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밤에 고하는 말, 매트 헤이그
집에 있는 동안엔 편두통이 도졌을 때 하는 것처럼 집 안을 어둡게 하고 최대한 많이 누워 있었다. 처음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아팠던 20대 이후로 줄곧, 나는 ‘회복’하려면 일종의 생활 개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치워버리기.
미니멀리즘 신봉자인 사사키 후미오의 표현에 따르면 ‘덜 소유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처음 발작이 찾아왔던 초기에 내가 치워버린 건 술, 담배, 독한 커피 정도뿐이었지만, 그 후로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런 것들보다 좀 더 ‘전반적인 과잉’이 진짜 문제라는 걸 안다.
삶의 과잉.
물론 테크놀로지의 과잉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회복 과정에서 내가 접속한 테크놀로지라면 (자동차와 오븐레인지를 제외하고) 유튜브의 요가 비디오뿐이었다. 심지어 그것도 아주 희미한 밝기로 시청했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순 없다. 핸드폰과 달리 불안에는 ‘밀어서 끄기’ 기능 따위는 없으니까. 하지만 기분이 더 나빠지는 건 멈췄고, 그렇게 정체기를 보내고 며칠이 지나니 만사가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회복으로 가는 익숙한 길이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각종 자극제(술과 카페인을 비롯해 위에서 언급한 것들)를 자제하는 것 역시 회복 과정의 일부다.
그렇게, 나는 다시 홀가분해졌다.
나는 이 책에서 ‘세상은 엉망진창이고 우리는 다 망했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임무는 이미 트위터가 잘 맡아서 하고 있다.
자살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표현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흔히 자살을 ‘저지르다commit’라는 동사로 표현할 때가 많다. 이 표현에는 ‘금기’와 ‘범죄성’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실제로 자살이 범죄였던 시대의 흔적인 셈이다(나는 최근에 ‘자살을 저질렀다’ 대신 ‘자살로 인한 죽음’이라는 표현을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여전히 입에 잘 붙지도 않고 좀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생각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삶은 새의 알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 데다 신성하고 귀하기까지 한 것인데, 이런 삶을 누군가가 스스로 포기하기로 선택했다고 해서 자살을 선택의 문제로 치부하는 건 우리 모두에 대한 일종의 모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자살이 그렇게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자살이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운데도, 살아 있음으로 인한 새로운 고통이 더 끔찍해서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에 대해 말하는 건 불편하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 수치심과 침묵을 조장하는 환경 때문에 사람들은 올바른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더 비정상적이고 기이한 양상의 외로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결과가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병’과 ‘환자’를 동일시하는 습성을 버려야 한다. 사람들 각자가 느끼는 서로 다른 무게에 따라 그들에 대한 이해도 좀 더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걸어서 상점까지 가는 행위가, 1톤짜리 투명 역기를 항상 지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1톤만큼의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물체는 다른 것을 만질 수 있어선 안 된다. 살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말했다. 분명 안 좋은 한 주를 보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를 만진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다. 그것들이 마치 살아 있는 짐승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슈퍼마켓에 있는 물체들도 그냥 평범한 물건은 아니다. 그것들은 '상표화된' 물건들이다. 상품 자체가 물리적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브랜드는 정신적 공간을 공략한다. 브랜드는 어떻게든 우리의 머릿속으로 파고들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오로지 이 과제만을 수행하는 마케팅 심리전문가를 고용한다.
상상해보자.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마다 그 감정의 무게를 측정하는 방법을 만들어놓으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의 정신과 신체를 연결 짓는 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자기 자신의 스트레스의 실체를 깨닫고 거기에 좀 더 잘 대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상상 속의 단위를 만들어 나는 '마음 소요량pg.psychograms'이라고 이름 붙였다.
지하철 타고 출근하기 1.298pg
거래처에서 걸려온 전화 받기 182pg
구직 면접 458pg
뉴스 시청 222pg
회신하지 않은 메일로 가득 찬 받은메일함 321pg
아무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은 내 트윗 98pg
운동하러 안 간 것에 대한 죄책감 50pg
거울 속의 내가 얼마나 늙었는지 유심히 살펴보기 177pg
어제 올렸던 SNS 피드에서 발견한 오탈자 82pg
최근 나타난 신체적 이상 증상을 포털에 검색하기 672pg
온라인 싸움꾼과 한판 붙었을 때 632pg
어색한 데이트 317pg
지나치게 많이 나온 카드 값 815pg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압박감 701pg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수많은 목표 1.293pg
이 마음 소요량 측정법은 아주 주관적인 데다 변동 폭도 매우 심하다. 내 마음을 지하 100미터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들을 인식할 때마다, 나는 반대로 내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것들도 있다고 상상한다.
구름 뒤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태양 -57pg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 -320pg
와이파이 없는 곳에서 보내는 휴가 -638pg
강아지와 산책하기 -125pg
요가 수련 -487pg
좋은 책에 빠져 무아지경 되기 -732pg
고달픈 기차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 -398pg
자연에 둘러싸여 있을 때 -1,291pg
춤추기 -1,350pg
가까운 친척이 수술 후 회복 중일 때 -3,982pg
나는 이것을 ‘마이너스 마음 소요량’이라 부른다. 당신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것들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우리가 탈공업화 사회(지식정보화 사회)로 깊숙이 접어들고 있으며 그 변화의 속도가 지금까지보다 더 빨라지고 있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빠른 걸까? 인텔의 공동창립자이자 바로 이 현상을 예언한 장본인인 고든 무어의 이름을 딴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컴퓨터의 성능은 몇 년마다 두 배씩 향상된다. 이 기하급수적인 기술 발전 덕분에 우리 주머니 속의 조그만 스마트폰이 1960년대의 창고 크기만 한 컴퓨터보다 훨씬 더 높은 성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급속도의 성능 향상은 단지 컴퓨터 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데이터를 담고 있는 아주 작은 비트부터 인터넷 대역폭으로 처리 가능한 대량의 데이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기술적 기기나 수단 전반에 걸쳐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기술이 단순히 발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의 속도 역시 가속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발전이 발전을 증식시키는 셈이다.
이제는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할 때도 컴퓨터를 활용하며 인간의 개입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런 진보와 함께 많은 사람이 ‘특이점’에 대한 우려를(혹은 기대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이 특이점을 비현실적 몽상이나 악몽의 대상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특이점이란 인공지능이 인류 최고의 지적 능력을 능가하는 변곡점을 뜻한다. 그 기점을 지나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낙관론 대 비관론의 비율에 따라) 우리 인간은 기술과 융합하여 함께 발전하고 마침내 불멸의 행복한 사이보그가 되거나, 생각하는 로봇, 노트북, 토스터의 지배를 받으며 그런 기계의 애완인간, 또는 노예, 또는 코스요리 처지로 전락할 것이다.
어느 쪽일지 누군들 알겠는가.
대충만 생각해봐도, 2000년에는 ‘셀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구글은 그냥 존재하는 정도였지 ‘구글’이라는 말 자체가 동사로 쓰이기까지는 아직 먼 길이 남아 있었다. 유튜브도 없었고 브이로그라는 것도, 위키피디아도, 왓츠앱도, 스냅챗도, 스카이프도, 스포티파이도, 시리siri도, 페이스북도, 비트코인도, 트위터 사진 업로드도, 넷플릭스도, 아이패드도, ‘ㅋㅋㅋ’도,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나는 얼굴 이모티콘도 없었다. 위성 내비게이션을 소유한 사람도 거의 없었고, 사진을 볼 땐 사진첩을 책장처럼 넘겨가며 봤다. ‘클라우드’는 비를 내리게 하는 물질을 지칭하는 단어로만 쓰였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글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시대에 뒤지게 될지 느껴지는 것 같다. 겨우 몇 년 후에 다시 보면, 위에 나열한 목록에서 누락된 것들이 민망할 정도로 늘어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곧 출시될 테크놀로지 브랜드와 발명품이 얼마나 많겠는가.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기술이라는 것이 불과 몇 년 만에도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시대에 뒤처지는가. 팩스기, 구형 핸드폰, CD, 전화회선으로 연결하던 모뎀, VTR 또는 VHS 비디오테이프, 최초의 전자책 단말기, 야후의 지오시티(웹호스팅 서비스)나 알타비스타 검색 엔진 같은 것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이런 흐름으로 봤을 때 당신과 내가 특이점에 대해 어떤 관점의 미래상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이 두 가지만은 확실하다. 첫째, 우리 삶은 유례없을 정도로 기술 친화적이 될 것이다. 둘째, 기술 변화는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며 빨라지기만 할 것이다.
가끔 내 머리가 컴퓨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수히 많은 윈도우 창이 화면 가득 열려 있는 컴퓨터. 온갖 폴더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바탕화면. 내 안에는 동그란 무지개색의 로딩 중 아이콘 같은 것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 한다. 수없이 열려 있는 윈도우 중 몇 개라도 닫아버릴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바탕화면을 꽉 채운 아이콘을 몇 개만이라도 휴지통 속으로 던져 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면 나도 좀 괜찮아질 텐데. 하지만 다들 하나같이 너무 필요해 보이는데, 어느 창을 닫을지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이 세상이 이미 과부하 상태인 마당에 내 정신이 과부하되는 걸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우리는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해서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데,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우는 전원을 다시 켜려면, 가끔은 이런저런 스크린을 꺼버릴 수 있을 만큼 용감해져야 한다.
재접속을 위해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한다.
이 세상은 몇몇 측면에선 아주 빠른 진전을 이뤘다. 하지만 그런 변화속도가 우리 모두를 대단히 평온하게 해주지는 못 했다. 게다가 어떤 변화는, 특히 기술을 활용한 변화들은 그 외의 변화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ㅡ 정치.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 이 현상은 부분적으로는 소셜 미디어의 에코 체임버와 키보드 워리어들의 싸움터에서 증폭된다. 에코 체임버나 워리어 구역에서는 타협이나 합의, 객관적 사실 같은 것들은 완전히 구시대적 개념으로 여겨진다. 미국 사회학자 셰리 터클의 말을 인용하자면 "기술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지고, 같은 인간에 대한 기대는 점점 줄어드는" 공간이며,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남들에게 자신을 공유해야 하는 그런 세상이다. 물론 이런 변화에 좋은 측면도 있었다. 뭐든 급속히 퍼지는 인터넷의 속성 덕에 다수에게 대의명분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짜 뉴스, 정치적 악의성을 지닌 정보, 대규모의 온라인 개인 정보 유출 등의 횡행은 우리의 정치를 괴상하고 불가역적인 방향으로 조종하며 변형시키고 있다.
에코 체임버 효과Echo Chamber Effect : 반향실 효과. 갇힌 공간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비슷한 입장의 커뮤니티에서 유통되는 정보만 공유/ 전달/ 증폭되어 기존 신념이 더 강화되는 현상.
ㅡ 일. 로봇과 컴퓨터는 인간의 일을 빼앗고, 고용주들은 사람들의 주말을 빼앗고 있다. 고용은 비인간적 과정이 되고 있다. 일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간이 일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형국이다.
ㅡ 소셜 미디어. 미디어의 소셜화는 급속도로 우리 삶을 집어삼켰다.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콘텐츠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잡지나 마찬가지다. 그게 과연 건강한 활동일까? 소셜 미디어 가입자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하고 사용하는 등의 윤리적 위반 사례도 점점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런 문제 외에도 우리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문제도 많다. 마치 감자가 감자칩 행세를 하듯 우리도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된 상태로 전시해야 한다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최고로 멋져 보이고 신나게 사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 한다면 심리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ㅡ 언어.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영어는 지금까지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의사소통의 보조 수단이 채팅 용어나 초성체, 약어, 이모티콘이나 '움짤' 등의 생성과 진화는 기술 발전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준다(더불어 생각해보라. 수 세기 전엔 인쇄술이 철자법과 문법의 표준화를 이끌었다). 따라서 이제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뿐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도 중요해졌다. 수백수천만 명의 사람이 이제는 대면 대화보다 문자메시지로 더 많은 소통을 주고받는다. 이 현상은 단 한 세대 만에 벌어진 사상 초유의 변화다. 이 변화 자체가 나쁘다고까지 할 건 없지만, 확실히 획기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ㅡ 환경. 일부 과학자들은 우리 행성이 질적으로 새로운 지질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2016년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세계지질과학총회International Geological Congress에서 몇 명의 선도적 과학자들은 우리가 홀로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 즉 인류세로 이미 들어서는 중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급격한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 해수면 상승, 해양 오염, 플라스틱 증가(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플라스틱 생산은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20배 증가했다), 수많은 생물종의 멸종 가속화, 삼림 파괴, 공장식 농어업, 도시개발 등의 현상을 우리 지구가 새로운 휴지기에 이미 도달했다는 증거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현대 생활은 사실상 이 행성을 천천히 '끝장내고' 있다. 사회가 이렇게 유독성을 띄고 있으니 지구뿐 아니라 우리까지 망가지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홀로세Holocene : 마지막 빙하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던 약 12,000년간의 시기.
인류세Anthropocene : 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켜 만들어진 새로운 지질시대.
행복이 뭘까. 어쩌면 행복은 우리 각각의 개인과는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향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 우리가 '베풀 수 있는 것'과 상관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정해진 방법이 없는 커다란 '어쩌면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에밀리 디킨슨이 말했듯 "수많은 지금이 모여 영원이 되는 것"이라면, 그 수많은 '지금'을 이루는 것은 수많은 '어쩌면'들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삶의 핵심은 확실성을 포기하고 삶 자체가 지닌 아름다운 불확실성을 잠자고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우리는 불행을 영업당하고 있다. 왜냐, 불행이야말로 돈이 몰리는 곳이니까. 현대인들에게 가장 장사가 잘되는 것들의 핵심은 결국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영국 패션잡지 <보그>에서 패션 디렉터로 25년간 일했던 루신다 챔버스는 일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어 자신이 떠나온 업계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패션잡지가 떠들어대는 자기 주도권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누구에게든 자기 주도권을 회복했다고 느끼게 해주는 패션잡지는 거의 없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패션잡지나 웹사이트, 소셜 미디어 계정이 파는 것은 일종의 현실 초월성이다. 활로, 탈출구. 하지만 그 길은 보통 건강한 방향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초월하고 싶게 만들려면 먼저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불만스러워지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특정 모델과 같은 몸매가 되고 싶어 그 모델이 홍보하는 다이어트 책자를 살펴보고, 병에 이름이 박힌 유명인의 이미지를 풍기는 향수 제품을 구매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모든 것에 사람들이 치르는 값은 금전적 대가에 그치지 않는다. 물건을 사면 즉각적인 쾌감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는 있지만, 좀 더 길게 보면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좀 더 화려하고 좀 더 매력적이고 좀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더 키우기만 할 뿐이다.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라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탐내라고, 무지개 너머의 황금단지보다도 더 현실성 없는 그런 삶을 욕심내라고 우리는 자꾸만 충동질을 당한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도록 끊임없이 종용당한다. 우리 몸은 너무 뚱뚱하거나, 아니면 너무 말랐거나, 그것도 아니면 너무 처졌다. 피부는 모름지기 딱 알맞게 '햇살을 머금은 윤기'가 감돌거나, 적정한 밝기의 음영을 갖춰야 한다. 피부 미백 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수십 억 달러에 버금가는 비즈니스가 되었으며 해가 갈수록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있다.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그렇게 괜찮은 수준은 아니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비즈니스 업계가 이용해먹으려는 핵심이다. 비즈니스 마케터 로버트 로젠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14년 당시 로젠탈은 <패스트 컴퍼니>에 기고한 글에서 "성공적인 마케터가 되려면 제품의 특징이 아니라 제품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라고 썼다. 이 정도면 특별한 악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덧붙인 말에 따르면 그 혜택엔 종종 '심리적 요소'가 포함되며, '공포Fear', '불확실성Uncertainty', '의구심Doubt'을 일컫는 FUD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자기 행동 방식을 중단하거나 고민하고 바꾸게 만들려는 의도로 여러 비즈니스에서 공공연히 사용하는 아주 흔한 방식이다. FUD의 세 가지 심리 요소는 매우 강력해서 경쟁자를 상대로 사용하면 핵무기급의 충격을 가할 수도 있다.
광고캠페인이 대놓고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심리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광고에 나오는 아이템이 한 벌의 바지로 얻을 수 있는 '쿨함'이라고 치자. 그러면 우리의 잠재의식은 그 '쿨함'을 소유해야 할 것 같은 압력을 느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느라 많은 돈을 쓰고 난 뒤에는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너무 많다. 물건에 대한 갈망이 물건을 소유한 후 만족으로 바뀌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족하지 못한 우리는 더 많이 갈망한다. 그리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우리는 더 갈망하라고 충동질 당하지만, 그런 갈망은 오로지 더 많은 갈망으로 이어질 뿐이다.
결국 우리는 중독자가 되라고 부채질당하는 셈이다.
사회의 조류가 우리를 특정 방향으로 끌고 가더라도 만약 그 방향이 우리를 불행에 빠뜨려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수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진실을 향해, 수많은 딴짓거리가 숨겨둔 진실을 향해 물을 거슬러 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생사가 거기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인류에 시간 개념이 늘 있었던 건 아니다. 고대에 '5시 15분 전'이라든가 '4시 45분' 같은 개념이 얼마나 무의미했겠는가. 알람을 놓치는 바람에 9시 임원 회의에 지각하게 된 원시인이 스트레스에 찌든 모습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그려진 동굴벽화는 아직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옛날 옛적의 시간은 그냥 두 종류였다. 낮과 밤. 밝은 때와 어두운 때. 깨어 있는 시간과 잠들어 있는 시간. 물론 다른 종류의 시간도 있긴 있었다. 식사 시간, 사냥 시간, 격투 시간, 휴식 시간, 오락 시간, 키스 시간 등. 하지만 이런 시간은 시계에 지배되지 않았다. 시계의 수많은 숫자 조합과 영겁의 눈금에 얽매여 인위적으로 구획된 시간이 아니었다.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급변은 겨우 10년 남짓한 기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며, 좋고 나쁨을 떠나 이런 변화가 온라인상에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894년에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라는 작품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인간이 궁핍에서 점점 더 해방될수록 전신, 전화, 책, 종이, 신문잡지도 점점 더 많아질 것이고, 그럴수록 모순된 거짓과 위선을 퍼뜨릴 방법도 더 많아질 것이고, 그럴수록 인간은 점점 더 분열되고 결국 비참한 존재로 전락할진대, 참말로 우리 눈앞에서 이 모든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그 속도도 너무 빨라서 우리가 변화의 장단점을 미처 살펴볼 틈조차 주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빠를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수많은 것이 도태되어 우수수 사라지고, 숱한 정보가 밀려들고, 온갖 것이 테크놀로지로 얽히고 설켜 있다. '세계의 뇌'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들리긴 해도 지금의 상황에 꼭 들어맞는 비유 같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세계의 뇌 속에 들어 있는 신경세포다.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세포에게 끊임없이 송신해대고 과잉 적재된 온갖 것을 앞뒤로 떠넘긴다. 우리는 멘붕에 빠진 행성에 거주하는 과부하된 신경세포들이다. 언제 터져 버려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신경생물학자들은 '미러링(무의식적 모방)'이 우리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가 서로 교류하는 동안 뇌에서 활성화되는 신경회로의 작용임을 밝혀냈다.
연결의 시대엔 '거울'도 더 커진다. 끔찍한 사건으로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면 그 두려움은 인터넷에서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사람들이 분노하면, 그 분노는 번식하듯 불어난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감정을 드러내면, 그 감정만큼은 비슷하게 느낀다. 가령 온라인에서 벌어진 문제로 누군가가 나에게 미친 듯이 화를 낸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격분한 그의 감정은 십중팔구 나에게 옮겨붙을 것이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매일 이런 일을 목격한다. 사람들은 말싸움을 벌이고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사수하다시피 하면서도, 상대의 감정 상태는 모방한다.
자신의 증상을 구글에서 검색하지 마라. 일곱 시간 동안의 검색 끝에 자신이 저녁밥도 못 먹고 죽게 될 거라고 믿고 싶은 경우가 아니라면.
등급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지 마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얻으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특징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라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그런 그도 굿리즈Goodreads 사이트에서 평균 3.7점의 중간급 별점을 받는다.
"파이프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르네 마그리트는 말했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영원히 좁혀질 수 없는 갭이 존재한다. 내 절친의 온라인 프로필은 실제 내 절친과 다르다. 온라인에 업데이트한 '공원에서 보낸 하루'는 실제 공원에서 보낸 하루가 아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세상에 떠들어대고 싶은 욕망은 내가 지금 얼만큼 행복한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짜 행복은 자기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않을 때 온다.
'기표', '기의' : 소쉬르의 언어학 개념. '기표'는 소리나 글자 같은 기호 형태, '기의'는 소리나 글자로 표현된 의미(관념)를 말한다. 사과(기의)가 우리나라에서는 '사과', 미국에서는 'apple', 독일에서는 'apfel'이라는 글자(기표)로 각각 다르게 표시되는 것처럼,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필연적 상관관계가 없다는 소쉬르의 주장을 빌려 현실과 온라인의 무관함을 비유한 말이다.
우리가 보는 하늘은 그냥 저 바깥에 있는 우리와 상관없는 세상이 아니다. 하늘을 본다는 건 우리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는 것이다. 물리학자 칼 세이건이 자신의 역작 <코스모스>에서 했던 말처럼 "우리 DNA 속의 질소, 우리 이빨에 있는 칼슘, 우리 혈액 속의 철분, 우리가 먹는 사과파이에 들어 있는 탄소는 전부 별들이 폭발하고 죽어가면서 그 안에 있던 물질이 방출되어 만들어지는 원소들이다. 우리는 별의 알갱이들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