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Short-term

질문하는 세계, 이소임

密屠 2024. 4. 13. 08:48

 

 

 

 

 

 

나는 재판연구원으로 법조 경력을 시작했다. 덕분에 어느 정도 나를 드러내지 않는 훈련이 되어 있다. 법원에는 평생 튀지 않는 훈련을 해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메일은 언제나 '존경하는'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상대방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는지는 의문이지만 말투 하나, 행동 하나에 존중을 담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겸손한 사람이 많지 않지만 조직은 겸손을 학습시킨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지만 사회생활에서 외향과 형식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특히 직역 전체가 보수적이어서 모난 돌은 정으로 가차 없이 내리치는 법조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을 할 때 나는 늘 검은색 정장 차림이다. 허리 건강 차원에서 배낭을 메지만 재판에 갈 때는 각이 잘 잡힌 서류 가방을 사용한다. 봄을 맞아 밝은색 옷을 사볼 결심으로 백화점에 갔다. 분홍색 정장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은 회색 정장을 산다. '미묘하게 분홍이 섞인 회색인걸.' 새 옷을 입으며 튀어 보이지 않나 걱정한다. 나의 옷차림은 저승사자와 스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평범함을 받아들이면 자유를 얻는다. 일상을 위해 애쓰는 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사는지 돌아보게 된다. 특별한 사람들은 별처럼 총총히 빛난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만 가득한 듯하다. 하지만 빛나는 별 뒤에서 밤하늘을 채우고 있는 것은 넓고도 깊은 어둠이다. 밤하늘의 본질은 별이 아니라 평범하면서 광활한 어둠일지 모른다.





길치 운전자에게 내비게이션은 필수다. 안타깝게도 내 차의 매립형 구형 내비게이션은 조금 멍청했다. 그래도 성격은 좋았다. 뭐랄까, 긍정적이었다. 예상 도착 시간에 관해서 특히 낙관적이었다. 사고나 교통 체증 같은 부정적인 요소는 깡그리 무시했다. 출발할 때는 15분 후 도착을 예견했지만 한 시간 동안 올림픽대로에 잡혀 있어야 했다. 지리 정보 체계GIS가 업데이트되지 않아 새로 뚫린 도로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데 내비게이션 액정 속 자동차 아바타는 두더지처럼 산을 뚫고 있거나 이적을 일으켜 물 위를 달렸다. 한번은 야간 운전 중에 길을 잃었다. 산 속이라 전파 방해로 스마트폰도 먹통이라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처럼 우주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멍청한 녀석!

최근 안드로이드 오토를 사용하면서 카카오 내비게이션 앱을 쓰기 시작했다. 최신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덜떨어진 구형 내비게이션처럼 길을 잃는 법이 없었다. 사고 난 길을 피하게 해주고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는 주기도 알려주었다. 22초, 21초...... 무엇보다 놀라운 기능은 예상 도착 시간이었다. 어찌나 정확한지 신비로울 정도다. 내비게이션의 예상 도착 시간에 딱 맞추어서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마치 돌판에 새겨진 예언이 실현된 것만 같았다. '이제 기계가 미래를 보는구나. 비바! 딥러닝!' 마침내 내비게이션이 길치를 완전히 구원하는 시대가 열렸도다. 세상이 만만하다. 내비게이션과 함께라면 지구 횡단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길치여, 나의 손을 잡아라. 그대는 영원히 길을 잃지 않으리!

하지만 비밀을 고백하자면 나는 길을 잃기 좋아한다. 길치는 방위가 아니라 풍경을 본다. 동쪽으로 10미터가 아니라 '오, 여기 참 예쁜 튤립이 피었네' 따위나 생각하면서 길을 찾겠다고 싸돌아 다닌다. 길을 잃을 때마다 얻는 소소한 기쁨이 있다. 맛있는 핸드드립 카페를 찾아내고, 파란색의 예쁜 대문과 담벼락의 능소화 덩굴을 보며 감탄한다. 목적 없이 멍 때리며 햇빛을 쬐고 길가의 고양이에게 인사한다. 길치로 태어난 인간은 그렇다.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데도 길을 잃는다. 구원을 거부하고 슬그머니 내비게이션을 끈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쑤셔 박고 딴 길로 샌다.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필라테스 선생님의 평에 따르면 나의 오른쪽 골반은 앞으로 틀어져 있다. 골반이 틀어져서 척추와 어깨까지 몸 전체가 틀어지게 된다. 이 모든 불균형의 원흉은 내가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이다. 오른손을 쓰다 보니 상대적으로 오른쪽이 발달하게 되고 골반이 오른쪽 앞으로 틀어졌다. 결과적으로 오른쪽 다리는 왼쪽에 비해 위로 들리지 않고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우두둑 소리가 났다. 얼마 전에 필라테스 선생님께 이런 해결책을 제시해보았다.

"선생님, 그러면 평소에 왼쪽 다리를 위로 꼬고 있으면 균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회원님들도 전부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다시 몸이 반대로 틀어질 거예요. 다리를 안 꼬려고 노력하셔야지요......"

역시 내가 떠올린 기가 막히는 아이디어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그리고 매우 높은 확률로 쓸모없는 아이디어다). 선생님의 한심해하는 표정을 보고 우리 몸을 너무 헤겔처럼 생각했나 반성했다. '필라테스는 정반합이 안 통하네.' 우리 몸의 균형을 찾는 일도 간단치 않다.





대학교 때 가끔 혼자서 수족관에 갔다. 모래 위에서 박하맛 사탕 지팡이처럼 몸을 세우고 있는 가든일이나 물의 모양을 구연하는 듯 유영하는 보름달물해파리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상상하지 못한 형체의 생물이 이미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다양함이 실재해서 다행이었다. 비록 그 다양함은 동물권에 반하는 장소에 있었지만.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연쇄 살인범 김병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다." 교과서나 미디어는 범죄를 시처럼 다루지만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했다'라는 문장 속에는 너저분한 함의가 있다. 그 한 줄의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수많은 장애를 넘어야 한다. 양심, 처벌에 대한 두려움, 준비 부족, 그날의 기분, 피해자의 저항, 외부 환경, 살해 행위 자체의 번다함 등을 모두 극복하고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살인자는 죽음에 이르는 피해자의 고통을 목도하고 견디어야 한다. 법정에 선 피고인들은 그 모든 처절함과 지난함을 감수하고 연인을 칼로 찔러 죽이고, 가난한 친구에게 돈을 뜯고,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려눕혔다.





이제는 성공의 의미가 달라졌다고 한다. 성공한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들은 모두 보여주기에 능한 사람들이다. 마케팅이 전부인 시대가 온 것만 같다. 아무도 방구석 전문가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은 보여주기 너머에 있다. 보여주기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변호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쌓고 훈련해야 한다. 언젠가는 포장을 풀어 까눌레의 맛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온다. 게을러질 때마다 장인 같던 사장님과 타고 설익고 눅눅했던 까눌레의 맛을 떠올린다. 적어도 엉터리로 만든 까눌레를 공들여서 포장하지는 말아야지 다짐한다.





사법 시스템은 사회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 피해자가 만족할 때까지 죗값을 물을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 죗값을 치른 죄인은 다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변호사로서 보는 나의 시각은 그렇다. 하지만 내가 피해자라면, 나의 가족이 피해자라면 관대하게 죄인을 용서할 수 있을까? 시스템은 철컹대며 돌아가고, 우리 중 그 누구도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시민도 모두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에게도 해피 엔딩은 없다. 주인공이 없는 이야기라 그렇다.





우리가 판단을 신중하게 하는 이유는 오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자체가 또 다른 정의의 실현이기 때문이다(이를 절차적 정의라고 한다). 가해자의 처벌도, 피해자의 권리 회복도 모두 법적 절차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이를 법치주의라고 한다). 놀부는 못된 놈이다. 부모의 유산도 독차지했고 아내를 사주해서 흥부를 주걱으로 폭행하기도 했다. 이웃 주민으로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세일러문이 나타나 소리쳤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세일러문은 마술봉으로 심술궂은 놀부를 마구 두들겨 팼고 놀부는 전치 6주의 상해를 입었다. 결국 세일러문은 상해죄로 기소되어 재판받게 되었다. 세일러문은 스스로 이렇게 변론했다. “판사님, 저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놀부를 혼내주었을 뿐입니다.” 판사는 이렇게 대꾸했다. “사랑은 법적인 문제가 아니지만 당신은 확실히 정의가 아닙니다.” 놀부의 악행과 별개로 놀부는 타인에게 폭행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놀부가 아무리 나빠도 세일러문은 직접 놀부를 혼쭐낼 권리가 없다.





결혼과 관련해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은 혼인도 당사자의 의사 합치로 성립하는 하나의 계약이라는 점이다. 혼인 계약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계약 기간이다. 혼인 계약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유효하다. 만일 계약 기간이 ‘임차인의 죽음’인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면 반사회적 법률 행위로 무효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겠지만 임대차 계약과 비교도 안 되는 다종다양한 권리와 의무가 얽혀 있는 혼인 계약은 어떤 이유인지 너무나 당연하게 영원함이 원칙이다. 왜라고 물어보면 ‘그것은 원래 결혼이니까’라는 답 없는 도돌이표로 돌아간다. 혼인 계약은 영원히 영원해야 할까? 우리가 결혼을 두려워하고 견딜 수 없어 하는 이유는 어쩌면 무한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관습이 변하듯 혼인 계약도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임대차 계약처럼 갱신제를 도입해볼 수도 있다. 혼인 신고일로부터 5년이 지나면 강제 이혼이 성립하되 쌍방의 갱신 합의서를 제출하면 혼인이 지속되는 식이다. 갱신 기간이 다가오면 상대방의 눈치도 보고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인류를 성숙하게 했듯 어쩌면 끝이 있는 결혼도 우리를 성숙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결혼 갱신제는 개인적인 공상에 불과하지만 실제 변호사로 이혼을 다루다 보면 결혼이 영구적으로 무한해야 하는지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혼을 망설이는 이유는 남아 있는 사랑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경제적 곤란, 불안한 자녀 양육 환경, 이혼 자체에 대한 사회적 비난 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혼이 더 손해라서 이혼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혼이 더 손해인 상황을 만든 결정적 장본인은 법원이다. 최근 SK 최태원 회장과 아트센터 나비 노소영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위자료 액수가 이슈였다. 30억 원을 청구했는데 법원이 인용한 액수는 1억 원이었다. 노소영 관장의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실제 이혼 소송에서 위자료는 이보다 훨씬 적어서 대개 3000만 원 정도다.





나는 대도시를 좋아한다. 인공 구조물은 흥미롭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보면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사람을 좋아한다. 출근길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속사정이 무엇일지 상상해본다. 유치원 차에서 내려 줄지어 걸어가는 아이들이 사랑스럽다. 과학 기술로 신묘하게 조율된 신호등의 점멸, 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자동차를 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섭리를 느낀다. 그런데 조금 더 걷다 보면 살짝 오싹해진다. 거대한 도시에 마주치는 동물이라곤 인간뿐이다. 잠시 후 몇 마리의 비둘기, 주인과 산책하는 강아지,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를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종의 다양성 측면에서 도시는 이미 대멸종 상태다.


나의 마음에는 오래된 멸종의 공포가 있다. 대학교 때 태평양 쓰레기 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미세 플라스틱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환경 문제를 조사했는데 심각성에 압도되어 며칠을 두문불출했다. 공부도 할 수 없었다. 환경 문제의 근본 원인은 과잉 생산을 조장하는 소비주의인데 자본주의 사회 구조상 답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는 대멸종인데.’ 당장의 고민은 화장실에 있던 바디 클렌저였다. 각질 제거용 알갱이도 플라스틱이 원료였다. 바디 클렌저가 이 모든 문제의 상징처럼 보였다. 쓸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었다. 어느 쪽이든 종착지는 쓰레기 섬일 테니까. 생산된 오염은 사라지지 않는다. 매일 아침 욕실 선반에 놓인 바디 클렌저를 볼 때마다 괴로웠다.



 


‘답이 없다.’ 변호사 일을 하면 세상의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본다. 괴담보다 기괴한 것이 현실이다. 답이 없고 고쳐지지 않는 이 오염된 세상에서 내일은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어도 될까? 인간이 변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불가역 멸종의 도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대오각성을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그다음 날 다시 유카탄반도에 소행성이 떨어져 빙하기가 오거나 지구가 폭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도 오늘을 살 듯 답이 없는 현실에서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답이 없다.’ 나는 여전히 멸종의 공포를 안고 산다. 하지만 냉소는 나빴다. 





가끔 이유 없이 우울할 때가 있다. B 사감처럼 외로운 것이 아니라 브람스처럼 고독한 느낌이랄까. 가만히 길을 걷다가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든다. 며칠 전부터 출근길 가로수가 울긋불긋해지기 시작했다. 단풍의 계절이다. 우중충한 서초동도 가을에는 노랗고 빨갛다. 가을은 대용량 쓰레기 봉지의 계절이기도 하다. 단풍 든 나무의 밑동마다 낙엽이 가득한 쓰레기봉투가 놓여 있다. 봉지가 터질 정도로 눌러 담은 낙엽을 보면 어쩐지 야속하다.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는 예쁜 잎사귀였는데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쓰레기 취급이다. 나도 그 신세가 될지 모른다. 안간힘으로 매달려 있지만 떨어지자마자 쓰레기봉투에 꽉꽉 눌러 담기는 신세.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을 분류하면 크게 세 가지다. ‘남의 나라 명절을 따르다 죽었다’ ‘놀다가 죽었다’ ‘무용한 죽음이다’. 이런 댓글에 관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본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당신은 이미 전통에서 먼 삶을 살고 있다. 아마도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면서 댓글을 달았을 것이다. 무선 통신은 전통과 전혀 무관한 ‘맥스웰의 방정식’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의 삶은 용도와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시각을 우리는 ‘비인간화’라고 하고 지양하라고 교육받았다. 일하다 사고를 당하면 더 유용한 죽음인가? 산업 재해 사망 유가족에게 “당신의 자녀는 유용하게 죽었습니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고 상상해보자. 십중팔구 멱살잡이를 당할 것이다.





견디는 삶에서 그나마 내가 가진 작은 자유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은 확실히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깻잎 논쟁이 유행했을 때 마음이 불편했다. 개인의 자유를 축소하는 논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깻잎 논쟁의 화두는 다음과 같다. “같이 식사하는데 친구가 여러 겹의 깻잎에서 한 장만 떼지 못하고 낑낑대자 나의 애인이 친구의 깻잎을 잡아주었다. 화낼 일이냐 아니냐.” 한 가지 질문 같지만 뜯어보면 두 가지를 묻는다. 하나는 나의 애인이 친구의 깻잎을 잡아주어도 되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화를 내도 되느냐다. 애인의 행동은 통제하고 나의 행동은 검열한다.

합의된 결론에 이르기 위한 토론과 달리 논쟁은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이기기 위해 한다. 쇼펜하우어도 《논쟁적 변증술》에서 “변증술은 인정하건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단순히 이기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38가지 요령을 제시한다(요령이라기보다는 술수에 가깝다. 예컨대 요령 32번은 “상대방의 주장을 혐오스러운 범주에 집어넣어라”이고 요령 38번은 “상대방을 이길 수 없으면 인신공격을 가하라”다). 논쟁은 ‘나의 의견이 옳다’뿐 아니라 ‘너의 의견은 틀렸다’를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틀린 너의 의견을, 틀린 너를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 재미로 하는 시시한 논쟁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깻잎 논쟁이 너무 시시한 것이라 우려스럽다. 시시하고 자기 멋대로 해도 되는 일로 논쟁하다 보면 시시한 일에도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의 재미는 경계 없음이다. 신과 인간의 경계가 없다. 인간 같은 신과 신 같은 인간이 뒤섞여 살면서 신은 인간을 속이고 인간은 신에게 도전한다. 선과 악의 경계도 모호하다. 그리스 신화의 괴물은 영웅으로부터 물리쳐져야 하는 존재이면서 자신만의 전사(前史)가 있다. 예를 들면 미노타우로스는 이렇다. 미노스는 포세이돈의 도움을 받아 크레타의 왕이 된다. 포세이돈은 미노스가 자신에게 제물로 바치도록 ‘하얀 소’를 만들어주기까지 했는데 미노스의 아내인 파시파에가 그 소를 마음에 들어해서 제물로 바치지 말자고 남편을 설득한다. 이에 미노스는 병든 소를 포세이돈에게 바치고, 분노한 포세이돈은 파시파에가 하얀 소를 사랑하도록 저주를 내린다. 파시파에는 하얀 소와 수간(獸姦) 끝에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미노스는 미궁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고 아테네의 소년과 소녀를 먹이로 던져준다.

미노타우로스의 서사를 읽다 보면 누가 악한지 헷갈린다. 분별력 없는 미노스? 욕심 많은 파시파에? 속 좁은 포세이돈? 어찌 되었든 두 사람과 한 신의 인간적인 잘못이 뒤섞여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다. 그렇다면 미노타우로스가 악한가? 미노타우로스는 괴물로 태어났기에 미로에 갇혀 생존을 위해 식인한다(소의 모습을 하고 육식하는 모습이 의아하다). 아테네 아이들의 죽음에 관해서는 법적 책임이 분명하다. 미노타우로스는 선악 판단을 할 수 없기에 책임 능력이 없다. 따라서 죽을 줄 알면서도 소년과 소녀를 미궁으로 밀어 넣은 미노스가 살인의 간접정범으로 유죄이고 미노타우로스는 도구로 무죄다. 따라서 미노스가 악인이다(미노스가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판단이다). 

그리스 신화의 괴물들은 대체로 억울한 존재다. 그들은 불운하게 괴물이 되거나 괴물로 태어나서 자신의 존재에 충실하게 살다가 갑자기 영웅에게 살해당한다. 결과적으로 괴물들은 오로지 영웅의 과업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미노타우로스만 보아도 미노스는 미궁에서 미노타우로스를 굶겨 죽일 수도 있었지만 마치 적시에 테세우스의 과업으로 살려둔 것처럼 수십 년간 아테네의 아이들을 먹이로 던져준다). 나는 어릴 때 겁이 많았지만 그리스 신화의 괴물과 악당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결혼을 결정하고 시댁인 밀양에 첫인사를 하러 갔다. 집에서 시부모님께 인사드린 후 밀양시립박물관에 가게 되었다. 첫인사에 박물관이라니 약간 의아했다. 그런데 맙소사, 박물관에 독립운동가셨던 시할아버지의 흉상이 있었다. 1차 충격. 게다가 흉상의 시할아버지와 우리 남편이 똑같이 생겨서 2차 충격이었다. 그 후 남편의 독특한 성정을 발견할 때마다 어쩐지 자꾸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흠, 저렇게 고집이 세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겠군.'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렇게 선해한다. '카카오톡 또 읽씹하네. 그래, 아마도 저렇게 입이 무거워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겠지.'





1992년과 1993년 사이에 범우사에서 나온 완역판 <아라비안 나이트>도 아빠가 일단 사둔 책 중 하나였다. 언어 천재 리처드 버턴 경의 영문판 <천일야화>를 중역한 열 권짜리 전집으로 당시에 출간 소식이 신문 기사로 나올 만큼 화제였다. 그 책은 우리 집에서 나만 읽었는데 나중에는 하도 많이 읽어서 책이 너덜너덜해졌다.

<천일야화>는 제목부터 끝내주게 멋지다('1000일야화'가 아니라 '1001'야화다). 1001은 가운데 거울을 놓고 비추어보면 좌우 대칭이 되어서 '대칭수' 혹은 '거울수'라고도 한다. 그래서 1001이라는 숫자를 보면 양쪽 벽에 거울이 달린 엘리베이터가 떠오른다. 가끔 그런 엘리베이터를 타면 나의 상이 좌우 거울로 끝없이 복제되어서 마치 영원 속에 갇힌 느낌이 든다. 1000일에서 하루를 더해 1001일이 되면서 영원히 계속되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함의가 완성된다.





<천일야화>에서의 엉망진창인 인간들은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무사히 귀가하는 술주정뱅이같이 올바르지 않다. 노골적으로 신체나 성행위를 묘사하는 장면이 많지만(범우사 판에는 야한 삽화도 가득 실려 있다), 실제로 읽어보면 남녀 모두가 서로를 성적 대상으로 보고 희롱을 나누기 때문에 어느 일방의 착취보다는 야생의 모습에 더 가깝다. 예컨대 이렇다. 첩이 왕자를 유혹하다가 실패했는데 오히려 왕자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왕에게 모함하면서 싸움이 벌어진다. 대신들은 각자 양쪽 편을 들며 '랩 배틀'을 하듯 남자가 더 음탕하다, 여자가 더 음탕하다라며 음담패설을 주고받는다. 계속 읽다 보면 '인간은 모두 음탕하네'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어릴 때의 기억으로는 고상한 <삼국지>를 읽을 때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아니, 초선은 인생도 없어?)





인스타그램이든 유튜브든 SNS의 운용 주체는 알고리즘이다. 너도나도 알고리즘 분석을 시도하고 알고리즘의 눈에 들기를 원하지만 알고리즘의 교묘한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알고리즘의 목적은 분명하다. 인스타그램이든 유튜브든 트위터든 페이스북이든 틱톡이든 웨이보든 알고리즘은 당신을 그곳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게 하려고 만들어졌다. 마치 친절한 큐레이터처럼 당신에게 콘텐츠를 추천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당신을 분석하고 비틀어서 SNS에 고립시키는 목적으로 콘텐츠를 던져주는 검열관에 가깝다. 기업에 의해 사실상 이루어지는 정보 편집은 국가에 의한 검열만큼 유해하지만 교묘하고 신중해서 현행법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검열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

미하일 엔데의 소설 <모모>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색 신사들이 나온다. 회색 신사들은 실제로는 무로, 사람들의 시간을 훔치고 훔친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자들이다. 회색 신사 같은 알고리즘이 훔쳐 간 우리의 시간으로 누군가는 이득을 얻고 있다(우연이겠지만 마크 저커버그가 회색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 시간을 빼앗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는 것일까?





예전 기사에서 한국인 평균 남녀 얼굴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사진을 계속 보다 보니까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는데 평균과 똑같은 사람은 실제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얼굴을 수치화해서 평균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 평균과 완벽히 똑같이 생긴 현실의 인간은 없다. 없는 인간이 평균이라니, 그렇다면 보통 사람은 사회가 만들어낸 이데아 같은 허상이 아닐까? 성과주의를 강요하려고(평범해서는 안 된다!) 혹은 타인을 억압하려고(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 무언지 알 수 없는 '보통 사람'을 들이대며 비난을 계속한다.

보통 사람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보통 사람일 텐데, 그렇다면 보통 사람은 실제로는 다종다양하게 보통이다. 마치 자갈 해변의 자갈돌같이, 멀리서 보면 다 똑같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 다르게 자갈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 모든 자갈의 이데아인 보통 자갈은 없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





혐오를 없애기 위해서는 혐오가 생겨난 사회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모든 불공정에 관해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욕심꾸러기 취급한다. 하지만 우리는 부당하게 작은 파이 조각을 받고 있다. 작은 파이를 서로 나누어 가지려고 싸움을 벌이고, 서로를 혐오한다. 저기 먹지도 못한 채 파이를 쌓아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 파이를 어떻게 우아하게 플레이팅할지 고민하고 있다. 해결책은 공정한 분배에 있지 혐오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