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맛이 유독 당길 때가 있다. 세기말 구원 서사 같은 거 말이다. 근데 얼마 전에 <에반게리온>과 <세일러문>은 다 봐 버렸다면? 그래서 오늘은 보다 유통기한 널널한 구원 서사 텍스트를 들고 와 봤다. 소년만화 st 세기말 구원 서사 텍스트 5선. (링크 너머에는 각 작품의 조금 더 긴 필사본이 있다. 물론 책 사서 전문으로 읽는 게 가장 짜릿하다.)

틀림없다. 달은 두 개다.

하나는 옛날부터 있던 원래의 달이고, 또 하나는 훨씬 자그마한 초록색 달이다. 그것은 원래의 달보다 모양이 삐뚜름하고 밝기도 덜했다. 얼결에 떠맡은,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못생긴 먼 친척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부정할 수 없이 그곳에 분명히 존재했다. 환영도 아니고 착시도 아니다. 실체와 윤곽을 가진 천체로서 확실하게 그곳에 떠 있었다. 비행기도 아니고 비행선도 아니고 인공위성도 아니다. 누군가 장난 삼아 종이로 만든 연극 소품도 아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바윗덩어리다. 오랜 숙고 끝에 찍은 구두점처럼, 혹은 숙명이 내려준 몸의 점처럼, 그것은 말없는 가운데 흔들림 없이 밤하늘 한곳에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개의 달의 모습은 덴고에게 현기증과 같은 어지러움을 몰고 왔다. 신경의 균형이 손상된 것 같다. 그는 미끄럼틀 위에 앉아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그것을 지그시 견뎠다. 주위의 인력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듯한 감촉이 있었다. 어디선가 바닷물이 차오르고 어디선가는 바닷물이 빠지고 있다. 인간은 insane과 lunatic 사이를 무표정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

1Q84,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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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마저도 흐릿한 와중 눈에 들어온 건 우영의 둥그런 어깨였다. 나에게 겉옷을 벗어주고 민소매만 걸치고 있는 우영의 어깨. 산지기의 딸인 우영은 허구한 날 돌산을 오르내려서인지 잔상처가 많았는데, 그날만은 유난히 희고 매끄러워 보였다. 물에 젖었기 때문일까? 꼭 흰 뱀 같았다. 아빠와 아쿠아리움에서 보았던 물뱀이 떠올랐다. 좁은 어항 안에서 나풀거리는 게 꼭 춤을 추는 것 같기도, 발악하는 것 같기도 했지. 어항 속 물뱀의 비늘을 떠올리며 나는 우영에게로 손을 가져갔고, 곧 검지 끝에 축축한 피부가 닿았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우영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사방에서 파도가 일렁였다. 나는 우영에게 물었다.

"내가 밉지 않아? 나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우영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고작 숨바꼭질 때문에 죽게 생겼는데도?"

"네가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우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오한이 드는 듯했다.

"난 이 갯벌에 언제 물이 차는지 알아. 그래도 널 찾고 싶어서 찾은 거야."

"왜?"

"내가 술래였잖아."

"너한테 술래를 시킨 것도 난데."

우영이 피곤하단 듯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깨에 걸친 우영의 겉옷을 벗어 들고 우영의 옆으로 가 앉았다. 내 겉옷과 우영의 겉옷을 겹쳐 우리의 어깨에 둘렀다. 내 왼쪽 어깨와 우영의 오른쪽 어깨가 닿았고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쳤다. 우리가 몸을 숨긴 암석 위까지 물이 밀려왔다. 우리는 휩쓸려가지 않도록 어깨를 붙이고서 힘을 주고 버텼다. 우영의 불규칙적인 호흡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호흡과 떨림도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온통 암흑뿐인 밤바다를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한 우영을 바라보았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물소리와 암석의 이끼 냄새를 타고 우영의 목소리가 닿았다.

"내가 찾지 않으면 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거든."

우영은 언제나 그랬다. 엄마와 아빠보다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그 어떤 친구들보다도 나에 대해 잘 알았다. 20년 후의 그 역시 알았을 것이다. 

이딴 식으로 사라지면 내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만조를 기다리며, 조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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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드라마나 영화라면 지금이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영대의 얼굴에 드리운 거리의 빛을 보며 형식은 생각한다

겨울밤
사람들의 입에서는 조금씩 영혼이 흘러나오고 있다

조명이 꺼진 실내로 크리스마스캐럴이 흘러들어오고 있었고, 형식과 영대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어떻게 이 작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까

형식은 사랑을 시작하려다 말고 밖을 보며 생각한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온 침묵을 견디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때를 천사가 찾아온 것이라 한다고, 형식은 영화에서 들은 말을 떠올린다 그 또한 영화의 마지막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밤은 고요하고 거룩한데
사람들은 아직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밖을 헤매고

말 없는 영대의 입에서 영혼의 흐린 빛이 흘러나왔다

침묵의 천사가 이 자리에서 우리를 찾아와 다시 떠나고 있다
형식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이 장면을 구성하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황인찬

https://mcger.tistory.com/152

"분절이 있어야 할 것 같았어. 그 사람의 마지막에 내가 끼면 안 될 것 같았어. 우리가 만났을 때 너무 연속되어 있었으니까. 그게 널 오래 혼란스럽게 했으니까. 이번만큼은 제대로 분절, 마디, 매듭을 만들고 싶었어. 내가 돌아와도, 바로 그 사람 대신은 아니게. 그래도 많이 힘들었지?"
"...... 안 돌아올 줄 알았어."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말을 오래 안 해선지, 자주 토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리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는데 그걸 믿는 날 믿을 수가 없었어. 믿으면서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어."

고장난 고래어 번역기처럼 한아가 말했다. 경민이 한아를 위로하기 위해 목덜미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러고 나서 팔을 풀고, 한아를 앞으로 돌려 다시 안았다. 돌아와서 처음 입을 맞췄다.

아, 입술이 거기 있었다.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https://mcger.tistory.com/137

같은 지역 내에서 〈동키콩〉 오락기를 찾으면 더 싸게 구할 수 있다. 운반에 드는 비용이 대단히 절약될 것이다. 하지만 그 오락기의 메모리는 이것과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 K타운의 윌셔 대로에 있는 동&봉 뉴욕스타일 피자하우스에서 최고 점수를 기록한 〈동키콩〉 플레이어는 S.A.M.이라는 이니셜을 쓰는 사람이란 것을 그 오락기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기계가 케임브리지에 도착했을 때, 오락기는 여전히 잘 작동했지만 최고점 기록은 지워져 있었다. 이런 초기 오락기들의 메모리는 불안정했고, 지워지지 말아야 하는 정보가 날아갔다. 백업 배터리는, 그런 게 있었다 한들, 오래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동현의 오락기가 이제는 텅 빈 명예의 전당 화면을 로딩했을 때, 세이디는 여전히 어렴풋이 S.A.M.을 볼 수 있었다. 그 점수가 워낙 오래 자리를 지킨 탓에 모니터에 번인 자국이 남았던 것이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https://mcger.tistory.com/97

이제 창문을 닫아도 와닿는 공기가 제법 차다. 첫눈이랑만 인사 못 했지 완연한 겨울이 온 듯하다. 이런 날에는, 무엇보다 전기장판을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번데기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서 적당히 감도 있는 텍스트를 두세 시간쯤 읽고 싶다. 잘 데워진 모짜렐라 치즈처럼 늘어져 있고 싶다. 그래서 모아 봤다. 전기장판 위에서 귤 까먹으면서 보기 좋은 책 5선. (이어지는 링크에는 각 책의 조금 더 많은 문장이 필사되어 있다. 물론 책의 물성을 느끼며 전문 읽는 쪽이 훨씬 짜릿하겠다.)

파도를 피해 포구에 몸을 누인 목선은 흔들리면서 지구를 읽는다. 

이런 상상을 자주 했었다. 지구는 둥그니까. 바다는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배는 그 위에 또 매달려 있고. 

매달린 채 흘러내리지 않는 바다. 

물론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면 설명이 충분한 일이지만 동원하고 싶지 않다. 

바다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목선들은 그 바다에 매달려 있다. 불온한 상상일지라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너에게 시시한 이름은 없다, 허연
https://mcger.tistory.com/140

결혼을 결정하고 시댁인 밀양에 첫인사를 하러 갔다. 집에서 시부모님께 인사드린 후 밀양시립박물관에 가게 되었다. 첫인사에 박물관이라니 약간 의아했다. 그런데 맙소사, 박물관에 독립운동가셨던 시할아버지의 흉상이 있었다. 1차 충격. 게다가 흉상의 시할아버지와 우리 남편이 똑같이 생겨서 2차 충격이었다. 그 후 남편의 독특한 성정을 발견할 때마다 어쩐지 자꾸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흠, 저렇게 고집이 세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겠군.'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렇게 선해한다. '카카오톡 또 읽씹하네. 그래, 아마도 저렇게 입이 무거워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겠지.'

질문하는 세계, 이소임
https://mcger.tistory.com/121

중국집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원탁 한 곳에만 두툼한 메뉴칩이 올라가 있고 젓가락과 숟가락이 각 자리에 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예약 손님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손님들은 아직 오지 않았고 거기에는 손님이 올 것임을 암시하는 젓가락과 숟가락만 놓여 있었다. 올 거라는 약속, 채워지리라는 표지, 추후를 예비하는 노력 같은 것.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https://mcger.tistory.com/117

가끔 내 머리가 컴퓨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수히 많은 윈도우 창이 화면 가득 열려 있는 컴퓨터. 온갖 폴더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바탕화면. 내 안에는 동그란 무지개색의 로딩 중 아이콘 같은 것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 한다. 수없이 열려 있는 윈도우 중 몇 개라도 닫아버릴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바탕화면을 꽉 채운 아이콘을 몇 개만이라도 휴지통 속으로 던져 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면 나도 좀 괜찮아질 텐데. 하지만 다들 하나같이 너무 필요해 보이는데, 어느 창을 닫을지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이 세상이 이미 과부하 상태인 마당에 내 정신이 과부하되는 걸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우리는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해서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데,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우는 전원을 다시 켜려면, 가끔은 이런저런 스크린을 꺼버릴 수 있을 만큼 용감해져야 한다. 

재접속을 위해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한다.

불안의 밤에 고하는 말, 매트 헤이그
https://mcger.tistory.com/111

네가 많이 보고 싶다. 브뤼노, 쉬즈, 나, 우리 모두 네 얘기를 자주 해. 이곳에서 함께 웃을 수도 있었는데, 미치겠다.
 
돌아가면 우리 열심히 토론하자. 미국과 우리에 대해서. 왜냐하면 내가 너를 잃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구멍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그건 아마 내 잘못일 테고, 그래서 신경 쓰여. 
 
나와 함께 프랑스 남부에서 열흘 보낼 수 있게 일정을 조정해줄래? 나는 1월 초에 거기 있을 거야. 내일은 뉴욕, 뉴욕 시 파크 애비뉴 34번가 밴더빌트 호텔에서 다시 집결할 거야. 그쪽으로 편지하고, 날 잊지 마. 곧 보자.

인생은 너무도 느리고 희망은 너무도 난폭해, 프랑수아즈 사강 
https://mcger.tistory.com/109

오후 여섯 시. 늘 밝았던 퇴근길이 어둡다. 나는 그제야 계절을 실감한다. 아, 겨울이 왔구나. 온도에도 타인의 시선에도 영 둔감한 나는 대개 비주얼로 계절을 인지한다. 좀 밝아졌으면 여름, 좀 어두워졌으면 겨울. 그래서 내게 겨울, 은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저명도'다. 그래서 골라 봤다. 초겨울 저명도 낭만 무드 노래 6곡.

https://youtu.be/d-UMBguNiv0?si=_hScMui0LrN2yGwy

그저 난 괜시리 깊게 잠든 그대가

깨어나 떠날 것만 같은 걱정을 하게 돼요

분명 눈을 뜨면 내 옆에 그대는 없을 거야

이 비가 그치면 더 이상 흘릴 나조차 없을 거야

그냥 여기에 있어줘 깨어나지 말고

차라리 이대로 죽어줘

아가미, 쏜애플

https://youtu.be/G7id_9gS-yE?si=Ny-1MZ7ALMzFB9qf

기묘한 웃음소리 넌 심술궂었지

날 사랑하지 않는 게 이기는 줄 알지

새벽의 벨소린 나의 목을 감싸고

파블로프 개처럼 난 너를 기다려 

나의 위성, 장재인

https://youtu.be/pyYsTmGJEWY?si=OKGVVcUxOxHOQpcj

너와 내가 떠난 이 알 수 없는 여행

너를 바라보다 잠이 들었는데

밤이 찾아와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

이 꿈 같은 곳으로 나를 데려온 거야 

빛나는 하늘과 떨리는 두 손과

나를 바라보는 너의 그 깊은 미소가

난 울지 않을래 피하지 않을래

어둠 속의 빛으로 넌 내게 머물러

백야, 짙은

https://youtu.be/MjQjaB-HedA?si=K_ngx1zvhYltf7dn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나대로 가고 멈추고 풀었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서 살게 해

Track 9, 이소라

https://youtu.be/jyd8xQjPB1Y?si=7orFNLPGNWTSMR2Z

창문을 열어도 계절은 가고

두 눈을 떠봐도 진달래는 지고

긴 꿈에 헤매도 아침은 오고

돌아서 있어도 흔들리는 마음

Ever Ever (Feat. 계피), 보이

https://youtu.be/YsPwe1DXdEE?si=8X6bh1sV2kolvvjY

친구들을 만날 땐 옷장을 뒤적이지

제일 비싼 옷을 입어야 돼

구김없이 말하는 법을 연습하지

제일 똑똑한 단어를 써야 돼

사랑했던 사람과 모터보트 위에서

말리부에 오렌지를 타서 먹는 상상을

하다 아랫집 소리가 들리네

잃어버린 시간과 사람들을 모아서

취기어린 고백들을 밤새 하는 상상을

하다 숙취에 고개를 숙이네

말리부오렌지, 박소은

대전에 갔다 왔다. 신기한 도시였다. 걷는 곳에는 이방인이 없었고 만나는 사람들은 여행자를 대하는 근육이 물렀다. 삼 일 머무르고 떠날 사람을 십수 년쯤 여기 머문 사람으로 대해 주는 곳에서 여행자 특유의 날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뻔뻔하게 이곳 사람인 체 굴며 다녔고 하루 온종일 책을 읽었다. 서울에서보다 대전에서의 세상은 느렸고 거기서 우리는 평소 따라잡지 못 했던 세상과 보폭 맞춰 걸을 수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지원했던 회사에서 최종 합격 문자를 받았다. 요새는 내게 우호적인, 어떤 진부하고 평온한 영화의 시나리오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종종 든다. 굳이 거부하지 않고 나무늘보 같은 삶을 이백 퍼센트 만끽하는 중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에서 소심하고 갈등 많은 성격인 골랴드킨 씨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작은 골랴드킨 씨에게 사사건건 모욕을 당하며 불안 증세를 겪다가 정신병원에 끌려가 죽는다. '분신'을 모티브해 만들어진 리처드 아요데의 '더블'에서 역시 주인공 사이먼 제임스는 본인의 매력적인 분신 제임스 사이먼에게 대체된 채 괴로워하다 자살한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사이먼 제임스를 끝내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은 제임스 사이먼이 아닌 아이디카드 분실이었다. 그는 칠 년을 회사에서 일했음에도 아이디카드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회사 출입을 통제당한다. 이후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존재를 증명하려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끝내 그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삶을 끝내기로 했습니다." 라고 적힌 유서를 남기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시대를 넘어 우리는 시스템에게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도달했다. 그리고 내 존재의 인증 수단은 나 자체의 물성이나 생각의 밀도가 아니라 시스템의 등재 여부에 따라 증명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의 아이디카드는 명백하게 '휴대폰'이다. 대한민국에서 핸드폰 없이 하루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다...... (이상 갑자기 쓰던 유심이 먹통 돼서 월 이 만원쯤 더 내는 손해를 감수하고 오늘 급하게 통신사 재개통한 사람 올림)

이번 년은 내 생의 이전 해를 전부 합친 만큼 요리를 자주 했다. 물론 밀키트로. 이 글은 내가 약 세 달동안 육십여 개의 밀키트를 먹고 구매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밀키트 얘길 하는 글이다.

밀키트는 꽤 흥미로운 구성을 갖고 있다. 일단 완제품이 아니라 어떤 요리를 구성할 수 있는 재료를 소분해 포장하고 레시피를 동봉한 형태로 판다. 즉 '요리해야 한다'. 노동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고 요리를 조리할 수 있는 장소도 필요하다. 요리를 하고 나면 설거지도 해야 한다. 거기다 더 주목할 점은 요리를 할 재료는 전부 들어 있긴 하지만 재료가 요리의 완전한 성공을 담보해 주진 않는다는 점이다. 물 양, 불 세기, 재료의 손질 형태 등 아주 미묘하고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로만 손에 익혀야 하는 몇몇 암묵지가 없다면 요리는 온전한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밀키트의 시장가는 동일 용량의 원물보다는 훨씬 비싸게, 시장에 가서 사거나 배달로 주문할 수 있는 완제품과 비슷하게 유지되고 심지어 시장의 투 톱인 쿠팡프레시와 마켓컬리의 매출을 견인할 정도의 수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일부 제품은) 배달해서 먹는 완제품보다는 싸다,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밀키트의 폭발적인 수요를 설명할 수는 없다. 쿠팡프레시를 조금만 둘러보면 같은 브랜드의 요리를 원물 그대로 냉동한 것보다 동일한 요리를 밀키트화 한 것이 판매량이 더 잘 나온다는 점을 몇 분 안 돼 파악할 수 있다. 밀키트가 완성된 요리 이상의 편익을 고객에게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 냉동 요리, 배달 음식점과 밀키트의 다른 점은 뭘까. 

나는 프레시지, 곰곰, 마이셰프, 애슐리 등의 온갖 밀키트를 조리해 보며 내가 얻는 편익의 플러스 알파에 대해 추측해 봤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재료의 신선함:

밀키트는 재료나 소스가 원물 상태로 오고 그것들의 유통기한이나 선도, 재료의 원산지 등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원물의 맛을 200% 살릴 수 있는 요리를 할 수 있다. 완제품의 경우는 이리 조리되어 소스에 절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를 파악하기 힘들다.

(2) 요리를 개인화할 수 있음:

나는 짜게 먹는 편이지만, A는 싱겁게 먹는다. 배달 음식이나 냉동 음식의 경우 음식이 짜게 오는 경우가 많아서 얘가 잘 못 먹는 경향이 컸다. 밀키트는 이렇게 개인 취향에 맞춰 염도를 조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식재료를 가감해서 요리를 먹는 사람에게 최적화된 형태로 맞출 수 있다.

(3) 요리에 대한 진입장벽 최소화/ 경험 구매:

밀키트는 '성공하는 레시피'와 '소분화된 재료'를 제공함으로써 요리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고 사용자가 쉽게 요리에 접근하게 도와 준다. 요즘은 요리 레시피를 공개하는 여러 채널이 많지만, 그걸 찾는 것도 사실 일이다. 밀키트를 통하면 검증된 레시피와 요리할 수 있는 재료가 한 번에 온다. 요리라는 취미를 적당히 경험해 보고 싶은 나 같은 사람에겐 밀키트가 종합선물세트다.

이 글을 쓰게 된 원인이 있다. 어제 소곱창이 너무 먹고 싶어서 로켓프레시를 둘러 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소곱창을 샀다. 밀키트 말고 원물만 냉동된 것. 그냥 이거랑 부추랑 사서 구워 먹으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요리하려고 보니 아니었다.

부추는 무쳐야 하고 간장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부추를 무치려면 고춧가루가 필요했고 간장을 만드려면 거기에 더해 다진 마늘, 까나리액젓, 빙초산이, 구울 땐 다시다가 필요했다. 그렇다. 요리를 할 때 들어가는 부차적인 재료는 한두 개가 아니다. 그리고 일단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요리를 위해 사기엔 너무 대용량이고 지출이 컸다. 그래도 뭔가 만들어 보려고 급하게 편의점에 갔는데 나머지는 다 없었고 다시다 100g을 4,300원에 사서 털레털레 집에 왔다. 밀키트가 그리웠다.

아는가. 요리는 꽤 돈이 들어가는 취미란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요리에는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의 투자가 요구된다. 위에서 언급한 식재료 외에도 갖춰줘야 할 것이 많은 비싼 취미다. 하지만 밀키트는 이 모든 것 없이 요리의 좋은 부분만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부분에서 어쩌면 밀키트의 아하 모멘트는 완성된 요리를 먹는 부분이 아니라 요리하는 그 순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튼간에, 나는 내일도 밀키트로 두 끼를 해결할 예정이다. 밀키트 사랑해, 덧붙이며 글을 마친다.

있다 없으니까 힘들다. 네가......

이 앞뒤 없는 말의 문맥을 살피려면 월요일 오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쿠팡에서 산 밀키트 부대찌개가 아침이었다. 아침에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조리하는 걸 A에게 맡겼고 (무슨 인과관계처럼 당연하게도) 물 양이 한강이었다. 부대찌개에서는 양과 염도를 맞바꾼 보릿고개의 맛이 났다. 웩. 다시는 얘한테 국물 한 방울 안 맡겨야지 했다. 여튼 못 먹어줄 정도여서 더 졸이려고 가스레인지 올렸는데, 캠핑용 일회용기에 담겨 오는 밀키트라 뭐 덮을 게 없었다. 쇠냄비 위에 올리는 강화유리 냄비 뚜껑을 그 위에 올렸다. 파국의 시작이었다.

졸이고 오 분쯤 지났을까, 뚜껑을 열어 보니 맛있게 졸아든 부대찌개가 보였다. 뿌듯해하며 냄비 뚜껑을 걷어 냈는데 뚜껑과 쇠가 맞닿아 있는 앞유리 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탔군, 물에 넣어 놔야겠어.' 그때 내 머릿속은 먹을 생각으로 가득 차서 논리가 표백돼 있었다. 붕어 같이 눈을 끔뻑이며 그대로 물에 넣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진짜로 말 그대로 폭발했다. 냄비 뚜껑의 유리 부분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부엌에서 터졌는데 무슨 조각이 거실까지 갔다. 빅뱅을 재현하는 일련의 실험ㅡ한 세대 전 과학자들이 해야 할 것ㅡ을 이십일 세기에 부대찌개 끓이다가 내가 한 거나 다름없었다. 냄비 뚜껑은 둥글고 큰 쇠 링과 그보다 작은 쇠 링, 그리고 수많은 유리 조각들로 분해됐다. 

결과보다 수습이 끔찍한 참상이었다. 그 참상 사이에서 나는 혼자 무사했다. (추워서) 맨투맨에다가 (뜨거워서) 고무장갑까지 끼고 있어서 정말 스치지도 않았다. 이런 데다 세렌디피티를 다 쏟아 부었겠구나 생각한 게 이틀 전 아침이다.

오늘 나는 다시 찌개를 끓이며 가 버린 유리 냄비 뚜껑을 그리워한다. 네가 있다 없으니까 힘들다. 이제 찌개는 누가 끓여 주니.

요새 꽤 자주 찾아보는 이론이 있는데 그게 뭐나면 이름도 거창한 '시뮬레이션 지구설' 이다. 이 이론은 철저히 귀납적인 잣대에서 근거를 찾는다.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수학적으로 논증된다는 사실. 파도, 물결, 나뭇잎, 세포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분이 전체를 담는 프랙탈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이 세상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면 아주 작은 확률을 뚫고 태양계와 같은 구조가 만들어졌고 그보다 더 작은 확률을 뚫고 지구 내부의 공기 비율이 알맞게 설정되었다는 사실. 그래서 지구가 마치 인간을 요람처럼 안고 키워냈다는 결과.

모든 게 완벽하다. 너무 완벽해서 외려 문제가 제기된다. 조작된 거 아니냐는 거다. 의심해도 증명할 방법은 없다. 방금 실행한 게임 속의 NPC가 플레이어블 캐릭터에서 실질적으로 그를 움직이고 있는 나를 읽어낼 수 없는 것처럼. 증명의 가능성을 '설' 단계에서 빼앗긴 이것은 얼마 전부터 내 머리 속에 들어와 떠나질 않는다. 인류를 넘어 태양계를 넘어 이 세상 자체를 종잇장 내지는 회로칩 안에 욱여 넣고 한 차원 넘어선 세계를 그리는 발칙한 상상력이 나를 매혹시킨다.

그래. 나를 매혹시키는 건 대개 어처구니 없고 발칙한 것들이다. 그 모든 게 어처구니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폐활량을 넘어선 것들을 꿈꾼다. 내 머리와 몸이 같은 목표를 바라보는 것은 아마 심장이 멈출 때쯤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 누굴 탓할까. 더 달려볼 수밖에.

'차린다'는 말에 엮이는 몇몇 명사가 있다. 음식, 저녁, 기운, 처럼 체면도 거기 있다.

차린다. 먹을 수 있도록 품을 정결하게 내어 놓는 것. 음식이 음식 자신이 아니라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듯, 체면 역시 나 이외의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아주 투명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한 겹의 막으로 체면은 나와 세상 사이에 있다. 대개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때로는 불쑥 튀어나와 나를 숨 막히게 한다. 내가 약해졌을 때 주로 그렇다. 질환이 엉겨 붙거나 어떤 측정치도 접하지 않은 채로 모르는 사람과 대면해야 할 때 말이다.

어제는 드물게 아팠다. 오늘 역시 어제의 연장 선상에서 아프고 있어서 나는 습관처럼 마음을 수그리고 체면이 나를 압박하는 과정을 감당하려 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아픈지 만 하루를 넘긴 지금도 그랬다. 그제야 나는 나를 압박하던 체면이 사라져버렸음을 알았다. 그제야 김금희 작가의 소설 한 구절을 몸으로 이해하게 됐다. 그렇다. 책에는 말이 없고 책에는 응시가 없다. 관계도 없고 터치도 없다. 무슨 존칭, 무슨 웃음, 무슨 헛기침, 무슨, 지시, 무슨 권유, 무슨 답변은 당분간 전혀 필요가 없었고 그를 위해 양 입가를 견인하던 긴장도 사라졌다. 체면이 나를 떠났다. 물론 한시적으로.

그러니까 이제 더는 뭣도 두렵지 않다. 

"추상적"인 것을 시각화한다면 어떻게 나올까. 무엇을 대상으로 하든 초점이 흐트러진 사진 같은 형태가 나올 것이다. 추상은 그릴 수 없다. 추상의 선은 느슨하게 번져 있다. 그래서 어느 부분을 짚든 확고한 것이 없다. 동시에 어딜 짚든 대상이 아예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다. 잉크가 번진 옷에서 잉크가 안 닿은 데를 찾아본다고 생각해 보라.

몇 년쯤 전에, 좋아하던 사진가가 있었다. 그 사람은 철저히 취미의 영역에서 사진을 대하면서도 자신이 겪는 모든 상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보면 그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사진엔 강박적일 정도로 추상이 없었다. 모든 곳이 선명한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프레임 안에 담긴 대상은 한없이 작았다. 어제 마신 커피, 어제 읽은 책, 어제 만난 친구, 어제 만난 겨울철의 나뭇가지 같은 것들. 작고 개인적인 것들이 단단한 선 안에 멈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사진과 마주할 때면 (오롯이 나를 향한) 어떤 단단한 응시를 맞받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 사람은 더이상 사진을 찍지 않지만 나는 때때로 그 사진들을 오래 본다. 그 곧은 시선과 마주볼 때면 한눈 팔 수 있는 데 없어 좋았다. 몇 년 전의 아주 선명한 무언가를 바라보며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내게 집중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예를 들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다른 것들도 대개 그랬다. 

나는 지독하게 선명한 것들을 좋아한다. 허락된다면 세상에 화장실 타일만한 네모칸이 잔뜩 이어진 필터를 걸어 놓고 그 선에 딱 맞춰 무언가를 정렬하고 해석하고 맞춰 놓고 싶다. 데이터 분석은 이에 최적화된 툴이다. 임의의 타일이 이 정도 간격으로 세워져서 어떤 논리적 구조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언어로써 정립하고 반복된 구조화와 실행을 통해 각 개체 사이의 논리적 오차를 줄여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정성적인 것도 명확한 논리의 퍼널 안에 집어넣고 볼 수 있다. 아주 명확한 제 3의 언어. 누구도 오해할 수 없는 만국공통의 언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shoot)다는 것은 총을 쏘는(shoot) 것과 같다, 고 수전 손택은 썼다. 사진을 찍는 순간 피사체는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본인이 가져본 적 없는 형태로 박제된다고. 그러니 카메라가 총의 승화이듯이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살인의 승화라고. 슬프고 두려운 이 세상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살인. 

해당 묘사와 동일한 맥락에서 사진과 데이터 분석을 사랑한다. 내 안의 부드러운 사디즘에 대해 인지하며 이것들의 날카로운 부분이 남을 상처 입히지 않도록 주의한다.

나로 말하자면, '만 나이' 그러니까 소위 윤석열 나이의 최대 수혜자라고 해도 좋다. 그도 그럴 게, 차에 치여 과거로 돌아가곤 하는 무슨 판타지 소설의 클리셰마냥 서른이 다다르기 직전에 국가의 나이 셈법이 바뀌어서 눈앞이었던 서른이 다시 이 년씩이나 유예되었기 때문에......

어려진 감상을 뱉어 보자면, 어떤 게임이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 년 전으로 정확히 돌아가면 내가 (열정적으로) 다니고 (열정적으로) 퇴사했던 전 회사에 막 들어가는 시기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다시 윤석열 나이의 버프를 받아 다시 찾아온 두 번째 스물여덟의 1월에서 다시 시작의 기로에 서 있다. 어떤 선택지를 선택하기 이전 시점으로 데이터를 로드해온 듯이. 엔딩을 보기 전에는 무한히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는 판타지 소설 주인공의 알고리즘 안에 갇힌 듯이.

돌이켜보는 이 년동안 나는 그렇게까지나 많은 것을 해냈고 그만큼이나 많은 장벽 앞에서 실패하기도 했다. 개중엔 외부보단 내부의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여전히 수많은 가정법 과거완료들이 논문 주석만큼 내 머릿속에 줄지어 매달려 있다. 언젠가 시도해 볼 귀중한 방향으로써 말이다. 이젠 이것들의 시제를 현재진행형으로 바꿀 때가 됐다. 죄책감 없이 가볍게 시도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