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인간의 두뇌가 실로 훌륭하게 코딩됐다는 증거는 ‘아 어쩌라고’의 뜻으로 ‘죄송합니다’를 발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샘은 생각했다.  

 

 

 

“아니, 하지만 할아버지 가게에 〈동키콩〉 오락기가 있어. 그래서 공짜로 실컷 했지. 게임이란 건 원래 아무거나 하나를 마스터하고 나면 다른 것들도 쉽게 할 수 있어. 난 그렇다고 생각해. 결국 시력과 손놀림의 협업, 그리고 패턴의 관찰이니까.” 

 

 

 

“미로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증류된 비디오게임이죠.”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건 자체 보정된 시각을 거친 자화자찬이었다. 그 미로들은 세이디를 위한 것이었다. 게임을 디자인하는 일은 결국 그 게임을 플레이할 사람을 그려보는 일이다. 

 

 

 

도브는 자기 게임에는 그 어떤 슈팅 요소도 없다고 주장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플로리안이 말했다. “주인공 여자애가 통나무로 상대를 노려 가격하잖아요.”

 

“그건 슈팅이 아니지.” 도브가 말했다. “그건 폭력이야. 어린 소녀가 흉포한 공격자를 통나무로 때리는 맨손 격투고, 그건 진솔하지. 화면에 손만 나오는 남자가 무명의 졸개들을 차례차례 총으로 쏘는 건 야바위야. 어쨌든 나는 폭력을 싫어하는 게 아냐. 내가 싫어하는 건, 도대체가 할 줄 아는 게 뭘 쏘는 것밖에 없는 마냥 게으른 게임들이지. 이건 게으르기 짝이 없어, 플로리안. 자네가 만든 게임의 문제는 슈팅이 아니라 플레이하는 재미가 없다는 거야. 하나만 묻지, 자네 이거 해봤나?” 

 

“자자 친구,” 도브는 애정을 듬뿍 담아 플로리안의 어깨를 퍽 치더니 이어서 난폭하게 꽉 끌어안았다. “다음번엔 더 멋지게 실패하자고.“

 

 

 

〈솔루션〉의 요체는, 게이머가 무작정 장치를 만드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고 간간이 질문도 하고 정보도 얻으면 점수는 낮아지지만 자신이 독일 제3제국에 공급되는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정보를 입수하고 나면 게이머는 생산량을 낮출 수도 있다. 제국이 감지하지 못하는 선에서 최소량만 만들어낼 수도 있고, 부품 생산을 아예 중단할 수도 있다. 질문을 하지 않는 게이머는 ‘선한 독일인’으로서 태평하게 최고점을 얻겠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공장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독일식 활자체 문구가 화려하게 화면을 수놓는다. 축하하오, 나치당원! 귀하는 제3제국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소! 귀하는 진정 효율화의 달인이구려! 미디로 손본 바그너가 울린다. 〈솔루션*〉의 핵심은 게임을 점수로 이기면 윤리적으로는 진다는 점이다.

 

*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 절멸 정책, 즉 홀로코스트의 공식 명칭이 ‘파이널 솔루션(최종 해결책)’이었다. 

 

 

 

     10 READY

     20 FOR X = 1 to 100

     30 PRINT “미안해, 샘 아킬레스 매서”

     40 NEXT X

     50 PRINT “제발 제발 제발 용서해줘. 사랑을 담아, 너의 친구 세이디 미란다 그린”

     60 NEXT X

     70 PRINT “용서하는 거지?”

     80 NEXT X

     90 PRINT “Y OR N”

     100 NEXT X

     110 LET A = GET CHAR ()

     120 IF A = “Y” OR A = “N”THEN GOTO 130

     130 IF A = “N”THEN 20

     140 IF A = “Y”THEN 150

     150 END PROGRAM

 

세이디는 메모를 반으로 접고 겉면에 README라고 적었다. 샘이 이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넣으면 화면은 온통 미안해, 샘으로 가득찰 것이다. 만약 샘이 세이디의 사과를 받아들이면 프로그램은 끝난다. 반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프로그램은 샘이 사과를 받을 때까지 반복될 것이다.

 

간호사가 쪽지를 샘의 병실로 가져갔고, 몇 분 후 되돌아왔다. 샘은 쪽지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집에서 세이디는 컴퓨터에 자신이 짠 프로그램을 입력해봤고, 어차피 심각한 구문 에러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게이머 세이디는 그 장면이 성차별적이고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세계의 창조자 세이디는 그 게임이 게임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인물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시절 세이디 같은 여자들은 게임계뿐만 아니라 어떤 곳에서도 성차별자들을 모른 척하도록 길들여졌다—그런 걸 지적하는 건 쿨하지 못했다. 남자들과 어울리고 싶다면, 그들이 내 옆에서 눈치를 보게 하면 안 됐다. 누가 내가 만든 게임의 사운드 효과가 여성 성기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 같다고 하면, 그저 웃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세이디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웬 남자의 페티시 모음집인 게임을 하고 싶진 않은데요.” 세이디가 말했다.

 

“세이디, 이 친구야, 그건 이 세상 게임의 99퍼센트에 대한 묘사야. 하지만 저 가슴은 좀 너무했어, 그건 인정하지. 저러고 어떻게 안 넘어지고 다니지?” 도브가 말했다. “그래도 고지마는 놀라워.”

 

“그야 그렇죠.” 세이디는 게임 캐릭터를 환기구로 쑤셔넣으며 말했다.

 

 

 

패션 센스에 대해 말하자면 샘은 아트풀 다저 시기의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보였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남부 캘리포니아 출신이고 소매치기가 아니라 막내 마리화나 딜러라면. 다갈색 곱슬머리는 가운데 가르마를 탔고 어깨 바로 위에서 뚝 잘랐다. 존 레논 스타일의 싸구려 금속테 안경을 썼고 멕시코에서 파는 엉성한 마직 줄무늬 파카를 입었다. 청바지는 구멍이 났고 흰색에 가깝게 바랬으며, 두꺼운 흰색 운동양말에 테바 스포츠 샌들을 신었다. 

 

 

 

“난 뭐가 문제야? 왜 난 햄릿이 아니라 레어티즈야?”

 

마크스가 그 질문을 던졌을 때 감독 친구는 불편하고 거북해 보였다. “네 특질이 그래.” 친구가 말했다. “내 특질이 어떤데?” 마크스는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가령, 네 카리스마라든가 그런 게.” “내 카리스마가 어떤데?” 친구는 킥킥거렸다. “여보게, 그 얘긴 좀 나중에 하세나. 나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 “나 진지하다.” 마크스가 말했다. “알고 싶다고.”

 

친구는 양손 검지를 들어 마크스의 양쪽 눈꼬리에 대고 옆으로 쭉 찢었다. 동양인의 눈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랬다가 거의 1초도 안 되어 금방 놓았다. 친구는 사과하듯 킥킥거렸다. “미안해, 마크스. 나 지금 졸라 취해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겠네.”

 

“야, 이건 좀 아니지.” 마크스가 말했다. “빌어먹을 넌 너무 아름다워.” 그러면서 감독 친구는 마크스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크스는 그 친구가 그런 인종차별적 표현으로 알려준 게 고마웠다. 이젠 명확히 보였다. 불가해하고, 다가가기 어렵고, 신비롭고, 낯설고 기이한 마크스의 특질은—맙소사—그의 아시아성이었고, 그건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다. 대학 연극 무대에서조차, 동양인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은 그 정도밖에 없었다. 

 

 

 

샘이 촛불 열 개를 불어 껐고, 메리 루 레턴은 마루 종목에서 십 점 만점을 받았다. 샘은 자신이 정확한 순간에 열 개의 촛불을 불어 끔으로써 메리 루가 십 점 만점을 받게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샘은 세상이 루브 골드버그 장치*라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전설에 의하면—저렴한 호텔 앞 회전 광고판에 대한 얘기치곤 지나치게 거창했지만—해피 풋과 새드 풋 중 어느 면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그날의 운이 결정된다고 했다. 1년이 넘도록 샘은 항상 새드 풋하고만 마주쳤다. 반대편을 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써봤다. 광고판에 접근하는 속도를 다양하게 조절했다. 차로도 가보고 도보로도 가봤다. 네 가지 다른 방향에서 전부 시도해봤다. 그러나 순서와 방법을 어떻게 바꿔봐도 어김없이 새드 풋이었다. 이것이 통계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한 결과라는 건 하버드에서 수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고, 샘은 우주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크스는 조이에게 입맞춤을 했다. 감귤향과 계피향이 났고,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이 동했지만 아직 조이는 한창 일하는 중이었다. “오늘밤은 완전 레이디 맥베스시네요. 나랑 같이 캘리포니아에 가고 싶어서 그 모든 꾀를 낸 거야?”

  “뭐, 그치, 부분적으로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맞는 행동방침이기도 하지.” 조이가 말했다.

 

 

 

“닌텐도가 〈동키콩〉에서 제일 잘한 게 뭔지 알아?” 세이디가 물었다.  “악당 이름을 따서 제목을 지었다? 참신하게 나무통을 무기로 썼다?” “넥타이야. 동키콩이 악당에서 히어로로 바뀐 〈동키콩 컨트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넥타이가 없었지만.” 세이디가 말했다.

 

“히어로는 넥타이를 매지. 그쪽이 더 교양 있잖아.” ‟어쨌든 영리한 디자인이었어. 그게 없었으면 놈의 거시기가 늘 문제시됐을걸.” “말 되네.” 

 

 

 

“내가 죽을까봐 걱정돼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샘이 말했다. “아니. 넌 절대 안 죽어. 만약 죽으면 난 게임을 다시 시작할 거야.” 세이디가 말했다.

 

“샘이 죽었다. 계속 하려면 동전을 넣으시오.”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가시오. 그렇게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끝내 우리가 이기는 거지.” 세이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샘에게 물었다. “겁나?”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순서다. 게임 내부의 알고리즘도 있지만, 게이머 또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플레이 알고리즘을 생성해야 한다. 모든 승리에는 밟아야 할 순서가 있다. 어떤 게임이든 플레이하는 최적의 길이 있다. 애나의 사망 이후 침묵의 몇 달 동안, 샘은 강박적으로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재생한다. 만약 애나가 〈프레스 댓 버튼!〉 일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새 차를 살 돈이 없었다면. 새 차를 샀지만 저녁을 먹고 나서 곧장 집으로 향했다면. 첫번째 애나 리가 그 빌딩에서 뛰어내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만약 애나가 코요테를 친 후에 운전을 멈추지 않았다면. 비상등 버튼을 발견했다면. 만약 애나가 조지와 자지 않았다면. 샘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날 밤 어머니가 죽지 않는 길은 무한히 많았고 죽는 길은 딱 하나였다고, 샘은 결론을 내린다.

 

 

 

메이플타운의 첫번째 레벨은 병원 밖에서 진행된다. 앨리스는 고등학교 육상경기대회 허들 부문에 출전한다. 앨리스는 전국 최상위권 선수이며 우승이 예상된다는 텍스트창이 뜬다. 관중이 응원하기 시작한다. 앨리스의 남자친구와 두 아버지가 관중석에 있다.

 

마크스는 시합에 나가 달렸고, 앨리스가 허들을 만날 때마다 점프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졌고, 그다음에 또 졌고, 세번째에도 졌다. 마크스는 샘을 돌아보았다. “내가 뭐 잘못하고 있어?”

 

게이머가 아무리 잘 달려도 앨리스는 매번 질 것이다. 앨리스의 폐에서 자라고 있는 종양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지만, 앨리스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앨리스가 질 때마다 게임을 다시 시작할 것인지 게이머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게이머는 첫 레벨에서 절대 ‘이기지’ 못한다. 이기는 법은, 세상에는 이기지 못하는 시합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사가 샘에게 말했다. “좋은 소식은, 그 통증이 환자분의 머릿속에만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나도 내 머릿속에 있는데요, 샘은 생각했다.

 

샘은 발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은 프로그램상의 기초적인 오류였고, 샘은 머리 뚜껑을 열고 두뇌를 꺼내서 그 불량 코드를 삭제하고 싶었다. 불행히도, 인간의 두뇌는 애플의 맥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폐쇄적인 시스템이었다. 

 

 

 

아베의 집은 깔끔하고 샌들우드향이 났으며, 천 개쯤 되는 레코드판이 하얀 이케아 선반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아베의 컬렉션에는 LP판도 있었지만, 그가 심혈을 기울여 모은 것은 45RPM 싱글판이었다. 그는 B면을 사랑했고, A면과 B면에 얽힌 역사를 사랑했는데, 그것은 세이디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얘기였다. 아베가 설명하길 원래 레코드회사들은 히트곡을 A면에 싣고 인기가 덜한 곡을 B면에 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밴드 내 분란을 조금이나마 잠재우기 위해 두 면을 더블 A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베의 말에 의하면,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는 누구의 곡을 A면에 넣을지를 두고 서로 첨예하게 날을 세웠다. 예를 들어 매카트니의 〈Hello Goodbye〉(A) VS 레넌의 〈I Am the Walrus〉(B)가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더블 A면 따윈 없어. A면이 누가 뭐래도 A면이지.” 아베가 말했다. “어느 음흉한 레코드회사가 아무리 안 그런 척해도.”

 

아베와 세이디는 마리화나를 피웠다. 아베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싱글판 중 하나인 비치 보이스의 〈God Only Knows〉를 틀었고, 그 곡은 〈Wouldn’t It Be Nice〉의 B면이었다. 아베는 B면이 A면보다 더 의미 있고 유명해진 경우를 특히 좋아했다. “믿어져? 〈Wouldn’t It Be Nice〉가 〈God Only Knows〉보다 더 좋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니?” 아베가 말했다. 

 

 

 

내가 뭘 하고 살았더라? 남의 게임 개발 작업. 몽환 개선 작업. 관심 없는 일들에 대한 끝없는 회의. 주말에는 (거의) 어마어마한 양의 마리화나 피우기. <그랜드 테프트 오토> <하프 라이프> <마리오 카트> <파이널 판타지> 게임하기. '해리 포터' 시리즈나, 오프라 윈프리가 세이디의 엄마에게 추천한 책 아무거나 읽기. 한창 근무중이어야 할 오후시간에 몰래 회사를 빠져나가 할머니와 영화 보기ㅡ프리다는 '비운의 이교도 금발 아가씨들'이 소소한 재난을 겪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했다. 어느 품종의 개를 키울까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안 하기. 예전 라이벌들, <세계의 양면>과 같은 시기에 출시된 게임들 검색하기. 자기 게임에 대한 온라인 리뷰 읽기(그러면서 안 읽는다고 우기기). 대체로, 강박적으로 상처를 핥고 보듬기. 이 표현의 역설적 쓰임이 참 이상하다고 세이디는 생각했다. 상처를 핥으면 덧나기만 할 뿐이다. 안 그런가? 입은 박테리아의 온상지다. 하지만 인간은 제 참상과 주검의 맛에 쉽게 중독되기 마련이다.

 

 

 

"절대 절대 절대 마크스랑 자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하지 마." 미도리가 경고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쟤는 저 눈빛과 저 머릿결로 널 그윽하게 바라볼 거고, 그럼 넌 쟤가 무해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섹시하네, 쟤랑 자야겠어, 하고." "마크스를 알고 지낸 지 6년째인데 설마 그런 일이 생기겠어." 세이디가 말했다.

 

오, 그러나 세이디 그린은 게이머였다! 게임에서는 어떤 문을 열지 말라는 경고가 나오면 반드시 그 문을 열고야 만다. 만약 잘 되지 않으면, 언제든 세이브 포인트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

 

 

 

게임을 MMORPG로 전환하는 작업은 세이디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방대했다. 세이디의 은유법을 빌리자면 경매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낙찰 받은 다음 그 집을 배에 실어 외국으로 옮기고, 일단 외국까지 갖다놓고 보니 내가 마음에 들어한 건 사실 집 자체가 아니라 집을 지은 재료였다는 결론이 나와서, 그 집을 공들여 하나하나 분해한 후 완전히 새로운 집으로 다시 짓는 작업이었다.

 

 

 

매물 목록에 그 집은'보헤미안 드림'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었고, 보헤미안이란 '앞으로 들 수리비를 생각하면 가격에 거품이 낀'이라는 뜻이었다.

 

 

 

마크스가 값비싼 싸구려 샴페인을 한 병 주문하자 샘 못잖게 일장연설을 좋아하는 사이먼이 건배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하루 휴가를 내고 우리의 결혼식에 증인이 되어주신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세 편의 를 제작해주신 데 대해서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제 생각엔 이번만큼은 게임 제목을 '도플갱어 하이'로 했어야 한다는 데 다들 동의하실 것 같군요." "동의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합니다!" 마크스가 외쳤다.

 

"세간의 통념과 달리," 사이먼이 연설을 이어나갔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독일어는 사실 도플갱어가 아닙니다. '츠바이잠카이트'죠." "또다른 제목 후보가 '츠바이잠카이트 하이'였어요. 제가 뜯어말렸죠." 앤트가 말했다. "고맙네." 샘이 소곤거렸다.

 

'츠바이잠카이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혼자인 듯한 고독감을 말합니다." 사이먼은 고개를 돌려 남편과 눈을 맞췄다. "널 만나기 전까지 난 끊임없이 츠바이잠카이트에 시달렸어. 가족과 친구들, 그때까지 만난 애인들과는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웠어. 너무 자주 그런 느낌이 들어서 난 그게 생의 본질인 줄 알았어. 살아 있다는 건 근본적으로 혼자임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했어." 사이먼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알아, 난 구제불능이고 넌 독일어도 결혼도 안 좋아하지.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야. 사랑해,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앤트가 잔을 들며 말했다. "츠바이잠카이트." 사이먼이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잘하는 건 아니었고, 사실 츠바이잠카이트는 어이없게도 완전히 다른 뜻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파티 참석자들 중에서 독일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 서, 이 도둑놈!” 속이 텅 빈 너의 새 뼈를 관통하는 총알이 느껴진다. 민들레 홀씨가 산개하듯 갈색과 베이지색 깃털이 폭발한다. 새빨간 열매 위에 새빨간 피가 튀지만 테트라크로맷인 너에겐 두 가지 빨강이 뚜렷이 구분된다. 너는 흙으로 떨어진다. 들릴락 말락 탁 소리, 오직 네 눈에만 보이는 미약한 먼지 구름.

 

또 한 발.

 

또 한 발.

 

너의 날개가 파닥인다. 너는 그것을 불수의적 사후 경련이 아니라 날기 위한 시도로 해석하기로 한다.

 

몇 시간 후 너는 누군가가 네 손을 잡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말은 곧 너에게 손이 있다는 뜻이며, 그 말은 곧 너는 새가 아니라는 뜻이고, 그 말은 곧 네가 LSD처럼 매우 독한 약물을 맞고 있다는 뜻임이 분명한데, LSD는 조이가 이용법을 완벽히 숙지하고 있다면서 늘 같이 하자고 졸랐어도 절대 손대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너는 여러 모순되는 비애를 느낀다. 날 수 없다는 설움, 조이와 LSD를 하지 않았다는 아쉬움, 그리고 이런 우울감. 

 

 

 

“너랑 결혼하려면 내가 혼수상태에 빠지기만 하면 되는 거였네. 이렇게 쉬운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나는 너희 둘 다와 게임을 만들어.” 네가 지적한다. “‘이치고’란 제목부터 내가 지었지. 나는 그 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너희 둘과 함께 걸었어.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텐데." “그래, 너도 있었지, 근데 넌 근본적으로 안 중요해. 네가 아닌 누구라도 대신할 수 있었을걸. 넌 말을 길들이는 자야. 너는 NPC야, 마크스.”

 

NPC는 게이머가 플레이할 수 없는 캐릭터다. 프로그램된 세계가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돕는 인공지능 엑스트라다. NPC는 절친한 친구, 말하는 컴퓨터, 아이, 부모, 연인, 로봇, 무뚝뚝한 소대장, 악당, 뭐든 될 수 있다. 그러나 샘은 그 단어를 욕으로 썼다—네가 중요하지 않다고 한 데 더하여, 샘은 네가 따분하고 예측 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거다. 그러나 사실 NPC들이 없는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NPC 없는 게임은 없어.” 네가 말한다. “그랬다간 얘기할 상대도 없고 할일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허풍쟁이 영웅만 남겠지.” 네가 말한다. 

 

 

 

그나저나 세이디는 임신했다. 너는 아이를 원했지만 그래도 세이디의 몸이므로 세이디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너는 각종 장애 요소와 부담 요소를 점검했다. 일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 그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검토했다. 너는 게임 프로듀서이므로 제작을 고려중인 게임을 검토할 때와 마찬가지로 스프레드시트를 작성했다. 장단점, 노동 분업, 잠재적 위험 요소, 비용, 이득, 마감 기한, 출하품을 목록화했다.

 

너는 네가 작업한 문서를 랩톱에 띄워 세이디에게 보여주었다. “우리의 가설적 아이가 문서1.xls로 불리는 건 좀 아니지.” 세이디가 한마디했다. 세이디는 스프레드시트의 제목을 수정했다. ‘그린 와타나베 2006년 여름 게임 프로젝트’. 

 

 

 

전 애인을 친구로 만드는 방법은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며, 관계의 한 시기가 마무리되고 다른 형태로 넘어갈 수 있는 때를 아는 것이다. 사랑은 상수인 동시에 변수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복숭아는 말도 안 되게 크고 실하며 말랑말랑하다. 이 복숭아들은 운송의 무례함과 슈퍼마켓 선반의 모멸감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샘은 자신의 몸이 기본 방향으로만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식 조이스틱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장애를 들키지 않는 방법은 장애인처럼 보이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었다. 울퉁불퉁한 지형, 낯선 계단, 가장 아날로그적인 형태의 놀이. 

 

 

 

두 사람이 친구로 지낸 총 날수를 계산하려면 데이터상 시작점이 필요했다. 일단 둘이서 마크스의 죽음을 리허설했던 그날 저녁으로 정하니 4873일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샘은 보통 숫자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숫자는 마크스가 샘의 삶에서 차지했던 존재감을 고려했을 때 너무 별 볼 일이 없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샘은 확인차 두 번 계산을 해봤다. 4873이 맞았다. 샘은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이런 소소한 산수를 했다.

 

사천팔백칠십삼은, 샘은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돈 많은 열일곱 살짜리의 은행계좌에 들어 있는 액수, 타이태닉호 승선객 수의 두 배, 모두가 서로를 알고 지내는 마을의 인구수,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1990년의 랩톱 가격, 청소년기 코끼리의 체중, 내가 어머니와 살았던 날수보다 6개월 남짓 많은 날수. 

 

 

 

“게임이 뭐겠어?” 마크스가 말했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좋은 시도였어, 멋지네.” 세이디가 말했다. “자, 다음.” 

 

 

 

“결국 사랑이 뭐요?” 앨러배스터가 말했다. “다른 이의 인생 여정을 편하게 해주려고 진화론적 경쟁력을 포기한다는 비이성적 욕구를 빼면?” 

 

 

 

도브와 세이디는 실버레이크의 클리프에지에서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레스토랑은 꼭 나무 위 집처럼 생겼다—숲의 거인족 엔트처럼 생긴 거대한 고무나무가 한가운데 솟아 있고, 그 주위를 층층이 둘러싼 덱 위에 테이블들이 놓였다. 이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어마어마한 장딴지 근력과 균형 유지 신공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세이디는 클리프에지의 직원으로 일하는 건 플랫폼 게임에서 지루한 레벨만 계속 하는 캐릭터와 비슷할 거라고 종종 생각했다.  

 

 

 

같은 지역 내에서 〈동키콩〉 오락기를 찾으면 더 싸게 구할 수 있다. 운반에 드는 비용이 대단히 절약될 것이다. 하지만 그 오락기의 메모리는 이것과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 K타운의 윌셔 대로에 있는 동&봉 뉴욕스타일 피자하우스에서 최고 점수를 기록한 〈동키콩〉 플레이어는 S.A.M.이라는 이니셜을 쓰는 사람이란 것을 그 오락기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기계가 케임브리지에 도착했을 때, 오락기는 여전히 잘 작동했지만 최고점 기록은 지워져 있었다. 이런 초기 오락기들의 메모리는 불안정했고, 지워지지 말아야 하는 정보가 날아갔다. 백업 배터리는, 그런 게 있었다 한들, 오래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동현의 오락기가 이제는 텅 빈 명예의 전당 화면을 로딩했을 때, 세이디는 여전히 어렴풋이 S.A.M.을 볼 수 있었다. 그 점수가 워낙 오래 자리를 지킨 탓에 모니터에 번인 자국이 남았던 것이다.

 

   

 

세이디는 건물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깊고 푸른 벨벳 같은 밤이었고, 불가사의할 정도로 둥근 보름달이 밤하늘에 무겁게 걸려 있었다. “이 엔진은 누가 개발했는지 궁금하다.” 세이디가 말했다.

 

“잘 만들었네.” 샘이 말했다. “광원 효과도 멋지게 살렸고, 근데 달이 너무 호화로운걸. 스케일이 좀 안 맞는 것 같아.” “너무 크고 낮지? 그리고 텍스처가 좀더 필요해. 펄린 노이즈를 약간 더 넣고. 좀더 거칠거칠하게 보여야지, 안 그럼 진짜 같지가 않잖아.” “근데 저게 개발자들이 의도한 모습 아닐까?” "그런가."

 

 

 

샘은 세이디가 연결통로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후 디스크를 내려다보았다. 게임 제목은 ‘루도 섹스투스(여섯번째 게임)’였다. 세이디가 손글씨로 제목을 써놨다. 샘은 어디서든 세이디의 손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