로를 질주하는 순간. 부푸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때만큼은 누군가의 명령 없이도 투데이의 움직임을 따라 몸이 반동해 위아래로 흔들렸다.

“투데이와 달리는 순간만큼은 저도 호흡하고 있어요. 투데이의 호흡에 맞춰서…. 이것도 비유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그럴 수 있지.”

투데이의 등에 앉아 달릴 때마다 콜리는 숨을 쉬었고, 호흡이 생명의 특권이라면 콜리는 그 순간만큼은 생명이었으며, 생명은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콜리는 살아 있었다.





다음 날 콜리는 전원이 꺼졌다.

콜리의 마지막 기억은 민주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설득하고 애원하던 모습을 본 것이었다. 어차피 쓸 수 있는 부품도 몇 안 돼서 팔아봤자 80만 원도 못 받는다니까요. 하청업체한테 파는 것도 불법인데 뭐가 더 불법인지 따져서 뭐 하시게요? 아니, 제가 따지는 게 아니라… 예예. 신고하지 못하도록 잘 이야기하죠.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요. 민주가 짧은 시간 동안 그토록 다채롭게 감정을 토로하는 걸 콜리는 처음 봤다. 마방을 오가며 통화를 하던 민주는 마침내 전화를 끊고 웃으며 콜리에게 다가왔다. 거기서 잘 살아봐. 민주는 그렇게 말하고 콜리의 전원을 껐는데, 콜리는 민주가 자신에게 ‘살아’라고 표현한 것을 잊지 않도록 메모리에 저장해두었다. 

연재도 실은 머지않아 베티가 이 편의점에도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 베티는 2004년에 K대학교에서 만들었던 한국 최초의 이족보행 인간형 로봇 ‘휴보’의 진화형 모델이자 보급형 모델이었다. 외형은 비슷했으나 기능이 더 추가되었고 움직임이 인간의 관절처럼 부드러웠다. 결국 이 세상은 수지타산이 얼마만큼 맞느냐로 돌아가는 것인데, 점장의 말마따나 이제는 인간 한 명을 고용해 쓰는 것보다 휴머노이드 한 대의 비용이 더 저렴했다. 만일 편의점을 찾는 사람들이 베티를 불편하게 생각했다면 베티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내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베티는 편의점을 찾는 무례한 손님들, 이를테면 다짜고짜 ‘담배’만 외치는 아저씨들을 보고도 기분 상하지 않았으며 저장장치의 기록에서 이 손님이 매일 사 갔던 담배를 찾아내 알아서 계산대에 올렸고, 라면을 먹은 후 치우고 가지 않는 손님을 보고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테이블을 정리했으니 어느 면에서 보나 베티가 더 편리했다.





“언니는 왜 그렇게 유니폼을 좋아해요?”라고 물었을 때에도 다영은 야외 테이블에서 홀로 닭칼국수에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있었다. 봄이 된 지는 한참이었지만 아직도 밤바람이 추워 코를 빨갛게 얼려놓은 다영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좋잖아. 그때의 다영은 꼭 만화의 주인공 같았는데 연재는 구체적으로 어떤 캐릭터인지는 떠올리지 않았다. 말괄량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정도면 딱 어울리겠는데…. 어쨌거나 사주에서 그해 취업운이 있을 거라는 말이 들어맞아, 다영은 8.5:1이라는 그럭저럭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는 않는 경쟁률을 뚫고 이곳에 입사했다. 경마장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으니 연재는 다영이 자신처럼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보안관이 스무 명 넘게 잘리며 그 자리로 경비 휴머노이드 ‘폴리’가 들어왔으니 매표소 직원의 자리도 위태로웠다. 다영의 적은 키오스크였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키오스크 두 대와 공생하는 중이었고, 키오스크 대신 다영을 찾는 손님도 꾸준했으니 한동안 잘릴 위험은 없지 않을까. 단, 이렇게 불법으로 출입시키는 게 걸리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연재는 마방 사이를 지나는 것을 늘 답답해했는데, 자신을 쳐다보는 말들의 눈빛이 퍽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은혜는 말들의 눈이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연재는 은혜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리움을 느끼려면 그리워할 대상이 분명하게 존재해야 했다. 말들이 실체를 기억할까. 한 번도 초원을 밟아보지 못할 말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만 느낄 것이다. 갇혀 있지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문명사회 이후 쌓아온 말들의 기억 DNA는 초원보다 마방에 더 많을 것 같았다. 





은혜가 말을 보러 경마장에 오기 시작한 건 4년 전부터였다. 주말이면 경마장의 손님들로 포화상태가 되는 동네였기 때문에 은혜는 그럴 때마다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서 서커스장처럼 빛나는 경마장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다. 하지만 보경은 주말이면 가게가 만석이라 바빴고 연재는 주말이라는 이유로 종일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혼자 그곳에 가기는 힘들었다. 누구도 은혜에게 가지 말라고 한 적 없었지만 그 무엇도 은혜를 호락호락하게 그곳에 보내주지 않았다. 휠체어를 끌고 경마장에 다녀오는 길이 얼마만큼의 긴 모험이 될지, 어떤 위험을 만나게 될지, 어떤 수모를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은혜는 길을 나서기 전에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 필요했다. 은혜에게 집 밖 세상은 맵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주된 공격은 시선이었고, 들어가지 못하는 가게들이 배경으로 지나갔으며, 가방에는 HP 회복을 위한 식량과 물이 구비되어 있었다.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을 남들처럼만 대해준다면 은혜는 사이보그 따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지구가 너무 많이 바뀌어야 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은혜는 사람들이 전가한 ‘한 사람의 몫’을 아직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아니라 반쪽짜리 사람이랄까.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혼자 다니기 위험한 영유아처럼 은혜에게도 반쪽의 몫을 보충해줄 보호자가 늘 필요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은혜의 판단이 아닌 은혜를 지켜보는 타인의 판단이었다.





“동물에도 관심 많아요. 동물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기도 하고. 오빠가 했던 말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게 있어요. 앱이 업데이트되는 속도가 동물의 멸종 속도와 같대요. 제가 앱 하나를 업데이트할 때마다 지구상의 어떤 동물이 완전히 멸종한다는 괴상한 말이에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저는 앱 업데이트 잘 안 해요. 그냥 할 때마다 찜찜해서.” 





“주로를 달리지 못하는 말들은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어요.”

죽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서진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운이 나빠서 죽게 되는 경우는 단순해요. 그 좁은 마방을 벗어나 살 곳이 없거든요. 저는 안락사를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무턱대고 반대하는 건 결국 그 아이들에게 알아서 죽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미 이 행성은 인간 중심의 행성이 됐잖아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세상 밖으로 나가면 어느 동물도 살아남지 못해요. 동물들이 살 수 있는 네트워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고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다시 프로그래밍을 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이 사회가.”





“삼차원의 우리가 일차원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 





그때는 도망치는 기간을 정해뒀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정확한 날짜를 정해두지 않으니 돌아가는 날이 점점 미뤄졌다. 가끔 세상은 은혜가 들어갈 틈 없이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애초에 은혜가 들어갈 수 없게 조립된 로봇 같았다. 그런 세상에 제대로 한 방을 날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을 때마다 분에 못 이겨 경마장을 찾았다. 투데이는 은혜만의 대나무 숲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비밀이 보장되는 유일한 속마음의 창구였다. 그런 투데이가 이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콜리잖아요. 콜, 리. 콜, 미. 발음이 비슷하지 않나요? 언제든 저를 부르세요. 콜-미."

"그런 거는 누가 가르쳐주는 거야?"

"괜찮았나요?"

"별로였는데, 들을 만은 했어."

소방관이 영웅이죠, 뭐.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요. 당신의 119.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구질구질한 멘트가 생각났다. 콜리의 시스템을 만든 사람도 한물간 낭만파이리라. 진흙 속의 진주가 예쁘다고 말하는, 그런 구시대적인 사랑을 꿈꾸는.

"너 눈이 너무 밝다."

보경의 말을 듣고 콜리가 눈의 밝기를 낮췄다. 방이 어두워 눈은 마치 저 멀리 떠 있는 행성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내 시간은 멈춰 있어."

화재가 난 빌딩 속에 있던 소방관을 기다리던 그 시간에 멈춰 있어. 반드시 살아서 나오리라 믿고 있는 그 시간 안에서.

시간이 흘러 보경은 그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간은 그곳에서 1초도 흐르지 않았다. 보경이 매일 일찍 일어나 쉬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달리기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정적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수면 위에 돛을 펼치고 있었다.

"왜요?"

콜리가 물었다.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시간은 고여 있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가도 여지없이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연재는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숱한 시간 동안 이해받지 못해 상처 입은 날들이 쌓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 터였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모두에게 존재했다. 적어도 연재는 그렇게 생각했고,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연재는 은혜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어디서 누구와 있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집으로 향해야 했다. 친구들은 연재에게 언니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왜 항상 갑자기 집에 가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연재는 덤덤하게 은혜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연재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이해한 건 아니었다. 이해에는 한계가 있고, 횟수가 있고, 마지노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이해해주던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방의 이기심을 지적했다.

"그런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몇 번씩 그렇게 하면 우리는 뭐가 돼?"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고.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잠잠했던 연재의 돛을 한 방에 날렸다. 어느 날 대회를 같이 나가자고 다가와 뻔뻔하게 협박했던 지수는 특유의 당당함을 무기로 내세웠다. 연재의 차가운 반응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세상에 저런 애도 있구나. 처음에는 싫었지만 계속 싫지는 않았다. 성질에 못 이겨서 버럭 화를 내는 게 웃기기도 했다. 지수가 귀찮게 느껴지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옆에 있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연재가 이것만은 콜리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이 다 망가진 채로 건초더미에 누워서 나한테 하늘이 예뻤다고 말하는 네가 불쌍했어. 그리고 순간 내가 너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도 들었어. 그대로 내버려 두면 너는 사라지겠지만 내가 데리고 오면 사라지지 않으니까. 같잖은 연민이지. 그래도 후회 안 해. 나는 내가 좋아했던 걸 그동한 싫어한다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더라고. 너 만지면서 알게 됐어. 그리고 지금 내 말에는 대답하지 마. 명령이야."

콜리는 연재의 명령을 지켰지만 처음으로 명령을 어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이 몸체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났는지, 콜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에서 무언가 어긋남을 느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연재를 방해할 수 없어 가만 충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연재는 그 후로도 같은 영화를 세 번씩 더 봤다. 콜리는 한 번 본 순간 장면에 등장하는 소품의 위치까지도 외웠지만 연재는 볼 때마다 새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인간의 눈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과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3초를 보냈다. 기수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보다 더 길고 긴, 충분히 모든 나날을 되짚을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긴 시간을.

나의 최후다. 엉덩이부터 상체까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으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맑은 하늘이 보였을 뿐이었다.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미확인 식물 연구소

작고 귀여운 하얀 토끼

풀을 뜯어 먹는다

작고 귀여운 푸른 풀

토끼를 뜯어 먹는다

파리를 잡아먹는 식물을 파리지옥이라 부르니까 토끼를 잡아먹는 이 식물의 이름을 앞으로 토끼지옥이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소장님 이 식물은 토끼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건 죄다 뜯어 먹는걸요? 소장님이 말씀하시는 사이에도 연구원 한 명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럼 그냥 지옥이로군요

지옥은 연구소장마저 뜯어 먹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연구 끝에 저희 미확인 식물 연구소는 이 식물이 줄기와 가지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뿌리가 튼튼한 이 식물은 개체에 따라 뿌리를 다리처럼 이용해 이족 보행하기도 한다는 사실도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연구원 몇몇이 도망치다가 식물에게 붙잡혀서 뜯어 먹혔거든요

실험은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동반한다

토끼와 쥐들에게 너무 많은 몹쓸 짓을 해 왔군요

지옥에게 뜯어 먹힐 때 연구원들은 이러한 생각을 했다

이것은 미확인 식물 연구소의 마지막 연구가 될 것이다

미확인 식물 연구소에서는 이 식물의 이름을 지옥풀이라 부르기로 합의하였다

살아남은 연구원들은 언론을 통해 이를 발표하였다

저희는 이 식물을 지옥풀이라 부르기로 했으며 이 지옥풀의 위험함을 몸소 느껴 본바, 지옥풀의 재배를 엄격히 금지할 것을 간곡히 요청합니다. 그러나 저희 미확인 식물 연구소는 이 지옥풀이 어디서 어떻게 자라났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옥풀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를 잡아먹으며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영양분의 충족 같은 것이 아닌 그냥입니다. 여러분 부디 이 지옥풀에 대해 궁금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지옥풀의 학명은 'Apocalyptuse'입니다. 저희는 저희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라의 숲에서 벌어진 일들은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호수를 거니는 하얀 영물은

푸른빛을 띄고 있다

고양이님의 배려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눈을 떴을 때 처음 들어온 풍경

편하게 있으라는 말이 오히려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걸요

하얀 생물이 푸르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의 눈 때문이다

저 영물도

푸른 눈의 백룡도

영물은 앞다리를 벌리고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신다

파문이 인다

저녁으로는 뭘 먹고 싶으세요?

영물은 말을 할 때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만 말을 한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나요?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숲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어두워지는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네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라는 말을 들으면

숲의 표정은 싸늘해지는 것이다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사실은 더 오래 여기 머물고 싶어요

라는 말을 들어야 비로도 따뜻해지는 숲의 얼굴이다

영물은

나의 잘못을 덮어 주고 포근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같이 저녁 먹어요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토끼님도 고양이님도

푸른 눈의 백룡도 그러니까

같이 저녁만 먹고 가요

영물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말했고

뾰족한 숲

천 년 동안 계속되는 저녁 식사

푸른빛을 띠는 내 얼굴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다음 정류장은 문래동 남성아파트입니다

안내 방송에 놀라 화들짝 깼다 나는 분명 부천에 가고 있었는데

애인이 떠나가고 하루 종일 술만 마셨다

술만 마셔서 애인이 떠나갔다

하지만 정말 제가 그리운 것은 애인보다는

애인이 기르는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는 뭐라 해야 할까요?

고양이로 이루어진 생명체 같습니다

고양이로 이루어져서 이름도 고양이인 것이지요

아무튼 그리워하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꾹꾹이 당하고 싶다 궁디 팡팡하고 싶다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애인이 그립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나는 애인도 그리워했어

그 증거로 애인이 사는 지역은 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거든

그냥 다 없었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찝찝함은 뒤로하고

분명 버스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명 지하차도를 향하고 있었는데

잠깐 눈 감으니까 신도림을 지나고 있었다

기사님 이거 부천역 가는 버스 아니에요?

네 맞아요

문래동은 반대 방향 아니에요?

네 맞아요

그럼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네 맞아요

어떡해요 그럼 저는 부천에 가야 하는데

그러자 기사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네 맞아요 하지만 당신은 부천에 갈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고양이가 있잖아요? 우리는 고양이를 무서워하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기사는 목이 굳은 것처럼 정면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승객들도 모두 창밖만 바라본다

버스는 문래동을 지나 서울숲에 정차했다

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모두 하차했다

버스 기사도 버스에서 내렸다

피식회

형광등을 갈아야지 갈아야지 생각만 하다가

어느덧 내 장례식이었다

점심도 못 먹고 너무 급하게 죽었구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육개장 맛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나의 죽음에선 짠맛이 났다

멀미가 났다

어제 영화 사이트에서 평을 읽던 영화는 사후 세계를 소재로 한 영화였고

내 영정 사진을 보며 너는 엉엉 울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은 영정 사진으로 기억된다는데 이 사진은 너무 못생기게 나왔잖아

육개장이 짜다는 이유로 너는 또다시 운다

그건 네 눈물이 네 입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해 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고 말았구나

갈지 못한 형광등이 쉴 새 없이 깜빡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난 건데

너랑 나 안 좋게 헤어졌잖아 그것도 엄청 나쁘게

그렇게 생각이 드니까 편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형광등은 여전히 깜빡이고 너는 울면서 편육 한 접시를 더 달라 한다

어지러워, 목말라, 눈도 너무 뻑뻑해

유가족들의 뜻에 따라 시신은 대학 병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목이 말랐다 바닷물이라도 마신 것처럼

물고기 행진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워그레이몬마저 여지없이 나동그라졌을 때 쉬라몬은 그만 울고 말았다 필살기가 고작 물고기 행진이라는 게 너무 억울해서

석아! 진화시켜 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쉬라몬? 석이는 오늘 공무원 시험 보러 갔잖아! 여기는 나랑 태일이 그리고 쉬라몬 너뿐이라고!

그러게 집에 있으라 했잖아 쉬라몬!

내가 도움이 안 돼서 그래?

아니 쉬라몬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오늘은 석이 형도 없고 저 녀석은 아주 흉포한 디지몬이니까

위험하니까 위험하니까 그렇지

쉬라몬의 필살기는 작은 물고기들을 소환해 조종하는 '물고기 행진!'이다

쉬라몬은 쿠가몬과의 전투에서 다른 동료 디지몬이 필살기를 쓸 때 혼자 몸을 던져 백 태클을 걸었다

다시 한 번 가자 워그레이몬!

진화가 풀렸던 아구몬이 다시 워그레이몬으로 초특급 진화했다

진화할 때마다 이름이 바뀌면 그건 이름이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 아닐까?

테라 광선!

워그레이몬이 대기 중에 흩어진 에너지를 한곳으로 집중시켜 만든 커다란 에너지 탄을 이름 모를 흉포한 디지몬에게 던졌다

이름 모를 흉포한 디지몬은 이번에도 테라 광선을 삼켜 버렸다

테라 회오리!

워그레이몬은 곧바로 몸을 빠르게 회전시켜 회오리바람을 만들어 냈다

그대로 이름 모를 흉포한 생명체에게 돌진해 삽시간에 이름 모를 생명체의 몸을 찢어발겼다

태일과 쉬라몬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쉬라몬은 친구들이 적을 쓰러뜨렸을 때 박수 치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고

죽은 디지몬은 데이터가 되어 사라지지도 않고 그냥 바닥에 떨어진 잔해 그대로 남았다

물고기 행진으로 죽은 물고기들도 돌아오지 않는다

합평에서 살아남기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어느 합평회 현장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번 목표는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탈출하는 것입니다 합평회는 문학이나 하는 샌님들로 그득한 곳이라 지난번 살아남았던 명절에서 살아남기에 비하면 훨씬 쉬울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그것은 착각이라고 단호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합평회에서 살아남는 건 명절에서 살아남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절은 길어야 3일이지만 합평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합평회에 있다가 자칫 문학에 매력이라도 느낀다면 정말 끝입니다 합평회는 문학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합평회에 차명하려면 합평에 가져갈 작품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합평회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탈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 쓰려고 하지 말고 그냥 아무거나 쓴 다음에 가져가십시오 할 수 있다면 아예 아무것도 안 써 가지고 가는 게 좋겠지만 저들을 섣불리 자극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함부로 특정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그들을 자극하는 행동인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섣부른 행동은 금물입니다 명심하세요

작품을 읽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받습니다 질문에 대답하지 마세요 그냥 당신이 할 수 있는 문학에 대한 말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으세요 아무것도 모르고 쓴 척 의도하지 않는 척 천재인 척 가만히 있으세요 행여나 당신이 쓴 문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자칫 문학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합평회가 무서운 점은 거기에 있어요 지난번 합평회에서 살아남기에서도 열 명이 참여했는데 아홉 명만 살아남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끔찍하죠 그 사람은 아직도 문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합평회에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의 차례를 무사히 넘겼다면 거의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핸드폰만 하세요 핸드폰만 계속이요 어차피 살아남고 나면 다시는 안 볼 사람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는 살아남는 것에만 신경을 씁시다

혹시 당신이 대충 써 간 작품이 누군가의 질투를 살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주 기쁜 일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질투하는 것 같거든 최대한, 최대한 더 대충 썼고 막 썼고 그냥 썼고 나는 문학에 별로 관심이 없고 문학에 목숨걸지 않았다는 태도를 보이세요 그걸 본 질투자가 문학을 접을 수도 있습니다

합평이 끝이 났습니다 이제 무사히 빠져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가져온 텍스트가 좋았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은 듣지 마세요 말을 섞지 마세요 얼른 빠져나오세요 만일 누군가 당신에게 마라탕을 먹자고 말해도 절대로 먹어선 안 됩니다 마라탕 국물에 빠지는 게 아니라 문학에 빠질 수 있어요 합평이 끝난 뒤 할 얘기는 문학 얘기뿐일 겁니다 명심하세요

당신은 궁금할 겁니다 왜 문학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 잘못된 거죠? 좋은 질문입니다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요

 Thanks for coming

집에 가서 연락할게요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냥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불을 끄고 눕는다

평소에는 주로 무얼 하냐는 질문에 그냥 누워 있다고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다

핸드폰으로 새로 살 파자마를 찾는다

검은색 잔체크무늬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색을 다른 사람들도 좋아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보라색을 좋아하는 게 멋져서 보라색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라색이 좋아서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

누워서 생각했다

레드벨벳 좋아한다는 말 들었을 때 너무 반가워하지 말걸

가장 좋아하는 노래도 행복이 아니라 빨간 맛이라고 할걸

반성이 길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반성을 길게 했다

가능한 결과를 생각하고

가능한 결과가 내가 바라는 결과뿐이라 다시 반성했다

집에는 잘 들어가셨어요? 저는 이제야 집에 도착했네요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요

라고 메세지가 왔을 때 나도 모르게

고마워요

라고 보냈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떼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몰라. 계곡을 거슬러 달리고 또 달렸어. 갑자기 숲이 환해지고, 봄날의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우거졌어. 어린아이들이 우글거리고, 맛있는 냄새가 났어. 수많은 가족들이 소풍 중이었어. 그 광경은, 말할 수 없이 찬란했어. 시냇물이 소리내서 흐르고, 그 곁으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 김밥을 먹는 사람들. 한편에선 고기를 굽고, 노랫소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쟁쟁했어.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가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후식으로 과일이 나왔을 때 아내는 사과와 오렌지를 한조각씩 먹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거의 드시지 않았잖아요?"

사장 부인이 화사한 사교적 톤으로 아내를 염려했다. 아내는 웃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은 채 대답 없이 그 여자의 우아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응시가 좌중의 기분을 끔찍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내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있을까. 저 중년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걸까. 순간, 한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그녀의 머릿속이, 그 내부가, 까마득히 깊은 함정처럼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겠지. 예전부터 난, 누군가가 도마에 칼질을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 그게 언니라 해도, 아니, 엄마라 해도. 왠지는 설명 못해. 그냥 못 견디게 싫은 느낌이라고밖엔.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들한테 다정하게 굴곤 했지. 그렇다고 어제 꿈에 죽거나 죽인 사람이 엄마나 언니였다는 건 아니야. 다만 그 비슷한 느낌, 오싹하고, 더럽고, 끔찍하고 잔인한 느낌만이 남아 있어.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살해한 느낌,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잘 수 있다면. 한 순간이라도 의식을 놓을 수 있다면.

셀 수 없이 깨어나 맨발로 서성거리는 밤에 집은 식어 있어. 식은 밥, 식은 국처럼 싸늘해. 검은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두운 현관문이 간혹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 따위는 없어. 돌아와 이불 밑에 손을 넣어보면, 다 식어 있어.

그는 공연장 밖의 홀을 가로질러가며,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 공연포스터를 일별했다. 시내 서점에서 우연히 저 포스터를 발견하고 그는 몸을 떨었었다. 방금 끝난 마지막 공연을 행여 놓칠까봐 불안해하며 서둘러 전화예약을 했다. 포스터에는 벌거벗은 남녀가 등을 보인 채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목덜미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붉고 푸른 꽃과 줄기, 무성한 잎사귀가 그려져 있었다. 그 앞에서 그는 두려웠고, 흥분했으며, 압도되었다. 일년여 전부터 그를 사로잡았던 이미지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ㅡ안무가ㅡ에게서 흘러나온 것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과연, 그가 꿈꾸어왔던 대로 그 이미지가 펼쳐질 것인가.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그는 물 한모금 마실 수 없을 만큼 긴장해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홀에 들어찬, 화려하고 외향적으로 보이는 무용계 사람들을 피해 그는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몇분 전까지 극장을 가득 채웠던 전자음악, 현란한 의상, 과장된 노출과 성적 몸짓들 속에 그가 찾던 것은 없었다. 그가 찾았던 것은 더 고요한 것, 더 은밀한 것, 더 매혹적이며 깊은 것이었다.

들어온 사람은 긴 머리를 질끈 묶은 후배 J였다.

"이런,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더니."

그는 짐짓 느긋하게 허리를 뒤로 젖히며 웃어주었다.

"커피 한잔 할래요?"

J가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내들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J가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간 동안, 그는 더이상 자신만의 공간이 아닌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듬성듬성 정수리가 드러난 것이 신경쓰여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오래 억눌러온 고함 같은 것이 기침처럼 터져나올 것 같다고 그는 느꼈다. 그는 허둥지둥 가방에 물건들을 쓸어넣은 뒤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J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빨리해 비상계단 반대편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거울처럼 번들거리는 엘리베이터의 출입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충혈된 자신의 두 눈이 마치 눈물을 흘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가 작업실에서 눈물 따위를 흘린 기억은 없었다. 그러자, 그 벌겋게 금이 간 눈을 향해 그는 침을 뱉고 싶어졌다. 수염이 거뭇거뭇한 두 뺨을 피가 비칠 때까지 후려치고, 욕망으로 부풀어오른 추한 입술을 구둣발로 짓이기고 싶었다.

처제가 위기를 넘긴 뒤 그는 동서가 쥐여준 돈으로 매점에서 셔츠를 사 갈아입었다. 피비린내 나는 옷을 버리는 대신 공처럼 뭉쳐들고 택시에 오르며,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마무리했던 작업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것으로 기억된다는 데 그는 놀랐다. 그가 거짓이라 여겨 미워했던 것들, 숱한 광고와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들,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물들을 인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었던 작품이었다.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 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그는 더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처제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푹푹 찌는 여름 오후의 택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협했고, 구역질나게 했고,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그때 했다.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이제는,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ㅡ곡식과 나물과 날야채만 먹는다는 것마저 그 푸른 꽃잎 같은 반점의 이미지와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어울리게 느껴졌으며, 그녀의 동맥에서 넘쳐나온 피가 그의 흰 셔츠를 흠뻑 적시고 꾸덕꾸덕 짙은 팥죽색으로 굳게 했다는 것은 그의 운명에 대한 해독할 수 없는, 충격적인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뜻밖에 처제는 지하철역의 출구에 먼저 와 있었다. 역사에서 나온 지 오래된 듯 다소 흐트러진 자세로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허름한 청바지에 두툼한 갈색 스웨터를 입어, 마치 혼자 겨울에서 걸어나온 사람 같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 그녀의 얼굴을, 오래 햇빛이 고인 그 몸의 윤곽을, 그는 얼른 부르지 못하고 홀린 듯 지켜보았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추운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자세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만큼 단단한 고독을 음영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젠 동서라고 부를 필요도 없게 된 그녀의 옛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탐했을 거란 상상만으로 그는 일종의 수치를 느꼈다. 둔감한 그는 그녀의 몽고반점을 알기나 했을까. 알몸의 두 사람을 상상한 순간, 그것은 모욕이라고, 더럽힘이라고, 폭력이라고 그는 느꼈다.

그녀의 접힌 우산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버스 바닥은 이미 젖어 검게 번들거린다. 우산으로 채 가리지 못한 비 때문에 그녀의 블라우스와 바지는 절반 가까이 젖었다. 버스는 속력을 내어 빗길을 달린다. 그녀는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안쪽으로 걸어들어간다. 두 좌석 다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창 쪽에 앉는다.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김 서린 차창을 닦는다. 오랫동안 혼자여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시선으로, 차창을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를 바라본다. 마석읍을 벗어나자 늦은 유월의 숲이 도로변으로 펼쳐진다. 폭우에 잠긴 숲은 포효를 참는 거대한 짐승 같다. 축성산으로 접어들면서 도로는 차츰 좁고 구불구불해진다. 그럴수록 숲은 더 가까이 다가와 젖은 몸을 넘실거린다. 석달 전 그녀의 여동생 영혜가 발견되었다던 숲이 저 산기슭 어디쯤이었을까. 빗발속에 흔들리는 나무들 하나하나를, 그 아래 숨겨져 있을 캄캄한 공간들을 눈앞에 그리다가 그녀는 차창에서 고개를 돌린다.

아마도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은 그가 찍은 이미지들이거나, 그가 찍을 이미지들뿐이었을 것이다. 결혼 후 그의 전시회에 처음 갔을 때 그녀는 놀랐는데,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해 보이던 이 남자가 이렇게 많은 곳을 캠코더와 함께 누비고 다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촬영이 민감한 장소에서 그가 치렀을 협상, 때로 보여야 했을 용기와 뱃심, 끈덕진 인내를 그녀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말하자면, 그의 열정을 믿을 수 없었더, 그의 열정어린 작품들과,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 같은 그의 일상 사이에는 결코 동일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간격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영혜를 버릴 수 없었다. 누군가 입원비를 대야 했고, 누군가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 가을 다섯살이던 지우는 이제 여섯살이 되었고, 환경이 좋고 입원비가 합리적인 이 병원으로 옮길 때쯤 영혜의 상태는 매우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이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직원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지우를 데리러 가는 저녁이면 그녀는 무덤처럼 지쳐 있었다. 음악과 연인들로 넘쳐나는 열대야의 거리 한편을 걸으며, 그녀는 예의 캄캄한 구멍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빨아들이려 하는 것을 느꼈다. 땀에 젖은 몸을 끌며 그녀는 그 거리를 통과해 나아갔다.

아직 어두운 새벽, 지우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서너시간. 어떤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혜가 들려준 환상 때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무수한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의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도시들과 소읍들과 도로는 크고작은 섬과 다리들처럼 그 위로 떠올라 있을 뿐, 그 뜨거운 물결에 밀려 어디론가 서서히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그녀는 고개를 든다.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나가고 있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갯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죽어가고 있었다. 고작 숨바꼭질 때문이었다. 갯벌 한가운데에 비죽 솟은 암석에 몸을 숨겼는데, 잠깐 사이 바닷물이 들어차 그대로 망망대해에 고립된 것이다. 어른들은 우리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찾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파도가 암석을 덮칠 때마다 바닥물이 튀어 입술에서는 짠맛이 났다. 피부는 양서류의 것처럼 차가웠으며, 체온이 빠르게 떨어져갔다. 사방에 검은 물이 일렁였다. 육지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우리는 정말이지 착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의식마저도 흐릿한 와중 눈에 들어온 건 우영의 둥그런 어깨였다. 나에게 겉옷을 벗어주고 민소매만 걸치고 있는 우영의 어깨. 산지기의 딸인 우영은 허구한 날 돌산을 오르내려서인지 잔상처가 많았는데, 그날만은 유난히 희고 매끄러워 보였다. 물에 젖었기 때문일까? 꼭 흰 뱀 같았다. 아빠와 아쿠아리움에서 보았던 물뱀이 떠올랐다. 좁은 어항 안에서 나풀거리는 게 꼭 춤을 추는 것 같기도, 발악하는 것 같기도 했지. 어항 속 물뱀의 비늘을 떠올리며 나는 우영에게로 손을 가져갔고, 곧 검지 끝에 축축한 피부가 닿았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우영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사방에서 파도가 일렁였다. 나는 우영에게 물었다.

"내가 밉지 않아? 나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우영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고작 숨바꼭질 때문에 죽게 생겼는데도?"

"네가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우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오한이 드는 듯했다.

"난 이 갯벌에 언제 물이 차는지 알아. 그래도 널 찾고 싶어서 찾은 거야."

"왜?"

"내가 술래였잖아."

"너한테 술래를 시킨 것도 난데."

우영이 피곤하단 듯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깨에 걸친 우영의 겉옷을 벗어 들고 우영의 옆으로 가 앉았다. 내 겉옷과 우영의 겉옷을 겹쳐 우리의 어깨에 둘렀다. 내 왼쪽 어깨와 우영의 오른쪽 어깨가 닿았고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쳤다. 우리가 몸을 숨긴 암석 위까지 물이 밀려왔다. 우리는 휩쓸려가지 않도록 어깨를 붙이고서 힘을 주고 버텼다. 우영의 불규칙적인 호흡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호흡과 떨림도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온통 암흑뿐인 밤바다를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한 우영을 바라보았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물소리와 암석의 이끼 냄새를 타고 우영의 목소리가 닿았다.

"내가 찾지 않으면 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거든."

우영은 언제나 그랬다. 엄마와 아빠보다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그 어떤 친구들보다도 나에 대해 잘 알았다. 20년 후의 그 역시 알았을 것이다. 

이딴 식으로 사라지면 내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차 안에서 확인한 휴대폰 액정에는 낯선 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앞 번호가 010이 아닌 지역 번호로 시작해 잘못 온 전화겠거니 했다. 전화가 다시 걸려온 건 형석의 차에서 내려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였다.

[우영 씨가 자살했습니다. 오늘 새벽 장자도항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어요. 해안가에 버려져 있던 휴대폰에 이정해 씨에게 쓰려던 메시지가 남아 있어 연락드립니다.]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한 스피커 너머의 상대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했다. 정해는 반응하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우영과 자살이라니. 그 두 명사는 공존할 수 없다.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우습기까지 했다. 몇 번이나 수신을 거부했음에도 전화는 끈질기게 걸려왔다. 집요한 진동음이 꼭 덫 같았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녹슨 톱니가 둘러싸고 있다.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는 직감이 일지만, 미끼가 미끼인 이유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 열렸다가 닫힌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해는 손가락을 수신 버튼으로 가져갔다.

정해는 고개를 저으며 복은이 건넨 손수건의 모서리를 응시했다. 익숙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래로 향한 삼지창. 뫼산 자를 뒤집어 만든 영산교의 표식. 문양의 아래에는 세 단어가 나열되어 있었다. 재회 소망 사랑.

"재회."

정해는 시선을 돌려 복은을 마주 보며 답했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먼저 내린 승객들은 전부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시체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걷는 좀비처럼. 그 느린 행렬의 끝에 있는 건 영산의 진입로일 테다. 어두컴컴한 마을에서 유일하게 환히 빛을 뿜어내는 곳. 정해는 그 빛 속에 누가 있는지 안다. 정해를 바라보는 복은의 눈동자에 달빛이 내렸다. 정해는 복은을 향해 싱긋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할머니 손수건에 적힌 것처럼요. 재회, 소망, 사랑."

재회 소망 사랑. 그 순간, 복은이 세 단어를 빠르게 중얼거리며 몸을 붙여왔고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정해의 손에 얽혔다. 복은은 집요하게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어쩐지, 아가씨한테선 같은 냄새가 났어."

그리고 같은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동지를 보듯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상실의 냄새 말이야. 산주님한테 가자. 그분이 다 해결해주실 거야."

우영과 있을 땐 뭐랄까, 발 딛고 선 모든 곳이 미아도 같았다. 못생긴 회색 건물들이 기암괴석처럼, 매연 가득한 도로가 서해 바다처럼 보였다. 쫓기듯이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힘들거나 불쾌한 일들을 잊을 수 있었으며 모든 일이 결국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정해는 우영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우영이 상상하는 미래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대학에 간다면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를 캐물었다. 우영은 원예나 조경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언젠가 네가 꾸민 정원에 놀러 갈래."

그렇게 말하면 우영은 머쓱하게 웃었다.

섣불리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수챗구멍 위 머리카락처럼 뭉쳐갔다.

만조의 바다는 최양희를 집어삼킬 것이다. 흰 포말에 감싸인 최양희는 해류를 따라 떠돌다 어느 항구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영처럼 물에 불어터진 채. 귓가에 진짜인지 환청인지 모를 목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만조를 기다리자.'

"만조를 기다리자."

정해는 그 말을 중얼거리며 엉망이 된 제단을 등진 채 밖으로 나가는 길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비좁은 통로를 지나 다시 위로, 위로 향했다.

어설픈 애도를 마치고 비틀거리며 도착한 곳은 절벽이었다. 등껍질바위가 내려다보이고, 복은이 몸을 던진 중간 절벽. 그 끝자락에 정해는 주저앉아 다리를 모았다. 먼 수평선 너머로 빛이 퍼지고 있었다. 곧 해가 뜰 것이다. 중간 절벽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간조인지 만조인지를 알 수 있었다. 간조일 때는 갯벌이 펼쳐지고 만조일 때는 검은 바다가 펼쳐졌다. 아직은 만조가 아니었다. 바닷물은 더 들어찼다가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쯤 빠져나갈 것이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수풀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라기엔 가볍고 산짐승이라기엔 분명한 발소리였다. 정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떤 전설이 아주 오래 이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정해는 생각했다.

진흙 묻은 흰 발이 느리게 다가와 정해의 옆에 섰다. 해진 레이스 자락이 나부꼈다. 정해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옆에 선 존재를 향해 말했다.

"두 번째로 같이 보는 일출이야."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너랑 보는 바다가 제일 예쁜 것 같아."

맨발의 주인은 그제야 다리를 굽혀 정해의 옆에 앉았다. 물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차갑고 미끄러운 흰 피부가, 어깨와 어깨가 맞닿았다. 정해는 눈을 감았다. 피가 말라붙은 머리카락이 아닌, 20년 전의 그것만큼이나 축축하고도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콧등을 간질였다.

마주하고 싶었던 주말의 색채란, 굳이 따지자면 노란기가 섞인 녹색 같은 것이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바라보고 싶을 만큼 다정한 연인의 얼굴, 잠기운에 뒤척일 때 머리에서 나는 흐릿한 샴푸 단내, 직선이 되기를 거부하는 목덜미의 보드라움, 어제 마시기를 깜박해 다 식어버린 커피의 향,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슬며시 기어드는 아침 해의 온도, 들숨에 무질서하게 엉키는 오전 공기의 질량감, 좌절에 도달하지 않을 정도로만 늦어버린 일정, ‘나 5분만 더 누워 있을게요’라고 말하면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이는 알람 시계.

바랐던 하루의 시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은주가 답신으로 엄지를 들며 촐싹거리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기사, 동참, 이모티콘. 컵라면보다 빠르게 해결 가능한 이 선의를 창조해 낸 것은 어쩌면 나의 마음이 아니라 네이버페이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골치 아프게 재고 따질 것 없이 3만 원을 지불하고서, 내가 누릴 수 있는 효용을 가늠했다. 과연 그 효용이 부츠컷 청바지보다 값질까? 일단 나는 이걸로 기부금 연말정산 공제를 받을 수 있겠지. 아아, 제발 내년에도 13월의 보너스가 생겼으면. 울고 있는 아동들아, 내가 환급금을 받을 수 있도록 기를 모아줘. 그렇지만 3만 원 이상은 안 된단다. 내 피 같은 돈으로 휴지를 사서 코를 팽, 하고 풀어보렴. 아주 시원하겠지. 나는 너희를 정말로 걱정해. 다 같이 좋은 삶, 아름다운 삶을 살자.

그래, 이건 효용을 위한 일이었다. 아니다, 이건 순수한 선의였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진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제법 많은 인간이 과거를 동경하게끔 설계되었다는 걸 은주와 수원은 알고 있을까.

3년 전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며 그때는 참 젊고 좋았다고 그리워한다. 정작 그때도 지금만큼의 스트레스가 있었겠지만, 시간이 추억으로 이름을 바꾸면 제법 찬란한 것으로 포장된다.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대부분의 실수가 그럭저럭 자랑할 법한 인생의 트로피처럼 느껴지는 반면, 현재는 아무런 특색 없이 쌓이기만 한 폐지 묶음 정도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폐지도 시간이 지나면 트로피가 된다. 3년 후에는 오늘을 추억할 것이고, 5년 후에는 오늘을 갈망할 것이고, 10년 후에는 오늘이 찬란했다는 평을 남기겠지.

오늘의 고민이 없던 어제, 오늘의 질병이 없던 어제, 오늘의 늙음이 없던 어제. 왜, 이런 말이 있지요. “‘자살’을 거꾸로 해보세요, ‘살자’입니다.” 그렇다면 ‘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와 ‘살’이라는 두 글자로 만드는 선언은 극단을 향한다.

우리는 폐지와 트로피 사이에서도 중용을 찾기보다는 둘 중 하나만을 치열하게 욕망하며 살아간다.





감자 뇨끼에서 고소한 트러플 향이 났다. 은주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잠시 쉴 시간을 허락한다면 물컹한 뇨끼 옆구리에 포크를 꽂아 넣어야지.





어떻게든 악인이 되지 않는 방식만 선택하는 건 마음 안에 용수철을 꾹 눌러두고 손을 떼지 않는 일과 같았다.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튀지 않게끔 스스로를 절제하는 일. 그 결과로 지금의 나는 수원과 마주 보고 누워 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고 불합리했다.

선량함을 고집하기 위해 지켜온 선택들이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순간, 미래에 남는 건 원하지 않던 삶이라는 모순.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 이 남자와의 미래가 저주라 생각하며, 내가 해온 모든 일이 쓸모없는 짓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을 예측하는 지금의 끔찍함.






“마지막의 이상한 글은 뭔데요?”
“라면에 들어 있는 건더기 스프라고 생각하세요. 전체적인 맛은 별로지만 건더기만큼은 꽤 공들여 만드는 제품이 있기도 하거든요.”





만약 수원과 결혼을 한다면 은주는 나를 사랑했던 만큼 증오와 정을 담아 봉투를 채워줄 여자였다. 그걸 내 손으로 날려버렸다. 어리석어라.

하지만 천구天球를 짊어진 아틀라스도 까마귀에게 빌었을걸? 사랑하는 세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게 해달라고.






차창 너머의 하늘에도 내가 낸 칼자국이 생겨나니, 그 살점을 비집고 피가 찬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내려줘.”
“좋을 대로.”

목을 잘 닦은 수원은 핸들을 다시 잡았다. 나는 갓길에 하차했다. 수원은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의 관계는 내가 ‘좋을 대로’ 정의될 것이라 말했다. 헤어진다거나, 조금 더 만나보자거나, 그 어떤 의미에도 속하지 않는 말이었다.

온몸이 여전히 뜨거웠다.

“나는 너를 이해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어쩌면 마지막으로 들을 그의 음성이었다. 고속도로와 어둑한 하늘이 만드는 소실점을 향해 검은 세단은 한 번의 제동 없이 달려갔다. 내 손 안에는 가방과 빵칼, 그리고 생수 하나뿐이었다. 오렌지 파운드케이크의 향기는 흔적을 지키지 못하고 흩어졌다.

생수병을 확인했다. 유통기한은 이미 지나 있었다.

누군가 묻는다. “작가님의 SF 입문작은 무엇인가요?” 혹은 “작가님이 SF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형식은 다르지만 대개 내 ‘최초의 SF’에 관한 물음, 즉 무엇이 나를 SF의 세계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머뭇거리다 수줍게 대답한다.

“〈디지몬 어드벤처〉요.”

아서 클라크, 테드 창, 스티븐 스필버그, 옥타비아 버틀러, 김보영, 배명훈, 〈스타워즈〉, 〈스타트렉〉 등의 답변을 제치고 등장한 이름은 장내를 잠시 정적에 휩싸이게 만든다. 이윽고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럼 나는 그 분위기를 꽤 만족스러워하며 한마디 덧붙인다.

“정말이에요. 〈디지몬 어드벤처〉는 정말 뛰어난 SF 애니메이션이거든요.”

그냥 던지는 농담이 아니라 〈디지몬 어드벤처〉는 정말로 SF 장르의 특성을 모두 충족시킨다. 결정적인 근거는 배경이 ‘디지털 세상’이라는 거다. 어떻게 SF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주인공들은 디지털 세상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며, 그곳의 혼돈은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매트릭스〉 시리즈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내가 디지몬을 처음 만난 2002년에는 대한민국이 축구공에 영혼을 팔았다. 이때 나는 쭉 살던 인천에서 벗어나 아주 잠깐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주택단지에 살게 되었다(단지 구석에 관리되지 않은 저수지가 있고 그 둘레가 정글처럼 우거진 곳이었다). 아빠가 처음 해외 출장을 떠난 해이기도 했으며 내게 처음으로 세상을 향한 커다란 질문과 존재의 무의미함이, 명명할 수 없는 거대한 공허와 우울의 덩어리로 다가온 때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어떤 단어로 이 감정들을 말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더 선명하게 마주 보고 인식하고 고민했겠지만(그러는 한편 조금 즐기기도 했겠지만), 그러기에 열한 살은 무지했고 어렸다. 이 다채로운 감정들을 나는 ‘슬프다’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게 내 언어의 한계였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슬펐다. 내가 슬픈 건지 세상이 슬픈 건지 모르고 그저 온통 슬프기만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올챙이가 드글드글해 까맣게 변한 저수지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저수지를 가득 메운 올챙이를 징그럽고 안쓰럽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내가 저수지의 올챙이가 된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면서 몇 시간이고 바라보는 것이 당시 내가 내 안의 고독과 우울을 감당하는 방법이었다. 숨을 아무리 크게 쉬어도 속이 후련해지지 않아 답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도 내가 아주 작은 저수지에 있는 모양이라고, 저 올챙이들처럼. 이 세계 밖에 다른 세상이 있는 거라고. 나는 거기서 왔기 때문에 여기가 답답한 거라고.





어쨌거나 〈세일러문〉은 내게 공포 장르가 되어 이후 다시 찾아보지 않았기에 내가 기억하는 장면이 정말 그만큼 무서운 장면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세일러문〉의 시청 등급은 15세 이상이다. 시청 등급 준수는 이렇게나 중요하다). 중요한 건 주인공이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감정을 지금의 내가 대신 표현하자면 이랬을 것이다.

‘인물들이 다 죽었다고? 어째서?’
‘왜 주인공이 자기를 희생시켜 모두를 구하는 거지?’
‘왜 구원에는 희생이 따르지?’
‘지키고 구한다는 건 굉장히 아프고 잔인한 거구나.’





내레이션과 함께 1화는 이렇게 끝난다. 〈디지몬 어드벤처〉와 그 후속작인 〈파워 디지몬〉 내내 깔리는 내레이션은 선지자의 목소리인데, 이 모든 모험을 마치고 어른이 된 리키의 회고이다. 이 사실은 〈파워 디지몬〉이 끝날 즈음에야 밝혀진다. 약 3년 동안의 모험은 어린아이였던 그에게는 긴 시간이었지만, 되돌아본 시점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나의 첫 타투는 2018년, 왼쪽 팔 안쪽에 그린 고래다. 타투를 하고 싶어서 고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고래를 남기고 싶어 그 수단으로 타투를 결심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를 몸에 새기면 세상이 작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았다.





졸업 시즌이 왔을 즈음, 그런 나를 박 교수님이 불렀다. 나는 소설을 가르치시는 박 교수님께 따로 찾아가 내가 쓴 글을 읽어봐주십사 부탁했던 그 기수의 유일한 학생이었는데, 박 교수님은 그런 내가 언젠가 반드시 소설가가 될 거라 믿으신 모양이다.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박 교수님은 여느 때처럼 제일 먼저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답했다.

“건강히 잘 지내세요.”

엄마는 지체장애를 앓고 있을 뿐 건강한 상태였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써야지, 소설. 계속.”

하지만 교수님, 제게는 그럴 여력이 없어요.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안에 든 게 없어요. 텅 비어서 뭘 써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데요.

정말로 나는 그때 내 안의 모든 이야기가 다 사라졌다고 느꼈다. 다른 차원으로 넘나들 수 있던 문은 모조리 닫히고 망가져 폐허가 되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으니, 말이 답답했는지 기어코 눈물로 비집고 나왔다. 남들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화장실, 옥상, 복도 구석에서 울던 나여서 그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교수님은 평온하게 휴지 한 장을 뽑아주고는 이리 말했다.

“너는 지금 네 인생의 바닥을 치고 있구나. 실컷 쳐라. 지금 너는 네 안에 있는 이야기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바닥을 치는 시기인 거다. 그렇게 손바닥으로 자신의 바닥을 쳐봐야 다른 사람의 마음도 울릴 줄 아는 거야. 그 마음으로 소설을 써라.”





여행 중 가장 힘들었던 건 와이탄 찾기였다. 상하이 여행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인 와이탄은, 황푸강과 접해 있는 상하이의 중심지로, 근대 유럽식 건축물과 미래적인 건축물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특색 있는 장소이며 아편전쟁으로 강제 개항된 역사까지 있는 대표적인 관광지다. 하지만 내가 와이탄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세계 3대 야경’이라는 한 줄 때문이었다. 지구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야경이라니. 가야 할 이유가 마땅했다(나중에 찾아보니 통상적으로 말하는 세계 3대 야경은 프랑스 파리, 헝가리 부다페스트, 체코 프라하였지만 내가 찾아본 블로그에서는 파리와 부다페스트, 그리고 상하이라고 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백만 원으로 유럽에 갈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했는데 와이탄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신발은 피로 범벅된 데다가 먹은 것 없이 걷는 내내 울어 기력 없던 나는 어쩐지 이번 여행에서 와이탄 야경을 보지 못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길을 잘못 든 바람에 관광객 한 명 보이지 않는 상하이의 어느 교차로 앞 벤치에 앉아 모든 걸 포기하고 앉아 있는데, 불현듯 포기라는 단어가 지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쳐 온 곳에서 무언가를 또 포기하다니. 그렇다면 애초에 도망친 게 아니지 않나? 다시 생각해봤다. 여긴 상하이가 아니라 다중우주나 다른 차원, 디지털 세계라고. 그곳에서도 무언가를 보기 위해, 먹기 위해 달리고 걷다가 끝내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릴까? 그럴 리가 없다. 그곳에서의 의미는 하나였을 것이다. 그곳에 존재하기. 나로서 서 있기.

여긴 또 다른 세계다. 내 모험이 시작된 첫 번째 세계. 포기하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와이탄을 찾아갔다. 남들은 중심가에서 30분이면 간다는 곳에, 다섯 시간 넘도록 홀로 찾아 헤맨 끝에 도착했다. 해가 떨어져 어둑해진 하늘을 머리에 이고 바라본 와이탄의 계단은 그동안의 고생이 무색할 만큼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계단에 올라서서 북적이는 사람과 온갖 언어, 이상하게 생긴 건물과 야경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해냈다’. 그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해냈다! 내가 해냈다고! 그렇게 샌들에 뒤꿈치가 까진 발로 씩씩하게 걸으며 사람들 틈에서 소리 내 울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도 알지 못해서 속절없이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서 사진도 열심히 찍었지만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내가 감각한 그 어떤 것도 사진에 담기지 않았다. 그 순간과 야경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내 기억과 내 몸.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도망은 즐겁고 도피처는 짜릿하구나.





“언니, 나 에세이 써야 하는데, 디지몬으로 쓰려고.”
“디지몬? 대박. 그거 우리 엄청 좋아했잖아. 너 중학생 때도 보고 울었잖아.”
“응. 최근에 극장판도 개봉했거든. 알아? 〈라스트 에볼루션〉이라고.”
“모르는데.”
“거기서 성인이 된 태일이랑 매튜가 나오거든?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지몬이랑 같이 싸워. 그리고 마지막에 태일이는 아구몬이랑, 매튜는 파피몬이랑 같이 노을을 봐. 원래는 한 프레임에 같이 담겨야 하는데 이제 태일이랑 매튜가 커버려서 한 프레임에 담기질 않아. 아구몬이랑 파피몬이 그런 애들을 올려다보면서 물어봐. ‘내일은 어떻게 할 거야?’라고. 원래라면 신나게 모험을 이야기하고, 놀자고 대답해야 하는데 성인이 된 태일이랑 매튜는 바로 대답을 못 해. 그렇게 헤어져. 아이들이 어른이 돼서. 디지바이스가 부서지고, 나비가 날아가. 뒤늦게야 태일이랑 매튜가 입을 열지만 이미 디지몬들은 사라지고 없어. 작별 인사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져. 그 장면만 먼저 보고 극장판을 아직 못 봤거든? 근데 볼 용기가 안 나. 그 장면만 봐도 눈물 나. 너무 맞는 이별이잖아. 내 유년과는 작별 인사 없이 헤어지잖아. 떠나간 줄도 모르게. 언니, 나도 디지몬이랑 헤어지는 이야기 쓰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지만 내가 두고 온 세계가 있다는 생각, 더는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하염없이 가라앉는다. 하지만 내 마음의 음각은 반대쪽에서 볼 때 양각일 것이고 나는 그 활자를 목판 삼아 글을 쓴다. 내가 꿈꾸며 자라왔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소설로 쓴다.

하지만 위로가 되는 건 내가 그리워하는 세계는 보라색 나무가 자라고, 온갖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라는 점이다. 그곳에서 나는 어린 디지몬이 된 엄마를 산책시킨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현실은 얼마나 단조롭고 따분한가. 보라색 나무도 자라지 않는 세상에서 인간의 겉모습이, 다름과 차이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멀리 보면 지구의 모든 것이 그저 푸르러 보일 뿐이다. 나에게는 이제 함께 성장해야 할 디지몬이 있다. 다른 세상보다, 내가 발붙인 이 세상의 디지몬을 돌봐야 한다.

나는 나를 살게 했던 디지털 세계를 떠나보낸다. 그래도 언젠가 정말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주 옅은 희망은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두며.

암만의 퀸 알리야 대로.

호텔 로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일 주일 전과 다름이 없다.

빛과 어두움이 칼로 그은 듯 선명하게 나누인 거리. 지독하게 강렬한 햇살과 그 빛이 만들어내는 완전한 어두움의 대비. 자연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게 인간의 삶이고 영혼일진대 끝없이 이어지는 분쟁과 피를 보고야 마는 극단을 선택하는 이들의 삶은 이 가혹한 자연이 그들의 영혼에 새긴 성품의 그림자가 아닌가 싶다.

제 몸피보다 큰 양철통을 등에 멘, 마르고 슬픈 표정의 소년이 서 있는 위치도 그대로다. 소년의 등뒤로 시티뱅크의 간판이 보인다. 호텔을 들고 날 때마다 저 아이에게 주스를 사 마셨다. 그의 옆을 지나칠 때, 그 간절한 시선을 그냥 스쳐갈 수는 없었다. 지폐를 내밀면 소년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농약분무기처럼 생긴 양철통에 대고 몇 번이나 펌프질을 한다. 인공 오렌지 향과 싸구려 감미료의 쓴맛이 시원함보다 더 오래 남는 주스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버릴 수밖에 없다. 먹다만 컵을 돌려주면, 여윈 목을 꺾어 날 올려다보며 혹시 돈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근심하는 소년의 눈빛은 내 간사한 미각을 후회하게 만든다.

처음 보았을 때는 아릿한 슬픔을 주었던 이 가난한 풍경이, 지금은 평화를 상징하는, 움직이는 엠블럼처럼 보인다. 지옥을 헤매다 온 며칠 사이에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눈은 정직하고 마음은 간교한 것일까.

눈물을 머금은 듯 젖은 눈자위를 가진 청년이 커피를 가져다준다.

독하지만 적의는 없는 이 검은 액체. 지난 일주일 동안 어쩌면 나는 손에 잡히지 않는 평화보다는 정갈한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한 잔을 더 그리워했던 것 같다. 귀를 먹게 하는 굉음과 어둠을 가르던 섬광 속에서, 이래도, 이래도, 하는 심정으로 죽음의 어두운 망토자락 안으로 제 스스로 몸을 던질 때는 언제고, 어느 순간 바로 옆에서 폭탄이라도 터지면 허벅지의 근육이 파열될 만큼 삶 쪽을 향해 죽어라 달려나왔던, 지난밤의 내 생쑈의 기억도 이 액체의 빛깔 속으로 스며들어 까맣게 지워지고 만다.

트럭에 실려 밤을 도와 달려나온 거리는 벌써 어지러운 꿈속의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대체로 잘 잊는 편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안는 순간의 기억 외에 오래 가져가서 좋을 기억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죽은 자와 죽이는 자의 얼굴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정신적 긴장이 극한을 지나면 몸의 정체성도 흔들려버린다. 서울에 있을 땐 저녁식사 후의 커피 한 잔이면 꼬박 새벽까지 불면인데, 여기서는 독한 에스프레소를 두어 잔은 마셔야 그나마 신경의 날끝이 무뎌져 잠을 잘 수 있다.

뜨거운 에스프레소의 첫 맛은, 나누자면 어두운 관능의 맛이다. 탈진한 채로 마시는 에스프레소의 첫 모금은 삼키는 순간 눈을 감게 하고 동시에 수명을 떠올리게 한다. 기억도 제 속에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일까.

강 국장은 탐색견 같은 예리함으로 필름의 버릴 부분을 지적한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화면 정도는 이제 신선도가 떨어진다. 인쇄매체로, 다큐로, 뉴스 화면으로 너무 남발되어 식상한 자료일 뿐이다. 글쎄, 아이를 잃고 하룻밤 사이 모근에서 삼 센티미터 정도가 완전히 백발이 되어버린, 서너 겹의 쌍꺼풀이 겹쳐진 할머니가 사실은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여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보는 사람들은 조금쯤 흥미를 느끼게 될까.

"저 여자 몇 살로 보여요?"

"예순?"

"서른아홉이래요."

"화면 밑에 이름하고 나이 넣지."

저 여자가 내가 필름에 담았던 그 여자인가. 찍을 때 놓친 표정을 지금에야 읽는다. 늦여름에 찍은 사진이 대개 그렇듯 화면은 전체적으로 노출과다의 느낌이다. 사물과 사람이 스스로 빛을 내듯 미약한 흰빛의 무리에 둘러싸여 허공에 살짝 떠 있는 듯 보인다. 자신들의 부서진 집 앞에 서 있지만 아무도 통곡하거나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다. 하룻밤 새 이십 년을 늙어버린, 자식 잃은 여자마저도 이상한 생기를 뿜고 있다.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는 가볍게 떠올랐다. 지도책에 실린 조감도같은 도시풍경이 멀어지자 창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봄바다였다. 바다도 꽃처럼 제 얼굴로 계절을 드러낸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봄물오른 바다를 보자, 두려움이 지나치게 부풀린 구명조끼처럼 내 가슴을 죄어왔다. 생존의 본능은 균류처럼 내 피부에, 뇌의 주름 사이에, 내장 속에 번식하여 끊임없이 스멀거리고 증식했다.

돌아와 다시 저 바다를 볼 수 있을까. 봄꽃같이 생글거리는, 보글보글 비등점에 이른 듯 들떠 있는 저 바다를.

축하하네.

축하 받을 일이 없는 거 같은데요?

현산 예술상 다큐 부문 대상이야.

제가요?

받을 만하지. 공식발표 때까진 대외비로 하고.

전화를 끊자 태수가 주먹을 부르쥐고 외친다.

"나이스! 형, 수상소감에 나 꼭 넣어줘야 돼. 카메라를 들고 같이 사선을 넘나들며 밤낮으로 달렸던 이태수가 없었다면 오늘의 영광은......."

"아예 녹음해와라. 나도 립씽크 한번 해보자."

사는 게 코미디다. 나를 내던지는 심정으로, 이래도 이래도, 하며 매달렸던 일로 상까지 받아야 하나.

"이 상 받아야 하니? 거대한 군화에 짓밟힌 개미 같은 그 사람들을 구경거리로 만들고서?"

"형, 노벨상 정도면 거부해도 폼 나는데 이런 거 거절하면 좁은 바닥에서 매장당할 일밖에 없어."

현수는 차 안에서 통화를 하고 있다 내가 문을 열자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하며 전화를 끊는다. 내가 집을 나오고서 나흘이 지난 후에야 전화를 하는 남자. 싹싹 빌어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죽어도 먼저 전화하지 않을 거야, 그 모든 결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다만 그의 목소리만이라도 듣기를 갈망하는, 그외의 어떤 것도 내겐 무의미해져버리는 그 시간의 극점을 이 남자는 알고 있다.

사람들은 관계를 망가뜨리는 건 거짓말이나 불성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를 끊어놓는 것은, 물 위로 떠오른 익사체처럼 대개 감추어져야 할 사실이다. 대부분의 진실은 불결하고 때로 사악하다. 일상이 도덕교과서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같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바보들은, 그 고집 때문에 잃지 않아도 될 많은 것들을 잃게 된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빈손을 내려다보면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 사람이 더 소중했다고.

"그분이 어떤 색을 좋아하시는데요?"

펼쳐놓은 포장지를 쉽게 고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선물코너 아가씨가 상냥하게 물어본다.

"잘, 모르겠어요."

"몇 살이신데요?"

"서른둘이요."

"그렇다면 이게 어떨까요?"

자잘한 별무늬가 그려진 티파니블루의 종이와 조금 더 짙은 물빛의 시폰 레이스리본을 겹쳐 보이며 권하는 아가씨를 보며 나는 살짝 웃고 만다. 나이하고 포장지 취향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스무 살 언저리로 보이는 이 아가씨에게 서른이 넘은 나이란 포장지 색깔에서도 푸른빛 청춘의 느낌이 토핑되어야 할 시기로 생각되는 건지. 내 뒤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여자가 둘이나 서 있다.

"그걸로 해주세요."

케이스에 맞추어 종이를 자르고 모서리를 따라 접어넣고 양면테이프를 잘라 마무리를 하는 아가씨의 손놀림이 춤추는 듯하다. 이인무二人舞처럼, 두 개의 손은 만났다 멀어지고 겹쳐졌다가는 우아하게 엇갈린다. 빠르고 섬세하게 움직이다 한순간 멈추는 분홍빛 청결한 손톱의 사랑스러움이라니. 왜 인간은 제 몸의 작은 부분으로도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버리는지 몰라. 저 천진난만한 움직임은, 한 번도 가진 걸 모두 빼앗겨본 적이 없는 자의 손가락, 결혼을 열흘 앞두고 약혼자를 잃어보지 않은 자의 손가락, 늦은 밤 오래전 죽어버린 연인의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는 자의 손가락, 욕망이 아니라 외로움 때문에 제 음모를 어루만져본 적이 없는 자의 손가락이라는 걸 포스터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저 손목을 잘라 둥근 유리지붕을 씌운 뮤직박스에 넣어두고 싶다. 태엽을 돌리면 투명한 분홍손톱이 노래의 선율을 따라 춤을 출 텐데. 손목 아래로 순결한 피를 한 방울씩 한 방울씩 흘리며. 거대한 톱니바퀴 틈에서 쥐여짜이듯 견딜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마다, 태엽을 팽팽히 감고 색정적인 마림바 선율에 따라 춤추는 저 손가락을 본다면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날 알았다. 내 속에 상처가 생긴 건 삼 년 전 그가 시한부 생명이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가 아니라, 그것이 알고 싶다, 를 보던 그 저녁이었다는 걸. 사람이 주는 상처란 바를 정자를 써가며 새겨두지 않아야 생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적의나 상처란, 자신이 적의를 품은 상대방이나 상처를 준 그 인간보다는 자기 자신을 헤집어놓고 파먹어 들어갈 뿐이란 것을.

나야, 커피 마시러 가도 돼?

여기, 병원이에요.

그래? 조용하네?

그럴 시간이잖아요.

귀찮은 환자들에게 수면제를 주사했군. 그렇지? 다음엔 케타민 앰플을 하나씩 주사해줘.

케타민?

악몽을 꾸게 하는 약물이지. 끈끈하고 진저리 나는 악몽과 불쾌한 환각에 시달리게 하는 마취제야. 그 주사를 맞고 잠들었다 깨어나면 누워 있는 병실이 얼마나 평온하며 따스한 곳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야. 불친절하네 어쩌네 불평 따윈 안 할 거라구.

재이가 그에게서 처음 본 건 외로움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르고 영화 보러 가실래요? 물었을 때 아니라고 끝내 거절하지 못했던 건 그의 웃음 띤 눈빛 뒤의 외로움이었다. 이후로 그에게서 많은 다른 것들을 보게 되었지만 그를 생각할 때면 처음 보았던 순간의 외로움이 맨 먼저 떠올랐다. 다만 그 커피찌꺼기 빛깔의 외로움 앞에 이토록 현란한 지적 허영심과, 포즈로서의 살밍 베일처럼 드리워져 있으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커피를 마시던 그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인다.

"왜? 왜 그래요?"

고통을 참는 그의 표정은 낯설다. 가늘고 길게 숨을 내쉬고는 그가 물었다.

"여기가 아픈 건 왜지?"

손바닥으로 가슴을 짚고 있다.

"어떻게 아파요?"

"조이는 것 같기도 하고 뻐근하기도 하고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해."

"언제부터?"

"두어 달 전에도 한 번 그랬었는데."

"검진 한번 받아봐요. 심장 때문일 수도 있고 위산이 식도 쪽으로 역류했을 때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니까."

"그래? 어떤 게 더 치명적이지?"

"물론 심장이지."

"그럼 그걸로 할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듯 그는 갑자기 크게 웃어댄다. 이마에 엷게 땀이 밴 채로.

내게 어울리는 가면은 어떤 것일까. 가면을 하나씩 클릭해본다. 온통 검은, 뚫린 눈 부분이 오히려 희게 보이는 우울한 표정의 가면. 아니면.

아내는 내가 있는 동안 그래도 잘해주려 애를 썼다. 그런 아내가 연극배우처럼 느껴졌다.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틈을 내서 지방공연을 내려온 여배우 같은. 오래전에 식탁에 앉아 내뱉었던 자신의 말들, 나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없다던 말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표정. 일주일의 끝 날엔 무대막이 천천히 내려올 듯했던 하루하루. 오죽했으면 배 위에서 아내가 허리를 움직이고 있을 때 한 군데도 닮지 않은 샤론 스톤을 떠올려야 했을까. 사정하기 전에 나도 모르게 쓰다듬었던 아내의 등은 오전 열 시 신문을 읽고 있을 때처럼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금박이 화려한 이 가면은 아내에게도 어울릴 것이다. 하긴 썩은 물이 출렁거리는 베니스의 뒷골목, 어두운 건물 계단에 앉아 이 가면을 씌우고 두 번 휘어진 황금손톱을 달아준다면, 아내와 재이가 다를 게 무엇인가.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면은 설탕보다, 화장지보다, 혹은 와인빛 루주보다 더 필수적인 것일 텐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른 장미 다발이 보인다. 인생의 알싸한 향기도 어둠과 고통 속에서 축적되는 것일진대 향기로 응축되기엔 너무 독한 어떤 것이 그의 생에 있었을까.

현관등이 어느 순간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서 있자 뭔가 가슴 밑바닥에서 희미하게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잘 몰랐었는데, 그가 있음으로 해서 생의 순간이 풍요로웠던 적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관등이 꺼지고 안방등이 켜지기 전, 어둠 속에서 그의 마음도 이렇게 조금 추웠을까.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는 긴 이야기 끝에 목숨을 건졌는데 그의 적은 술탄보다 더 냉혹한 것이었는지. 그가 했던 무수한 말들을 허탄한 웃음 끝에 잊어버리곤 했지만 그가 없는 지금, 그것들이 꼭 거짓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긴 알바니아에서 가져와야만 발칸의 장미일까. 짙은 안개가 낀 날이면 안개에 몸을 가리고 눈물도 감추고 노래하며 춤을 추다 저격병의 총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 웃고 있는 등 뒤로 누군가 총을 겨누고 있는 것, 소멸의 시점을 알 수 없는 것, 먼지와 안개와 진흙과 결핍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그건 그곳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이는 마른 장미 다발을 못에서 내려 쓰레기통에 넣었다. 여름의 끝이라 해도 날씨는 더웠다. 미약한 부패의 냄새가 번지고 있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이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간다. 자고 가도 돼? 그날밤이었을 것이다. 저격용 베레타를 들고 있지 않은 제 손을 재이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쓰러지기 전까지 무수하게 박혔던 보이지 않는 총탄 중 하나가 이 손에서 날아간 건 아니었을까.

지방은 위험하다. 그러니까 돈을 많이 주겠지. 짐은 생각했다. 서울을 떠나는 순간 벌집이 될지도 모른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가 차량을 탈취당하고 무릎이 꿇린 채 뒤통수에 총알이 박힐지도 모르고 도로에 설치된 지뢰나 크레모아에 의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 볼일이 급해 국도에 차를 세우고 벌판으로 달려가다 저격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겠지. 아픈지도 모르고 슬픈지도 모르고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의 유일한 장점은 남들은 알지만 자신은 모른다는 거다. 그것도 영원히.

어떻게 할래요?

가죠. 짐이 대답했다. 위험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건 행운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갖지도 못한다. 





무하마드 깐수는 미니밴에 실리는 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동식 침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어딘가를 바라봤다. 무하마드의 눈은 분노가 응축된 덤덤탄 같았다. 짐은 무하마드와 눈이 마주쳤고 움찔했지만 곧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짐이 아니라 짐의 뒤를 보는 것처럼 보였다. 짐은 무하마드의 눈빛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벌판밖에 없었다. 그 뒤가 아니라 다른 뒤야. 이를테면 태양의 어두운 면, 화성의 숨겨진 분화구, 시간의 뒤, 미래, 과거, 고대의 기억, 역사 같은 것들. 





짐은 약 때문이겠지 생각했다. 평소라면 졸고 있을 시간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평양은 미래에서 과거로 워프하는 도시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과거에 만들어진 미래의 도시. 그러나 미래는 오지 않았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지. 짐은 생각했다. 사람들이 총을 들기 전에 평양은 관광지로 유명했고 노인들은 그때 일을 회상하곤 했다. 지구 최후의 공산국가. 음산한 아파트와 거대한 규모의 기념비적인 건물들. 건물 안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넘쳤고 불법 점거자와 관광객, 예술가와 거지, 난민, 조사원, 인권 운동가, 범죄자, 국회의원, 밀수업자, 브로커가 도시를 드나들었다. 정부는 평양을 보존할 것인가 새롭게 꾸밀 것인가 논의했고 논의가 끝나기 전에 일이 벌어졌다. 먼지가 대륙을 덮었고 도시는 어둠과 빛 사이에 버려졌다. 그곳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시간의 줄이 끊긴 역사학자가 되어 먼지로 가득한 도시의 옥상에 조명등을 설치했고 쉴 곳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짐의 어머니는 테러에 대한 뉴스를 봤다고 했다. 지방의 건물들이 무너지고 있다. 그녀가 말했고 뉴스에선 누군가의 핸드폰에 담긴 먼지와 비명소리, 굉음을 내보냈다. 가짜 아니야? 짐이 말했다. 진짜다. 어머니가 말했다. 건물들은 스스로 무너지는 거예요. 안드레아는 말했었다.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들이 자연사하는 소리라고 했다. 짐은 어머니에게 건물의 자연사에 대해서, 지방의 도로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어디 가니? 그녀가 물었다. 짐은 늦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언제 올 거냐고 물었지만 짐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 아니면 모레, 아니면 더 오래 걸릴지도. 짐은 어머니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리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그는 딱딱하고 불친절한 관료의 전형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합리적이라고 말하지. 그녀의 아버지는 친절을 혐오했다. 민원인을 경멸했으며 사리에 맞지 않는다 생각되는 일은 언급을 금했다. 그러면서 여자관계는 복잡했고 법은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법은 도구였다. 법치는 통제와 안정을 위한 핑계일 뿐이다. 그러나 아주 그럴싸한 핑계였고 합리화였다. 그는 세 명의 자식 중 보리에게 가장 무관심했지만 그녀가 서울대에 입학하고 이주국 직원이 되자 태도가 바뀌었다. 보리가 자신의 후계자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법집행자. 난민과 테러리스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소녀. 일종의 잔 다르크. 상황이 여기까지 갔을 때 보리는 자신이 이 남자를 싫어하는 건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인 건 아무 상관 없어. 나는 그냥 이 새끼가 싫은 거야. 그의 생각, 태도, 행동, 말투와 눈썹 모양. 눈썹이 특히 마음에 안 들어. 보리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뭐 어쨌다고. 자기 아버지가 알고 보니 파시스트였다면 트라우마를 앓아야 하나. 보리는 콤플렉스나 정신분석에 관심 없었다. 이 남자는 그냥 적일 뿐이다.





난간을 따라 두 층을 내려간 후 쭉 뻗어 있는 복도를 걸어가자 전면부에 거대한 유리 파사드를 면한 홀에 이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먼지에 투과된 어둑하고 어슴푸레한 평양의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거나 대화를 했고 배드민턴을 치거나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홀은 난파된 갑판 위에 잠시 마련된 파티장처럼 보였고 유리 파사드로 인해 과열된 내부의 온도는 대기권을 통과하는 우주선을 연상시켰다. 여기 서울 사람은 나밖에 없겠군. 짐이 생각했다. 





스무 층 정도 내려간 후 안드레아가 말했다. 그는 업고 있던 무하마드를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보리도 들고 있던 휠체어를 벽에 세우고 계단에 앉았다. 무하마드는 눕듯이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색 형광등에 비친 그의 얼굴은 전분을 뿌려 바싹 말린 파라오처럼 보였다. 





노 모어 건스 운동을 한 지 십 년이 흘렀다. 큰 변화가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르는 사이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보리는 생각했다. 지금보다 나빠지진 않겠지, 라는 기대. 이게 엄청난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야. 나빠지지 않는 게 가장 힘든 일이야. 보리는 생각했다. 나빠지지 않으려면 미친듯이 좋아져야 해. 그러면 겨우 나빠지지 않을 수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팜이 물었다. 보리는 노트북을 닫고 팜을 봤다. 팜은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게 그녀의 인생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외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았다. 국적과 신분을 발견했다. 아름다움은 그 아래로 수렴되었다. 





짐은 지하 도로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최대한 속력을 냈다. 밤이었고 평양 시내의 고층 빌딩은 야한 느낌의 네온 불빛으로 가득찼다. 강판처럼 생긴 고층 아파트의 윤곽은 계통을 알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감색 밤하늘을 등에 진 스카이라인은 습기와 먼지가 뒤섞인 바람에 흩날렸다.

우라질 공산주의. 세르게이가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나는 평양 시내가 너무 좋아. 보리는 세르게이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도 바람이 필요했다. 바람은 먼지와 죽음을 실어날랐고 그 안에는 소량의 활력과 생명도 있었다. 바람이 맨살에 닿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살아 있다는 자각이 함께 찾아왔다. 그건 이상한 청량감이었다. 





보드카는 독일에서 수입해 오는 것으로 병에 커다란 눈을 가진 꼬마 괴물이 그려져 있었다.

파이클링Feigling. 겁쟁이란 뜻이에요. 마르셀이 검지로 병을 짚으며 말했다.

세르게이는 0.1리터짜리 작은 병에 든 다양한 맛의 보드카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만세. 술이다. 그는 무화과맛을 보리에게 건넸다. 보리는 뚜껑을 열어 보드카를 입에 털어넣었다.

무화과맛이야?

무화과를 먹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어. 보리가 말했다.

세르게이는 아메리칸 아이스티맛 보드카를 마셨다. 보드카 맛이 아이스티맛이라니,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이야?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에요. 마르셀이 말했다. 어때요?

우라질 고향의 맛이야. 세르게이는 한창 잘나갈 때 온갖 종류의 보드카를 다 마셨다고 말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미국, 폴란드, 심지어 일본에서도 보드카를 생산했었지. 가라앉기 전에 만든 건지 가라앉은 후에 떠오른 건지 모르겠지만 일본 보드카에는 후지산이 그려져 있었고 친구들은 욱일승천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건배를 했어. 나는 뭐든 오리지널을 좋아하고 무슨 무슨 맛이 들어간 보드카 같은 건 취급 안 했는데 알료샤가 그러더군. 빌어먹을, 순수한 맛 같은 건 없다고.

세르게이는 하나씩 뚜껑을 열어 맛을 보더니 짐과 팜에게 버블껌과 애플파이 맛을 건넸다. 이거면 충분할 거야. 





짐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중학생은 팜에게 들었다고 했다. 짐은 소설을 써. 짐은 굉장한 작가거든.

근데 전 소설이 뭔지 몰라요.

짐은 해변과 바다의 어두운 경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파도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렸다. 뭐부터 말해야 하나. 우선 나는 소설을 쓰지 않고 굉장한 작가도 아니야…… 소설은……

짐과 중학생은 마트에서 조금 떨어진 낮은 층의 계단에 앉아 있었고 계단 아래로 해변이 펼쳐졌다. 해변은 자본주의적이고 상업적인 조명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었다. 짐은 모래 위에 발을 올려보았는데 신발 밑창 아래 고운 입자가 느껴져 깜짝 놀랐다. 발이 빠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백사장이란 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