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너무도 느리고 희망은 너무도 난폭해, 프랑수아즈 사강
사랑하는 베로니크. 침울한 절망감 속에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우리 가족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고, 최대한 좋게 말해 불확실한데, 어쨌든 2일 이전에는 못 돌아오는 게 확실해. 따라서, 황홀하리라 예측되는 수도원으로 널 보러 가는 게, 매력적이리라 예측되는 너의 테리블 프레르terribles freres를 만나는 게, 번개처럼 빠르리라 예측되는 너의 늙은 말을 타는 게, 이미 끔찍하다는 걸 알고 있는 매력적인 베로니크를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얘기지. 오슈의 아일랜드 상륙작전이 실패한 후 나폴레옹이 말했듯, "내 후회는 무한하다." 사랑하는 베로니크, 진심으로 미안해. 물론 너도 내가 미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만. (p30)
테리블 프레르terribles freres : 무서운 오빠들. 당시 유행하던 '앙팡 테리블'을 변용한 표현.
루이 라자르 오슈Louis Lazare Hoch : 프랑스 대혁명기의 군인. 1792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에 종군했고 1796년 아일랜드 원정군 사령권으로 임명되어 브레스트 항을 출항했으나 폭풍우로 함대가 흩어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어떻게 지내고 있어? 많이 보고 싶어. 내가 여기서 보내는 바보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생활이 너를 기쁘게 할지도 몰라. 필리프는 나보다 훨씬 많이 마시고, 나보다 조금 더 먹고, 우리가 빌린 플리머스를 훨씬 더 빨리 몰고, 살짝 미치광이이면서도 다정해. 하여튼 필리프는 스물네 살이고 문학을 비웃지. 사강은 멀리 있어. 모든 게 다 괜찮아. 나는 건강도 잘 챙기고, 아침에는 수상스키를 타고(지금은 아주 잘 타), 삼나무 사진을 찍고, 오후에는 당나귀 사진을 찍고, 저녁에는 술에 취해 춤추고, 밤에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젊은이들처럼 길거리를 누비고 다녀.
완벽해. 그래도 나를 잊지는 마. 이번 겨울은 나쁘지 않을 거야. (p46)
필리프 카르펜티에르Phillippe Charpentier : 사진작가이자 사강의 연인.
플리머스Plymouth : 1928년부터 2001년까지 크라이슬러와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 제조하던 자동차 브랜드.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일광욕을 하고 있어. 나중에 너랑 같이 이곳에 와야 할 것 같아. 나는 1일에 파크 애비뉴 34번가의 뉴욕 밴더빌트 호텔로 돌아가. 그쪽으로 편지해. 내가 너에게 필명을 하나 만들어주려는데, 내가 지금까지 본 성性은 하나같이 애매하기 짝이 없지 뭐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 부모님을 스위스나 이누이트 사람으로 만들고, 듀튼이 네가 쓴 글에 돈을 지불하게 하는 일이야. 그건 정말 쉬운 일이야. 나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2위, 뉴욕에서는 1위를 달리고 있고 달러 돈방석 위를 뒹굴고 있거든.
윌도프에 살면서 내가 지명하는 남자친구들을 만나며 자유롭게 지내는 건 네게도 엄청나게 재미난 일이 될 거야.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p58)
듀튼Dutton : 사강 작품을 출간하는 미국의 출판사.
윌도프Waldorf : 맨해튼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로, 당시에는 세계 최대의 호텔이었음.
네가 많이 보고 싶다. 브뤼노, 쉬즈, 나, 우리 모두 네 얘기를 자주 해. 이곳에서 함께 웃을 수도 있었는데, 미치겠다.
돌아가면 우리 열심히 토론하자. 미국과 우리에 대해서. 왜냐하면 내가 너를 잃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구멍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그건 아마 내 잘못일 테고, 그래서 신경 쓰여.
나와 함께 프랑스 남부에서 열흘 보낼 수 있게 일정을 조정해줄래? 나는 1월 초에 거기 있을 거야. 내일은 뉴욕, 뉴욕 시 파크 애비뉴 34번가 밴더빌트 호텔에서 다시 집결할 거야. 그쪽으로 편지하고, 날 잊지 마. 곧 보자. (p62)
추신.
말론 브랜도를 봤어, 푸른 눈에 대단히 영민한 사람이야. (p64)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 : <대부>, <지옥의 묵시록>으로 유명한 미국의 배우.
다카르에는 헤이그가 있지만 볼링은 없어. 그대신 바다가 있지, 하지만 레스키나드는 없어. 결론은? 난 25일 아침에 돌아가. 사랑해, 오랜 친구. 쇼크Chocques에서 너에게 전화할게. (p66)
헤이그Haig's : 딤플 위스키의 시초.
볼링Bowling : 버번 위스키의 일종.
레스키나드L'esquinade : 프랑스 남부 칸 서남쪽에 있는 해변.
우리 엄마는 오토바이를 한 대 가지고 있는데 이상하게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현상을 보이며ㅡ클러치에 대한 그녀 나름의 개념이 있어서ㅡ 그냥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어. 이제 줄리아에게 가르쳐주는 수밖에. 오토바이 뒤를 따라 달려가면서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아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느끼며 "클러치, 핸들, 클러치!"하고 소리치는 건 정말이지 진빠지는 일이야. (p68)
이제 널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 네 편지를 필두로 해서 말이지. 날씨는 화창하고 우리는 작은 바닷가재를 먹고, 그레이엄은 망아지처럼 걸어가고, 나는 네가 많이 보고 싶어. 곧 보자, 프랑수아즈. (p69)
그레이엄Graham : 그레이엄 형제가 1927년에 설립한 자동차 회사 그레이엄 페이지Graham-Paige에서 생산한 자동차. 1940년에 자동차 생산을 중단했고, 1962년에 완전히 폐업했다.
우울해하지 마. 그럴 만한 심각한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예를 들어 보노Bonneau를 생각하거나 아니면 부사르Boussard 같은 여자애들을 생각해 봐. 물론, 비교한다고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지만 언젠가는 너 스스로 무언가를 이룰 거라고 나는 확신해.
"조숙함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성급함은 지성에 이르는 탁월한 상태다." (프랑수아즈 사강), 하하. 사람들이 행하는 악행에 관한 와일드의 명언을 떠올릴 수가 없네. 반대로, 너무나 매력적인 <서푼짜리 오페라>의 짧은 곡 하나를 배웠어. 뭐냐면, 너도 알고 있겠지만......
"더 낫구나 / 훨씬 / 그 마음을 강요하지 마..." 대단히 유쾌한 곡조에 맞춰서. (p74)
나의 귀여운 베로니크. 네 편지는 눈물 나게 감동적이었어. "너무나 매력적이고, 나와 내 가족을 많이 웃게 했고, 극도의 권태로부터 나를 구해준 베로니크가 정작 자기 자신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가엾어라. 그렇게 믿게 내버려둔 내가 얼마나 역겨웠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어.
간단히 말해, 이번에는 내게 후회가 찾아왔어. 이 문제에 관해서 내게 편지해줘. 농담 아니야. 넌 '완벽'했어. 네가 없는 오스고르Hossegot는 을씨년스럽지만 생장드뤼즈Saint-Jean-de-Luz로 가는 몇몇 코스나 바닷물에 젖은 채 뜨거운 모래 위에서 즐긴 낮잠은 잊지 못 할 거야. (78p)
타자기로 112페이지째 작업하고 있고, 50페이지는 더 써야 끝날 것 같아. 저명한 문학비평가 클로드 로이Claude Roy가 그 글을 읽고 정말 훌륭하다고 내게 말해줬어.
간단히 말하면, 나는 무척 기쁘고 오로지 기쁘기만 해. 한가지 골치 아픈 건, 기(슐러)가 뤽(주인공)과 닮았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인생은 픽션을 능가하는 법이니까 모든 게 유쾌하게 섞이면 좋겠어. 네가 어디 있는지, 뭘 하는지 신께서 아시려나? 설마 임신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빨리 돌아와, 내가 널 돌봐줄게. 그렇지 않더라도 빨리 돌아와. 네가 없으니 지루하단 말이야. 얘, 미치겠어.
네가 나를 보면 아마 변했다고, 아주 많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할 거야. 소설이 나를 정화했어. 어쨌거나 돌아와. 그리고 서둘러. 농담은 충분히 했잖아! 콘스탄티노플 거리 만세(네가 돌아온 후 힘든 며칠을 보낼 수 있게 도와줄게). 키키 프랑수아즈. (82p)
요약하자면, 나는 죽을 만큼 지겨워. 작업을 하기 힘들 정도로. 나의 유일한 위안은 바로 너 그리고 내가 곧 가지게 될 애스턴이야. 밀리 만세! 날씨는 좋아. 주목. 그래서 우리는 마그뉘스와 모래언덕에서 나체로 돌아다닐 거야. 아나벨과 마그뉘스가 벌거벗고 있는 모래언덕 옆의 모래언덕에 내가 벌거벗고 있는 게 짜증스럽지만, 어쩔 수 없어. 이건 정말 부조리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 나는 루소를 읽는데 무척, 무척 재미있어. 그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면 포복절도하게 돼.
하지만 루소를 읽으러 카나리아 제도에 가다니, 하고 넌 말하겠지... 크노의 병사가 말하듯 멍청하게 굴지 말아야 해. 우리는 18일에 돌아가. 다행히 16일에는 내 영사가 나를 기다리는 마드리드에 있을 거야. 그쪽으로 편지해줘. 페닉스 호텔Hotel Fenix. 그렇게 쓰면 충분할 거야. 사랑해, 플릭. (85p)
애스턴Aston : 영국의 유명한 스포츠카 애스턴 마틴을 말함.
크노Queneau : 언어유희와 실험소설을 쓴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
나는 여행에 어울리도록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야, 한 번 더 그 사실을 확인해. 여긴 괜찮아, 무엇보다 페테르 때문에, 하지만 처음에는...... 어휴. 그래서 이제 더는 여행을 안 할 거야. 플록과 함께 하는 여행 빼고는. 왜냐하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우리 각자 알고 있듯이 짓궂은 장난의 연속일 테니. (98p)
나의 다음 책에는 프랑수아즈 P. 사강이라고 쓰고 말 테야. 두고 봐. 사람들은 내가 비밀 결혼을 했다고 여길 거고, 그 상대가 '플릭'이라고 믿겠지. 후후후, 그렇게 할 거야! (99p)
마뉴가 네게 우아한 안부를 전해달래. 그가 창꼬치 한 마리를 낚았는데, 수탉처럼 붉은 데다 얼이 빠져 있었고, 나는 그 물고기가 죽을까 봐 겁이 났어. 흔히 말하듯, 열대지방은 리지외와 다르네. 낚시한 물고기들을 바라보면서, 오늘 오후에, 나는 나의 좌우명을 찾았어. "죽든가 달아나든가." (100p)
리지외Lisieux :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지방. 카르멜회 수녀이자 사후에 성녀로 추대된 테레즈가 살았던 곳으로, 루르드 다음으로 널리 찾는 성지순례지.
산책하고 나서는 폴 모랑의 칵테일파티가 있으니 아마 이 편지는 취한 상태에서 끝맺게 되겠지. 그래서 난 지금 이 순간 네가 많이 보고 싶다고, 너야말로 내가 변함없이 보고 싶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해두려고 해. 사람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똑똑해. 무엇보다, 무엇보다 그들은 절대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너는 그런 사람이지. 그건 어마어마한 힘이고, 나는 네가 오랫동안 그 마음을 간직해주기를 바라. 이건 공연한 미사여구가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우리는 한계의 한가운데에 살아가고 있어. 프랑크조차 자기의 한계가 있어.
말이 났으니 말인데, 난 이제 그게 뭔지 모르겠어. 방금 데옹과 한 잔 했어.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야. 그런 사실이 놀랍고 요컨대 마음에 들어. 프랑크의 원고, 넌 어떻게 생각해? 네가 돌아오면 술을 곁들인 멋진 지성인의 저녁 식사를 하자. 벌써부터 기뻐. 다만 식사 10분 전에 내가 내 머리칼을 쥐어뜯을 테니 너도 나의 불안, 공포를 함께해줘야 한다는 점만 빼고. (p108)
폴 모랑Paul Morand : 사강보다 쉰 살 가까이 나이가 많았던 프랑스의 작가이자 외교관.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한 플릭과 플록은 새로운 이동 수단을 물색한다.
플릭 : 걸어가면 어떨까, 플록?
플록 (우아하게) : 그걸 말이라고 하니, 샤를!
그렇게 말하고 나서 플릭과 플록은 엉덩이 통증 치료법에 대해 여러 의견을 교환하고 나서 다시 아르니카를 언급한다.
플록 : 저기 봐, 아르니카야!
완치된 후 플릭과 플록은 말을 듣지 않는 근육을 풀고자 다양한 운동을 하기로 한다.
네게 편지 쓰는 게 힘들어. 쇄골이 부러져서 손목으로만 글을 쓸 수 있는데, 이제 손목이 진저리를 치고 있거든. 사랑하는 베로니크, 우린 정말 운이 좋았어. 너를 다시 만나 새로운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 간절해. 이제 때가 됐어. 내게 편지해. 네가 보고 싶어, 네가 다쳐서 당황스럽고 슬퍼, 사랑해. (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