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난봄 오랜만에 일산에 갔을 때 나는 그곳이 내가 살았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도시는 어느 정도의 성장을 이룬 뒤에는 그 추동에 무심해진 사람들처럼 정체와 안정 사이에 멈춘 듯 보였다. 그렇지 않아? 라고 동의를 구하자 앞자리의 남편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 칭다오와 닮았다, 라며 남편은 우리가 지난해까지 살았던 중국의 도시를 떠올렸다. 칭다오는 일산을 닮은 것이 아니야. 칭다오는 그냥 한국의 신도시들을 닮았을 뿐이지. 그게 다른가? 하고 커브를 돌며 남편이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8p,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中)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십대 시절을 보낸 아이들을 좀 감성적으로 표현한다면 '장래하지 않을 장래희망의 변천사를 지켜본 사이'쯤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활기록부의 장래희망 칸이 자주 바뀔수록 입시에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쉼 없이 희망을 갱신하면서, 나중에는 그것이 자의 반 타의 반 제멋대로 굴러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꿈이 꿈으로 대체되는, 하나의 꿈이 여러번 종신형을 받아 각자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물론 장의사는 그 점에서 예외적이었다. '의사'라는 장래희망이 한번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9p,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中)
뒷면은 고깃집 광고였다. "순수 100퍼센트 한우! 아닐 시 100배 변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벌건 고기의 원색적인 프린팅과 변상!이라고 강조된 굵은 글씨, 그리고 순수라는 낭만적인 단어가 뒤엉키면서 뭔가 먹고사는 일을 구차하게 끝 간 데 없이 다운그레이드시키는 느낌이었다. (11p,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中)
중국집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원탁 한 곳에만 두툼한 메뉴칩이 올라가 있고 젓가락과 숟가락이 각 자리에 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예약 손님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손님들은 아직 오지 않았고 거기에는 손님이 올 것임을 암시하는 젓가락과 숟가락만 놓여 있었다. 올 거라는 약속, 채워지리라는 표지, 추후를 예비하는 노력 같은 것. (71p, 크리스마스에는 中)
어차피 국장도 그만하면 됐다고 했으니 내 알 바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맞히기는 했으니까. 그런데 이 상황에서라면 정말이지 시간이 문제이지 않은가. 누군가가 기적을 행하는데 그 기적이 아주 참기름 쥐어짜듯이 쥐어짜서 행한 거라면 어쩔 것인가. 그러니까 모세가 바다를 가르는데 영화에서처럼 단번에 엄청난 포말이 일며 순식간에 갈라지지 않고 천년만년 대대손손 기술을 쌓고 공사를 벌여 길을 내었다면 그건 기적이 아니잖나, 그건 하나도 신기하지 않고 능력도 아닌 게 되지 않느냔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재형과 나는 와인에서 위스키로 주종을 바꿔 취해갔다. (82p, 크리스마스에는 中)
국장과는 맛집 알파고를 계속 촬영할지 말지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국장은 버리기 아까운 카드라는 거였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기 위해 또다시 그 모세의 기적이라는 비유를 써봤지만 국장은 "야, 그게 기적이지 왜 아니야? 그런 기술의 축적은 기적 아니냐?" 하는 반응을 보였다. 고도성장기 출신다운 궤변이었다. 하지만 국장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는데, 맛집 알파고, 곧 현우가 계폭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정작 국장은 그 단어의 뜻조차 알지 못해서 계폭은 계정폭파를 가리킨다고, 스스로 계정을 없애고 게시되었던 모든 글과 자료를 없애는 SNS상의 존엄사라고 설명해주어야 했다. 트위터에는 대체 맛집 알파고가 왜 사라졌는가에 대한 억측들이 나돌았다. (89p, 크리스마스에는 中)
한 로맨스 영화가 흥행하면서 그 당시 한국에서는 타임캡슐이 유행했다. 너도나도 무슨 행사만 있으면 땅을 파고 캡슐을 묻곤 했다. 지금 보면 그런 타임캡슐들이 과연 예정된 기한에 다 개봉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당대인들이 아득한 미래에 퐁당퐁당 던지는 물수제비 격인 그것들은 과연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연속의 파문을 그려줄 것인가. 묻은 사람에게 있었던 당위와 낭만이 꺼낼 사람에게도 유지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도쿄에 와 있었다. 약속과 달리 너무 일찍 온 미래인이기는 했지만. (107p, 마지막 이기성 中)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 중인지?"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나는 여기다 배추를 심는 편이 너가 그렇게 멍청이처럼 서 있는 것보다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
배추를 심다니, 세상이 망하기 전에 심겠다는 사과나무도 아니고 배추를. 그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사과나무야 기독교권에서 아담과 이브가 탐하는 바람에 인간이 오욕칠정을 다 겪으며 무참한 현실을 살게 되었다는 인류학적 맥락이라도 있지, 배추는, 대체 배추가 뭐란 말인가. (119p, 마지막 이기성 中)
"이해해."
"이해하지?"
"그래, 출장이라는 게 그렇잖아. 그리고 열었다가는 너는 정말 코가 썩어들어갔을 거야."
"왜?"
"내가 거기다가 편의점 달걀을 넣었거든."
"뭐?"
대체 누가 그런 음식물을 타임캡슐에 넣는단 말인가. 그는 유키코의 괴팍함을 다시 확인한 게 반갑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크게 웃었다.
"대체 그걸 뭣 하러 넣었어?"
"미래인들이 오감으로 느끼게 해주려고."
"뭘?"
"과거가 만만치 않았다는 걸."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타입캡슐을 열어볼 필요는 더욱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기에 유키코와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넣었는데, 그렇다면 몇년간 달걀이 상하면서 캡슐 안의 것을 최대한, 아주 활발히 오염시켰을 것이다. 땅속 온도와 밀폐 상황 그리고 달걀의 풍부한 단백질과 철분, 황.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대학으로 찾아갔다. 유키코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그것의 처분을 자기라도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127p, 마지막 이기성 中)
그는 어디든 손 닿는 곳에 동전을 둔 채, 깜빡 잊고 출근길에 나섰다가도 돌아와 꺼내 가곤 했다.
그것을 손안에 넣고 굴리면 아직은 모호하지만 결국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알아내야 할 삶의 마지막 진실을 만져보는 기분이었다. 그의 미래와 소소한 혁명과, 동산과 부동산으로 이루어진 그의 생활과 살아 있는 한 마지막까지 그를 불안하게 충동할 생의 추구 같은 것과 연관 있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희부윰한 피로와 절망, 불안의 청춘히 미래를 상상하며 지금으로 던진 것이기에. 동전을 만지고 나면 손가락에는 특정할 수 없이 복합적인 금속 냄새가 남았다. 어떨 때는 여름의 비 내음 같기도 하고 때로는 흙 냄새나 막 깨뜨린 달걀의 비린내 같기도 한, 하지만 그가 그 냄새를 정확히 알고 싶어 가까이 더 오래 가져다대면 희미하게 옅어지다 종국에는 사라지고 없었다. (131p, 마지막 이기성 中)
"그래, 넌 어디서 왔니?" 기오성이 그렇게 말하며 물수제비를 떴고 조약돌은 얼마 가지 않아 잠겨버렸다.
"페퍼로니에서 왔어."
강선이 피자 박스를 구겨 접으며 말했다. 그러자 우리는 웃었는데, 강선이 웃을 일이 아니라 자기는 한국에 돌아와 애들이 자꾸 그렇게 물어서 그런 대답을 했다고 말했다. 페퍼로니피자는 강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151p,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中)
점령군. 단체 사람들이 자주 가던 식당의 이라키는 파병 결정을 듣고 그렇게 말했다. 너희가 점령군으로 온다면 우리는 너희를 쏠지도 몰라. 그렇게 겨우 이틀 머문 바그다드의 2004년 7월을 기오성은 길게 복기하지 않고 한 꼬마 도둑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테이블 위에 놓았던 담배를 한 꼬마가 훔쳐 쥐고 달아난 것이었다. 기오성은 꼬마를 따라갔는데, 그건 담배가 아깝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도둑질로라도 이라크에서의 자신을 일별해준 누군가를 애타게 쫒아가본 것에 불과했다. 그런 열의 없는 기오성의 추적을 눈치챘는지 꼬마가 담장 너머로 홀짝 넘어간 뒤 더는 달아나지 않고 대치하면서, 기오성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여러 압력들이 생각난 그는 당황했고, 꼬마가 재차 묻고 나서야 페퍼로니에서 왔어, 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페퍼로니가 뭐였는데요? 함께 출연한 게스트가 묻자 그는 글쎄요, 하더니 잠시 말을 끌었다. 그러고는 결국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라고 했다. (161p,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中)
세팅을 하는지 밖은 부산했지만 그 소리는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았고 미리 쓰고 있던 헤드셋에서 쎄ㅡ 하는 대기음만 들려왔다. 기오성은 메모한 종이들을 들춰보며 침묵을 지켰고, 나는 이 고립과 소음만은 그래도 어느 시절을 환기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고택 주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만들어내던 상시적인 소음들이었다. 준비되어 있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탄생하던 그 많은 발생들. (164p,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中)
혼자 즉석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려다보면 인부1에게 나빠요,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인부1에게는 건강을 해치는 나쁜 식습관에 대한 정보가 목록화되어 있었고 늘 암을 거론했다. 진실로 암이란 불행의 먹이사슬 가운데 최상위 포식자였고 자비 없는 침략자였다. 암은 내가 그냥 간편하게 데워 먹으려고 집어든 즉석식품의 알루미늄 포장지에서 시작해 냉동 떡갈비를 이루는 붉은고기의 단백질 입자와 각종 유지, 숱한 식품첨가제와 전자레인지를 돌릴 때 일어나는 파동마저 포자로 삼아 세포를 증식시키고 최종적으로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의 죽음이에요, 라고 인부1은 결론 내렸다.
"그러니 예술하는 우리 자신을 좀더 사랑합시다, 예?" (227p, 깊이와 기울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