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DJobs to be done는 하버드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의 이론으로, 직역하자면 '완수해야 할 작업'이라는 의미다.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가자면 '고객이 본인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핵심 과업'. 크리스텐슨 교수는 사람들이 본인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품을 고용한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들은 0.25인치짜리 드릴을 원하는 게 아니라 0.25인치짜리 구멍을 원한다People don’t want a quarter-inch drill. They want a quarter-inch hole'는 테오도르 레빗 교수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비즈니스가 만들어야 할 것은 제품이 아니라 고객이 처한 문제에 대한 멋진 솔루션이라는 것이다. 
 
 

고객이 원하는 건 '맛있는' 밀크셰이크가 아니라 '끼니 때울 수 있는' 밀크셰이크

 
JTBD 프레임워크의 잘 알려진 예시로 '밀크셰이크' 사례가 있다. 맥도날드에서는 밀크셰이크 매출을 늘리고 싶었다. 그래서 핵심 소비자를 초청하고, 시장 조사도 하고, 제품에 대해 다각도의 질문을 수행하고, 과정에서 나온 피드백도 성실히 반영해 가면서 맛있는 밀크셰이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다양한 맛도 내 보고, 더 달게도 만들어 보고, 가격 조정도 했다. 매출도 그대로였다. 별 짓을 다 해도 그대로 했던 매출을 상승시킨 건 결과적으로, '걸쭉하게 만든 밀크셰이크'였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결과적으로 고객의 문제에 귀를 기울인 게 성공 요인이었다. 컨설턴트는 고객의 문제를 찾기 위해 열여덟 시간 동안 패스트푸드점 앞에서 데이터를 수집했다. 고객들은 '몇 시에 밀크셰이크를 사는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나', '혼자 왔나, 아니면 누구랑 같이 왔나', '밀크셰이크만 샀나, 다른 거랑 같이 샀나', '밀크셰이크를 먹고 갔나, 가지고 갔나'
 
 
그리고 밀크셰이크 판매의 절반 정도가 아침 여덟 시 이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구매군의 사람들은 혼자서 패스트푸드점에 와서, 밀크셰이크 말고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사자마자 차에 타서 가던 길을 갔다. 컨설턴트가 이 고객군을 대상으로 인터뷰해 보니 고객들이 해소하고자 하는 문제는 거의 비슷했다. '출근길에 심심하지 않게 계속 먹을 수 있으면서, 밥도 되는 상품이 필요했음'.
 
 
그리고 이 관점에서 맥도날드의 밀크셰이크는 어떤 경쟁 업체의 것보다 훌륭했다. 또 중요한 부분 하나는 경쟁 상품이 버거킹의 밀크셰이크가 아니라 도넛, 베이글, 스니커즈 바, 커피였다. 이런 니즈를 파악한 맥도날드에서는 출근길에 오래 마실 수 있도록 밀크셰이크를 더 걸쭉하게 만들었고 식감이 재밌도록 과일을 첨가했다. JTBD의 개선 통해 판매량을 증대시킨 사례다.
 
 
 
 
 

또다른 JTBD을 놓치지 말자

 
맥도날드는 훌륭하게 고객 절반의 JTBD을 해소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냈지만, 아직 나머지 고객 절반의 JTBD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들의 또 다른 고객은 오후에 아이를 돌보는 아빠들이었다. 이들은 본인의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아이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오후에 맥도날드를 방문해 밀크셰이크를 주문했다.
 
 
이들은 오전에 밀크셰이크를 먹기 위해 방문하는 고객군과 완전히 정반대의 니즈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아이가 좋아할 만큼 달달하면서도 건강에 나쁘지 않은 밀크셰이크를 원했다. 맥도날드는 이 고객들의 니즈 충족을 위해 부드럽고 설탕이 덜 들어간 밀크셰이크 역시 출시했다. 이처럼 JTBD은 경우에 따라 한 개가 아니라 여럿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고객군이 하나가 아니라면 여러 고객군의 JTBD을 모두 파악하고 제품을 다각화하는 일도 중요하다. 오전의 밀크셰이크는 걸쭉했지만 오후의 밀크셰이크는 부드러웠던 것처럼.
 
 
 
 
 

고정관념을 벗겨 주는 JTBD

 
그릴을 판매하는 웨버weber라는 회사는 '더 고기가 잘 구워지는 그릴'을 만들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그릴의 소재를 바꾸고 모양을 바꿨다. 하지만 어떻게 제품을 고도화하든 간에 매출은 늘지 않았다. 이 회사는 JTBD를 알게 된 후 비즈니스가 집중해야 할 목표가 더 나은 그릴better grill이 아닌 '더 나은 그릴러better griller'를 만드는 것임을 알게 됐다. 이들은 이제 캠핑장의 그릴 앞에서 우리 고객이 더 '인싸'가 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웨버는 그릴의 소재를 바꾸는 데에서 벗어나서 고기 잘 굽는 법 가이드, 성공하는 그릴 바베큐 레시피와 그릴 악세사리를 만들었다. 또 고객의 고기 굽기가 실패하지 않도록 그릴 어드바이스 서비스까지 런칭했다. 결과적으로 웨버는 세계 최고의 그릴 회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처럼 JTBD 프레임워크는 기존 제품 생산자로서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멋지게 벗겨 주기도 한다. 돌아보자. 우리 회사의 제품은 충분히 고객의 JTBD를 고려하고 있는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출처

01) https://acquiredentrepreneur.tistory.com/76
02)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pninsight&logNo=223039411540

 
 
 
앤이 아름다운지 그렇지 않은지는 보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주로 그 연령과 성별에 따라서. 옥타비어스에게 그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이다. 그녀가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세계는 변모되고 보잘것없는 개인의식의 범위가 전 인류와 인생의 신비한 기억에 의해 갑자기 무한해져서 동방 인류의 발단에까지, 심지어는 추방되기 전 낙원의 시대에까지 닿을 정도이다. 그에게 그녀는 로맨스의 실체이자 무의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의 두 눈에서 베일을 벗겨 내는 존재이며, 그의 영혼의 해방이자 시간과 장소와 상황을 지우고 그의 피를 영화(靈化)시켜 생명의 수로가 된 환희의 강으로 흐르게 하며, 모든 신비의 계시이고 모든 독단을 성화시키는 존재이다. 그녀의 어머니에게는, 가능한 온건하게 표현하려고 해도, 그녀는 옥타비어스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옥타비어스가 앤을 찬미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거나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앤의 모습은 훌륭하다. 그녀는 완벽하게 숙녀답고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유혹적인 눈매와 머릿결을 지녔다. 게다가 자기 어머니처럼 눈에 거슬리는 차림이 아니라 검정색과 보라색 비단으로 된 상복을 만들어 입음으로써 돌아가신 부친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당당한 가족의 전통을 드러내고 있는데, 사실 램즈던은 이러한 점을 무척 중시한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은 앤의 매력을 설명하는 요점에서 벗어나 있다. 그녀의 코를 위로 들어 올리고 눈을 사팔뜨기로 만들고 검정색과 보라색으로 된 주름 장식 옷 대신 꽃 파는 아가씨의 앞치마와 깃털 모자를 갖추게 하고 그녀의 대화에서 〈h〉 음을 다 빼버려도 앤은 여전히 남자들을 꿈꾸게 만들 것이다. 활력은 인간성만큼 평범한 것이지만, 인간성과 마찬가지로 활력 또한 때로는 천재의 위치로 승격된다. 앤은 활력의 천재에 속하는 사람이다. 글쎄, 그렇다고 그녀가 지나치게 성적 매력이 있는 사람인 것은 전혀 아니다. 사실 그러한 경우는 활력이 부족한 경우이지 과도해서는 아니다. 그녀는 완벽하게 존경받을 만하고 완벽하게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아는 여성이며, 겉으로도 그렇게 보인다. 비록 그녀의 마음가짐이 시대의 유행에 걸맞게 너무 솔직하고 충동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뜻하지 않은 일이라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확신을 준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할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녀를 두려워할지 모른다. 간단히 말해, 그녀보다 유약한 다른 여성들은 종종 그녀를 암고양이라고 부를 것이다.





앤 (유쾌하게) 모두들 날 버릇없게 만드네요, 잭만 빼고는.
태너 (서가에서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난 태너 씨라고 불러야 해요.
앤 (부드럽게) 안 돼요, 잭. 당신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얘기하지만 당신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런 말엔 신경도 안 쓰죠. 그렇지만 원한다면 당신의 그 유명한 조상인 〈돈 후안〉으로 불러 주겠어요.
램즈던 돈 후안이라니!
앤 (천진하게) 아, 뭐 불편하세요? 몰랐군요. 그렇다면 절대 그렇게 부르지 않겠어요. 다른 이름이 생각날 때까지는 잭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태너 오, 제발 더 나쁜 이름을 만들어 내지만 말아 줘요. 항복하죠. 잭에 동의할게요. 기꺼이 받아들이고말고. 내 권위를 주장하려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가 여기서 끝나는군.
앤 보세요, 엄마. 모두들 애칭을 정말 좋아한다고요.
화이트필드 부인 얘야, 적어도 우리가 상중일 때만이라도 애칭을 삼갔으면 싶구나.




옥타비어스 그런 것 같아. 하이드 파크 코너에서 여기까지 17분 만에 왔거든. (태너의 운전기사가 잔뜩 화가 나서 짜증 섞인 신음 소리를 내며 자동차를 발로 찬다) 자넨 얼마나 걸렸나?
태너 아, 한 45분쯤 걸렸나.
운전기사 이런, 보세요, 태너 씨, 이런! 15분도 안 걸렸다고요.
태너 그건 그렇고, 소개를 하지. 이쪽은 옥타비어스 로빈슨 씨, 그리고 이쪽은 엔리 스트레이커 씨.
스트레이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선생님. 태너 씨는 선생님을 놀리시느라 엔리 스트레이커라고 하시는 겁니다. 선생님은 헨리로 불러 주시겠죠. 어쨌든 전 상관없지만요!
태너 자넨 내가 그를 놀리는 것이 단순한 악취미라 여기겠지, 테이비. 하지만 틀렸어. 이 사람은 자기 부친이 〈h〉 음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h〉 음을 빼먹으려고 노력한다네. 그에게는 그게 계급의 표시인 셈이지. 난 엔리보다 더 자기 계급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네.
스트레이커 그만, 그만하시라고요! 적당히 좀 하십시오, 태너 씨!
태너 〈적당히〉 좀 하라는군. 테이비, 자네도 봤지. 자네라면 〈온건하게〉 하라고 말했겠지. 그렇지만 이자는 교육을 받았다고. 게다가 우리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 자네가 다녔다는 공립 학교가 어디라고 했지?
스트레이커 셔브룩 로드입니다.
태너 셔브룩 로드! 우리 중 누가 저렇게 학자연하며 속물적인 어조로 〈럭비! 해로우! 이튼!〉 하고 얘기하겠나? 셔브룩 로드는 소년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곳이지. 반면에 이튼은, 우리가 집에서 성가신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졸업하고 나면 무슨 공작 작위라도 언급될 때마다 〈그가 옛 학교 동창〉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보내지는 탁아소야.





앤 당신은 너무 터무니없고도 비현실적이에요. 내가 어찌해야 하나요?
태너 해버려요! 사슬을 끊어 버리라고. 당신 어머니의 양심을 따르지 말고 당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소신대로 행동해요. 당신 마음을 깨끗하고 활기 있게 만들고, 그 가증스러운 음모에 대해 변명하는 대신 자동차를 타요. 빨리 달리는 즐거움을 배워 보라고. 나랑 마르세유에 가고 알제리를 건너 비스크라까지 시속 60마일로 달려 보자고. 원한다면 희망봉까지 곧장 내려가죠. 놀라운 독립 선언이 될 거예요. 나중에 책으로도 쓸 수 있겠지. 그러면 당신 어머니는 지쳐 버릴 테고 당신은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예요.
앤 (생각에 잠겨서) 그렇게 해도 나쁠 것 같진 않군요, 잭. 당신은 내 후견인이고 아버지의 소망으로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함께 여행해도 아무도 반대의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거예요. 즐거울 것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잭. 나, 가겠어요.
태너 (대경실색해서) 가겠다고!
앤 물론이에요.
태너 그렇지만 ─ (너무 놀라 말을 멈추었다가 힘없이 말을 잇는다) 아니야, 이봐요, 앤. 나쁠 것도 없지만 그렇게 할 필요도 없어요.
앤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지! 당신, 내 평판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는 않겠죠?
태너 위태롭게 하고 싶어요. 그게 내 제안의 전적인 의도지.
앤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군요. 당신도 그건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내게 상처 줄 일을 할 리가 없어요.
태너 당신 평판이 위태로워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가지 말아요.
앤 (단순하고 진지하게) 아니, 가겠어요, 잭, 당신이 원하니까요. 당신은 내 후견인이고, 따라서 우리는 서로 더 많이 보고 서로 더 잘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고마워하며) 이렇게 멋진 휴가를 제안하다니 아주 사려 깊고 친절하군요, 잭. 그것도 내가 로다에 관한 얘기를 한 다음에 말이죠. 당신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죠. 언제 출발하나요?
태너 그렇지만─




그에게 영국인의 삶에는 교훈적 수사(그는 도덕적 분위기라고 칭하는데)가 결여되어 있고, 영국인의 행동에는 여성에 대한 존경이 모자라며, 영국인의 발음은 〈world 〉, 〈girl 〉, 〈bird 〉 등과 같은 단어를 말할 때 매우 천박하고, 영국 사회는 종종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솔직하다. 또 그는 영국인의 사교계에 놀이나 이야기, 그리고 다른 기분 전환거리로 활기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서양 횡단을 감행하기 전에 이미 일류의 교양을 쌓느라 큰 고생을 한 그로서는 영국인의 이러한 결점들을 습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국인이 모든 교양에 대해 공통적으로 그러하듯 이런 교양에 대해서도 전혀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품위 있게 회피한다고 여긴다. 사실 헥터의 교양이란 30년 전 영국에서 미국으로 보낸 문학을 속속들이 받아들인 수준에 불과한데, 그는 이것을 역수입해서 대화 중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따리를 풀어 영국의 문학, 과학, 예술 위에 던지려 한다. 이러한 맹공격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면 그는 자신이 영국을 교육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더욱 굳게 믿는다. 사람들이 아나톨 프랑스와 니체에 대해 순진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아침 식탁의 독재자인 매튜 아놀드나 심지어 매콜리까지 언급하며 사람들을 압도해 버린다. 게다가 그는 근본적으로 독실하고 신앙심이 깊기 때문에 우선 유머 넘치는 불경한 말로 경솔한 사람들을 구슬려 도덕적 문제에 대한 논의 중 통속적인 신학 이론을 끌어낸 다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느님이 정직한 남성과 순결한 여성을 창조하신 뚜렷한 목표가 아닌지 대답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매력적이고 참신한 개성, 말도 안 되게 놀라울 정도로 진부한 교양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과연 그가 사귈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결정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헥터 나도 알고 있어요. 만일 당신이 영국 사무실용 가구 제조업자의 아들과 결혼한다면, 당신 친구들은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런데 여기 어리석은 노인인 아버지가 계시지. 세계에서 가장 큰 사무실용 가구상인 그분은 내가 영국에서 가장 완벽한 귀부인과 결혼해도 단지 그녀의 이름 앞에 직함이나 경칭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내쫓으려 드실 거예요. 물론 어리석은 일이죠. 그렇지만 바이올렛, 난 아버지를 속이고 싶지는 않아요. 아버지의 돈을 훔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왜 고백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바이올렛 우린 감당할 수 없어요. 사랑에 관해선 원하는 대로 낭만적일 수 있지만 헥터, 돈에 관해서 낭만적이어서는 안 돼요.
헥터 (아내를 극진히 위하는 마음과 습관화된 높은 도덕감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건 아주 영국적인데.





스트레이커 아! 우리가 어디로 들어온 걸까요?
태너 (소개한다) 내 친구이자 운전기사요.
부루퉁한 사회 민주주의자 (미심쩍어하며) 자, 어느 쪽이지? 친구요, 아니면 운전기사요? 알다시피 어느 쪽인지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
멘도자 (설명하면서) 친구일 경우에는 몸값을 받아야 하지. 직업 운전사라면 산을 그냥 통과할 수 있고. 게다가 예의상 받아 주겠다고만 하면 그는 주인 몸값에서 조금은 가질 수도 있소.
스트레이커 그런 말이군. 또다시 이 길로 오도록 부추기는 거구먼. 그거 생각해 볼 만한걸.
뒤발 (충동적으로 스트레이커에게 달려든다) 동지! (기쁨에 겨워 스트레이커를 안고 양 볼에 입을 맞춘다)
스트레이커 (넌더리를 내며) 이봐, 저리 가요. 어리석게 굴지 말라고. 대체 당신 누구요? 





돈 후안 나는 속지 않았습니다. 마취제 없이 여자를 대했기 때문이죠.
아나 그렇지만 여자를 손해 넣었죠.
돈 후안 그게 계시였지. 그 순간까지도 난 내가 나 자신의 지배자라는 개념을 결코 잃지 않았어요. 내 이성이 시험하고 승인할 때까지 한 발자국도 의식적으로 내딛지 않았습니다. 난 내가 순수하게 이성적인 창조물이라고 믿게 되었죠. 사상가라고 말입니다! 어리석은 철학자처럼 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되뇌었어요. 그런데 내게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라고 가르쳐 준 건 여자였죠. 그리고 <나는 더 많이 사고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더 많이 존재해야 한다>라는 말도 말이지.

어리석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돈 후안 이건 마치 유행하는 연극에서 아직 복잡한 문제가 시작되기 전 제1막을 영겁과 같은 시간 속에 앉아 보는 것 같구먼. 지상에서 미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최악의 순간에도 지옥이 이렇게 무서운지는 꿈도 꾸지 못했소. 난 이발사처럼 비단 같은 머리 타래를 만지작거리면서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사색하며 살고 있지. 과자 가게 점원처럼 달콤한 공기를 숨 쉬고 말이야.





마왕 (우울하게) 그가 가다니, 이건 정치적 실패예요. 저런 삶의 숭배자들은 도대체가 잡아 둘 수가 없다니까요. 이건 네덜란드 화가 이후 최대의 손실이군요. 일흔 먹은 추한 노파를 스무 살짜리 비너스처럼 그리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죠.
석상 나도 기억나는군. 그 남자, 천국으로 왔소. 렘브란트 말이지.
마왕 맞아요, 렘브란트요. 그런 녀석들한테는 뭔가 괴상한 면이 있어요. 그들의 신조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사령관님. 위험하니까요. 초인을 추구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경멸하도록 이끈다니까요. 인간에게 말이나 개, 고양이는 도덕적 세계 밖에 있는 종속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초인에게는 남자와 여자 또한 도덕적 세계 밖에 있는 종속에 불과하죠. 이 돈 후안도 여자들에게 친절하고 남자들에게 정중했어요. 여기 사령관님의 따님이 자기 애완용 고양이나 개에게 친절하듯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친절은 영혼의 인간적인 성격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석상 그런데 도대체 초인이란 게 누구요?
마왕 아, 생명의 힘을 광신하는 자들 사이에서 최근 유행하는 겁니다. 천국에서 못 만나셨나요? 새로 온 사람들 중 독일계 폴란드 사람인 <미치광이> 있잖습니까. 이름이 뭐였죠? 니체라고 하던가?
석상 들어 본 적 없소.
마왕 음, 그가 제정신이 들기 전에는 여기로 먼저 왔었죠. 난 그에게 약간의 희망을 품었는데 그는 뿌리 깊은 생명의 힘 숭배자였어요. 프로메테우스만큼 오랜 초인을 들추어 낸 것도 그자였다니까요. 그 때문에 20세기에도 세상에 대해, 육욕에 대해, 그리고 당신의 비천한 종인 나에 대해 싫증이 나면 다들 오랜 열광의 대상 중 가장 최신판인 이자를 쫒아다닐 겁니다.
석상 초인은 괜찮은 구호고, 구호가 그럴싸하면 싸움에서 절반은 승리하는 셈이지. 그 니체라는 자를 만나 보고 싶구먼.
마왕 불행히도 그는 여기서 바그너를 만나 말싸움을 벌였지요.
석상 그럴 만하지. 모차르트가 내 취향이야!
마왕 아, 음악에 관한 것이 아니었어요. 바그너도 한번은 생명의 힘을 숭배하느라 허우적대다가 지크프리트라는 초인을 만들어 냈지요. 그러나 그 후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기서 만났을 때 니체는 그를 변절자라고 비난한 거죠. 바그너는 니체가 유대인이란 걸 증명하는 내용의 팸플릿을 썼어요. 이에 니체가 불끈 화를 내고 천국으로 가는 것으로 그 일은 끝났습니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an Rijn.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 그의 〈초인 사상〉이 버나드 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 리차드 바그너Richard Wagner(1813~1883) 독일의 음악가. 니체는 바그너를 예술적 스승으로 여겼으나 후에 의견이 달라져 결별하게 된다. 
지크프리트: Siegfried.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4부작 중 제3부에 등장하는 영웅. 바그너는 여기서 인간 최고의 사명은 현실의 생을 초월하고 정신의 욕망을 발산시키는 일이라는 말로 초인 사상을 보여 주었다. 





앤 그러면 당신은 여자에게서 거리를 두고 여자에 대해 꿈이나 꾸면 돼요. 난 결코 당신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테이비.
옥타비어스 내겐 희망이 없군, 앤. 내 불운을 받아들이겠어요. 그렇지만 그게 나를 얼마나 상심하게 할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앤 너무도 유약하군요! 당신은 이상할 정도로 바이올렛과 달라요. 바이올렛은 쇠못만큼이나 단단한데.
옥타비어스 아, 천만에요. 사실 바이올렛의 내심은 속속들이 여자답죠.
앤 (다소 성급하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사려 깊고 사무적이며 분별 있는 것은 여자답지 않다는 뜻인가요? 당신은 바이올렛이 천치가 되기를ㅡ 아니면 그보다 더 나쁘게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나처럼?
옥타비어스 더 나쁘게ㅡ 당신처럼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앤?
앤 아, 저, 물론 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난 바이올렛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녀는 늘 자기 뜻을 관철하니까요.
옥타비어스 (한숨을 쉬며) 당신도 그러잖아요.
앤 예. 그렇지만 어쨌든 그녀는 남을 구슬리지 않고서도ㅡ 그러니까 자기를 위해 남들을 감상적으로 만들지 않고서도 뜻을 관철하지요.
옥타비어스 (오빠로서 담담한 태도로) 내 생각에는, 바이올렛 때문에 감상적이 될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 애가 예쁘긴 하지만.
앤 아뇨, 바이올렛이 마음만 먹으면 그들은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옥타비어스 그렇지만 정말 훌륭한 여자라면 그런 식으로 일부러 남자의 본능을 이용하지 않겠죠.
앤 (갑자기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오, 테이비, 테이비, 리키 티키 테이비, 당신과 결혼할 여인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옥타비어스 (그 이름을 듣고 열정이 되살아난다) 아, 왜, 왜, 왜 그런 말을 하지? 날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요. 난 이해할 수가 없어.
앤 만일 악의 없는 거짓말을 하고 남자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여자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옥타비어스 내가 그런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알고 사랑해 온 내가?
앤 흠! 음, 어쨌든, 현명한 여자라면 당신과 결혼하지는 않을 거예요. 자, 이것으로 결론이 났어요. 이제 난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날 용서한다고, 또 이 얘기는 끝났다고 말해 줘요.
옥타비어스 난 용서할 게 없어요. 그리고 이 얘기는 끝났고요. 만일 상처가 아물지 않더라도, 적어도 당신에게 피 흘리는 꼴은 보이지 않겠어요.
앤 끝까지 시적이군요, 테이비. 그럼 안녕, 소중한 사람. (그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갑자기 싫어져서 그만두고는 마침내 정원을 지나 별장으로 뛰어간다)





앤 (비밀 속으로 끌어들이듯 그에게 몸을 돌리면서) 테이비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결코 결혼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나요?
태너 뭐? 여성을 우상화하는 남자가! 자연에서 사랑의 이중주를 위한 낭만적인 정경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기사도 넘치고 충실하며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진 진실된 테이비가! 테이비가 절대 결혼하지 않는다니! 저런, 그는 타고나기를 거리에서 만난 첫 아가씨의 푸른 눈만 보아도 열광하게 되어 있는데.
앤 그래요.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잭, 그런 남자들은 실연하고서는 하숙집 여주인의 귀여움이나 받으며 안락한 총각의 방에서 살지, 절대로 결혼하지 않아요. 당신 같은 남자들은 언제나 결혼하지만.
태너 (이마를 치며) 이럴 수가! 소름 끼칠 정도로 맞는 말이군! 결혼이 내내 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이전에는 그걸 절대 깨닫지 못했다니.
앤 오, 그건 여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예요. 시인의 기질이라는 게 아주 멋지긴 하죠. 정말 상냥하고 무해하며 시적이라고 감히 말하겠어요. 그렇지만 그건 노처녀의 기질이죠.





태너 (절망적으로) 아, 당신은 기지가 있군요. 생명의 힘이 가장 중요한 순간 당신에게 온갖 재능을 부여하는군. 자, 나도 위선자가 될 수 있어요. 당신 아버지의 유언에는 내가 당신의 구혼자가 아니라 후견인으로 지명되어 있지. 난 내 의무에 충실하겠어요.
앤 (낮고 매혹적인 어조로) 아버지는 그 유언장을 만드시기 전에 내 후견인으로 누구를 택할지 내게 물으셨죠. 난 당신을 선택했고!
태너 그러면 그 유언장은 당신 의지였군! 처음부터 올가미가 놓여 있었던 거야.
앤 (그녀의 모든 매력을 다해서) 처음부터죠ㅡ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ㅡ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ㅡ 생명의 힘에 의해서.
태너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과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앤 오, 할 걸. 당신은 할 거예요.
태너 말하겠는데, 안 할 거예요, 안 한다고. 안 해요.
앤 말하겠는데, 한다고요, 할 거예요. 한다고요.
태너 안 해.
앤 (구슬리고, 간청하며, 거의 진이 빠져서) 한다고요. 후회하기에 너무 늦기 전에 말이지요. 한다고요.
태너 (과거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이 모든 일이 전에도 있었는데, 언제였지? 지금 우리 두 사람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앤 (갑자기 용기를 잃으면서 고통을 감추지 못한 채) 아니오. 우린 깨어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안 한다고 말했고. 그게 다예요.
태너 (냉혹하게) 그렇다면?
앤 그래요. 내가 잘못 알았어요.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태너 (두 팔로 앤을 감싸 안으며) 거짓말이야. 난 당신을 사랑해요. 생명의 힘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요. 당신을 끌어안고 있을 때 난 온 세상이 품 안에 있는 것 같아. 그렇지만 난 내 자유를 위해서, 내 명예를 위해서, 나누어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자아를 위해서 싸우고 있어요.
앤 당신의 행복은 그것들 모두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을 거예요.
태너 당신이라면 행복을 위해 자유와 명예와 자아를 팔겠어요?
앤 그것들 모두가 내게는 행복을 의미하는 게 아닐 거예요. 아마 죽음일지도 모르죠.
태너 (신음하면서) 아, 그렇게 움켜잡힌 채 있으면 고통스러울 거예요. 당신은 내 마음 속 어디를 붙잡고 있는 건가요? 어머니의 정이 있듯이 아버지의 정도 있는 걸까?
앤 조심해요. 잭. 만일 우리가 이러는 동안 누가 온다면,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할 거예요.
태너 만일 우리 두 사람이 지금 절벽 가장자리에 서 있다면, 나는 당신을 꼭 안은 채 뛰어내릴 거예요.
앤 (긴장 때문에 숨을 헐떡이다 차차 숨소리가 약해진다) 잭, 가게 해줘요. 난 정말 대단하게 용기를 내어 이러고 있는 거라고요ㅡ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끄는군요. 가게 해줘요. 견딜 수가 없군요.
태너 나도 견딜 수 없어요. 우리를 죽이라지.
앤 예. 좋아요. 난 이제 힘도 없어요. 상관없다고요. 기절할 것 같네요.





말론 거친 신랑감이네, 그렇죠? 그런 사람이 제일 좋은 겁니다, 화이트필드 양. 태너 씨, 축하하오. 두 분이 수도원 손님으로 자주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앤 고맙습니다. (그녀가 말론을 지나 옥타비어스에게 간다) 리키 티키 테이비, 날 축하해 줘요. (그에게만 들리게) 나 마지막으로 당신을 울리고 싶어요.
테이비 (확고하게) 더 이상 울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니까. 아무튼 난 당신을 믿고 있어요.
램즈던 (말론과 태너 사이로 나오면서) 자넨 행복한 남자야, 잭 태너. 자네가 부럽구먼.
멘도자 (바이올렛과 태너 사이로 나오면서) 선생, 삶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소. 하나는 마음속 욕망을 잃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걸 이루는 것이오. 나와 당신이 거기에 해당되지, 선생.
태너 멘도자 씨, 내겐 마음 속 욕망이 없소. 램즈던, 나를 행복한 남자라고 부르는 건 당신께 아주 쉬운 일이겠죠. 구경꾼의 입장이니까요. 난 당사자라 더 잘 압니다. 앤, 테이비를 유혹하는 건 그만두고 내게로 돌아와요.
앤 (그 말에 응하면서) 당신 어리석군요, 잭. (태너가 내민 팔을 잡는다)
태너 (말을 계속하면서) 엄숙하게 얘기하겠는데, 난 행복한 남자가 아닙니다. 앤도 행복해 보이지만, 그건 승리와 성공의 성취감에 불과하죠. 이건 행복이 아니라 강자가 그들의 행복을 판 대가입니다. 오늘 오후 우리 둘이 한 행동은 행복을 포기하고, 자유를 포기하고, 평안을 포기하고, 무엇보다도 집안사람들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지의 장래에 대한 낭만적인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기회에 나를 이용해서 반쯤 취한 채 어리석은 말이나 거친 농담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린 우리 취향에 따라서 우리가 살 집에 가구를 갖추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알려 둘 것이 있습니다. 여행용 시계 일고여덟 개, 화장 도구 상자 네댓 개, 고기 써는 칼과 생선 자르는 칼, 최고급 모로코가죽으로 장정된 패트모어의 시집 <집안의 천사> 몇 권, 그 밖에 여러분이 우리에게 주기 위해 쌓아 놓을 준비를 하고 있는 물건들, 이 모든 것들을 즉시 팔고 그 돈은 <혁명가의 핸드북>을 무료 배포하는 데 쓰려고 합니다. 결혼은 영국으로 돌아간 다음 사흘 후 특별 허가를 받아 구청 호적 감독관의 사무실에서 내 사무 변호사와 서기의 입회 하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결혼 당사자인 의뢰인과 같이 평상복을 입게 될 것이고ㅡ
바이올렛 (확신에 차서) 당신은 야만인이에요, 잭.
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응석을 받아 주듯 태너를 바라보고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바이올렛 말에 신경 쓰지 말아요, 사랑스러운 사람. 계속 지껄여요.
태너 지껄이라니!

모두 웃는다. 막이 내린다.
 
 
 
 
 

대전에 갔다 왔다. 신기한 도시였다. 걷는 곳에는 이방인이 없었고 만나는 사람들은 여행자를 대하는 근육이 물렀다. 삼 일 머무르고 떠날 사람을 십수 년쯤 여기 머문 사람으로 대해 주는 곳에서 여행자 특유의 날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뻔뻔하게 이곳 사람인 체 굴며 다녔고 하루 온종일 책을 읽었다. 서울에서보다 대전에서의 세상은 느렸고 거기서 우리는 평소 따라잡지 못 했던 세상과 보폭 맞춰 걸을 수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지원했던 회사에서 최종 합격 문자를 받았다. 요새는 내게 우호적인, 어떤 진부하고 평온한 영화의 시나리오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종종 든다. 굳이 거부하지 않고 나무늘보 같은 삶을 이백 퍼센트 만끽하는 중이다.

밤은 천천히 가고 비는 오지 않았다. 나는 울지 않았고 구는 숨 쉬지 않았다. 죽은 구를 안고 있었지만 그와 죽음이란 개념은 전혀 연결되지 않았고 같은 극을 띤 자석처럼 강렬하게 어긋났다. 모든 것,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서서히 굳어가는 구를 집까지 옮기고 그로부터 수십 일이 지난 후에도 그랬다.




이모는 거기서 뭘 만들어?
라고 물으면 이모는,
소리를 만들어.
라고 대답했다. 스피커를 만든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뭘 만들어?
향기를 만들어.
그렇다. 방향제다.

이젠 뭘 만들어?
예쁨을 만들어.
뭐겠나? 바로 손거울이다. 나는 이 비유를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어둠을 만들지.

전구다. 나는 이 역시 단박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둠에 대해 자꾸 물었다. 나도 이모처럼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끈기 있게 대답을 해주던 이모는 결국 화를 냈고 나는 울었다. 울면서도 모르는 게 죄냐고 물었다. 이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이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밤은 더디게 왔다.
오래 지속되는 저녁 빛이 우리를 감시하고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도둑질을 하는데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어.
스무 살 넘어 그 시절의 도둑질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담이 말했다.
밤에 이모 앞에서 시치미 뚝 떼고 있으면 이모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만 같았어. 도둑질을 할 때도 도둑질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고. 도둑질보다 하지도 않은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어.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된다.
구의 죽음을.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
어차피 관심 없지 않았는가. 사람으로서 살아내려 할 때에는 물건 취급하지 않았는가. 그의 시간과 목숨에 값을 매기지 않았는가. 쉽게 쓰고 버리지 않았는가. 없는 사람 취급 하지 않았는가. 없는 사람 취급받던 사람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몸을 땅에 묻을 수도 불에 태울 수도 없다.
구는 여기 내 눈앞에 있다.





구가 내 손을 놓는 순간 나는 정말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지어낸 소문을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았고 우리가 다정하게 지낸 시간들이 범죄 같았고 그들의 야유에 굴복하는 것 같았다. 사나운 사람으로 득실거리는 광장 한가운데 내팽개쳐진 벌거숭이가 된 것처럼 외롭고 무서워서, 화가 났다.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이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구에 비하자면 친구나 공부나 학교 따위 너무도 시시했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제각각의 감정이 피어올랐겠지만, 기계 앞에 서면 그 감정을 잊어야 했다. 냉정하게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는 어떤 감정을 품든 위험하니까.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고 생계는 빠르게 망가지니까.





미래에 대한 내 근육은 한없이 느슨하고 무기력했다.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구의 몸이 자꾸 너덜너덜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먹으려 했다. 그의 몸을 물어뜯으면서, 불에 태웠어야 했나, 바다에 뿌렸어야 했나, 그랬어야 했나, 수백수천 번 후회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그러기로 마음먹었고, 법도 총도 신도 지금의 나를 막을 수 없다. 구뿐이다. 구만이 나를 막을 수 있다. 꿈에라도 나타나 내게 무슨 말이든 해준다면…… 그만두라고 하든 계속하라고 하든 그저 바라만 보든, 뭐라도 해준다면. 세상의 잣대로 보자면 나는 미친년이다. 사이코패스다. 인간이 아니다. 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구를 먹는다. 나를 비난하고 가두고 죽여도 좋다. 그 모든 것은 내가 구를 다 먹은 후에. 이 장례를 끝낸 후에. 





뜨거운 하루였다. 세상이 보온밥솥에 담긴 밥 한 그릇 같던 날씨. 사람들은 찐득하게 엉긴 밥알처럼 서로를 못 견뎌했다. 무자비한 태양이 산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열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밤늦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교복도 벗지 않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에 간신히 남아 있던 영양분이 모두 바닥난 느낌이었다. 여름도 겨울도 잔인하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잠들었다가 빗소리에 눈을 떴다. 깜깜한 바깥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내릴 낌새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그 시계의 건전지를 구가 두어 번 갈아줬었다. 이모도 나도 시계가 멈추는 걸 신경쓰지 않았다. 건전지를 갈아야지, 생각만 하고 아직 멈추지 않은 다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집 안의 모든 시계가 멈춰버렸을 때는 그저 느낌만으로 시간을 점쳤다. 그 시계를 구가 다시 움직이게 했었다.





그즈음 누나는 자주 짜증을 냈고 귀찮다는 말을,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과 니가 알아서 하라는 말을 많이 했다. 예전에는 나를 보면 안쓰럽고 신경쓰여 절로 눈물이 나면서도 그게 내 처지 때문인지 자기 인생 때문인지 헷갈렸는데, 헷갈려서 자꾸 잔소리를 하고 간섭했는데, 더는 헷갈리지 않게 된 거다.

헷갈리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다해서.
내게 줄 마음을 다 줘버려서.
더는 내가 생생한 생물 같지 않아서.





휴가 마지막 날, 담을 먼발치에서 봤다. 아주 잠깐이었다. 야위고 작아졌는데도 어딘가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차고 메마른 돌멩이 같았다. 다가가 말을 걸기는커녕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담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팠다. 아픈 체취가 다가왔다.

이모는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 이모를 갖는 것으로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을 다 써버린 거다. 너무 강력한 행운이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한 거고. 그래.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뭐든 쌍이 있지 않은가. 쌍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들었다. 우주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했다. 아주 거대한 별도 그렇고, 가장 작은 원자도 그렇다고. 그렇다면, 내 인생의 행운에 이모만 있을 수는 없다. 이모를 끌어당기면서도 밀어내는 또 다른 행운이 있어야 했다. 그건 바로 구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구는 돌아온다. 돌아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여기 있으니까. 매일 밤 칼을 갈고 이모의 주파수를 들으며 내린 결론이었다.





경산을 떠나 충청도와 강원도와 경상도를 모두 접하고 있는 작은 마을로 들어갔다. 나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럭셔리 모텔에서 청소를 하고 돈을 받았다. 어린애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사장이 물었다. 등록금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이미 그곳에서 한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대학 이름을 외워둔 터였다. 행정학과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수험서는 들춰보지도 못하고 있다고 대꾸하려고 했다. 삼형제 중에 둘째고 동생도 내년이면 대학에 가야 해서 부모님한테 손 벌릴 상황이 아니라고 넉살 좋게 말하는 연습까지 해두었지만, 그런 대답이 필요한 질문은 듣지 못했다. 사장은 나를 꼬박꼬박 ‘학생’이라고 불렀다. ‘학생’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진짜로 내가 지어낸 거짓말 속의 학생이 된 것 같았고, 위로 언니 아래로 남동생이 있는 삼형제 중 한 명이 된 것 같았고, 행정학과 학생이 된 것 같았다.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할 수도 있다. 사람은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을 이용한다. 사람은 수술을 하고 약을 먹어서 죽음을 미룰 수 있다. 불을 다루고 요리해서 먹는다. 불을 다루기 전에는 생고기 생풀을 그냥 먹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인간은 동족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배가 고프면. 배만 부르면. 허기 때문이 아니라도 먹었을 것이다. 그의 손이 탐나서. 그의 발이 탐나서. 그의 머리, 그의 얼굴, 그의 성기가 탐나서. 지극히 존경해도 먹었을 것이고 위대해도 먹었을 것이다. 사랑해도, 먹었을 것이다. 그들은 미개한가. 야만적인가.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지 않은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며 계급을 짓는 지금은. 돈은 힘인가. 약육강식의 강에 해당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물의 힘은 유전된다. 유전된 힘으로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는다. 불과 도구 없이도, 다리와 턱뼈와 이빨만으로. 인간의 돈도 유전된다. 유전된 돈으로 돈 없는 자를 잡아먹는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좋게 살아간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집에 있는 동안엔 편두통이 도졌을 때 하는 것처럼 집 안을 어둡게 하고 최대한 많이 누워 있었다. 처음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아팠던 20대 이후로 줄곧, 나는 ‘회복’하려면 일종의 생활 개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치워버리기.

미니멀리즘 신봉자인 사사키 후미오의 표현에 따르면 ‘덜 소유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처음 발작이 찾아왔던 초기에 내가 치워버린 건 술, 담배, 독한 커피 정도뿐이었지만, 그 후로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런 것들보다 좀 더 ‘전반적인 과잉’이 진짜 문제라는 걸 안다.

삶의 과잉.

물론 테크놀로지의 과잉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회복 과정에서 내가 접속한 테크놀로지라면 (자동차와 오븐레인지를 제외하고) 유튜브의 요가 비디오뿐이었다. 심지어 그것도 아주 희미한 밝기로 시청했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순 없다. 핸드폰과 달리 불안에는 ‘밀어서 끄기’ 기능 따위는 없으니까. 하지만 기분이 더 나빠지는 건 멈췄고, 그렇게 정체기를 보내고 며칠이 지나니 만사가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회복으로 가는 익숙한 길이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각종 자극제(술과 카페인을 비롯해 위에서 언급한 것들)를 자제하는 것 역시 회복 과정의 일부다.

  그렇게, 나는 다시 홀가분해졌다.





나는 이 책에서 ‘세상은 엉망진창이고 우리는 다 망했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임무는 이미 트위터가 잘 맡아서 하고 있다.





자살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표현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흔히 자살을 ‘저지르다commit’라는 동사로 표현할 때가 많다. 이 표현에는 ‘금기’와 ‘범죄성’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실제로 자살이 범죄였던 시대의 흔적인 셈이다(나는 최근에 ‘자살을 저질렀다’ 대신 ‘자살로 인한 죽음’이라는 표현을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여전히 입에 잘 붙지도 않고 좀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생각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삶은 새의 알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 데다 신성하고 귀하기까지 한 것인데, 이런 삶을 누군가가 스스로 포기하기로 선택했다고 해서 자살을 선택의 문제로 치부하는 건 우리 모두에 대한 일종의 모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자살이 그렇게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자살이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운데도, 살아 있음으로 인한 새로운 고통이 더 끔찍해서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에 대해 말하는 건 불편하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 수치심과 침묵을 조장하는 환경 때문에 사람들은 올바른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더 비정상적이고 기이한 양상의 외로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결과가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병’과 ‘환자’를 동일시하는 습성을 버려야 한다. 사람들 각자가 느끼는 서로 다른 무게에 따라 그들에 대한 이해도 좀 더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걸어서 상점까지 가는 행위가, 1톤짜리 투명 역기를 항상 지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1톤만큼의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물체는 다른 것을 만질 수 있어선 안 된다. 살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말했다. 분명 안 좋은 한 주를 보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를 만진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다. 그것들이 마치 살아 있는 짐승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슈퍼마켓에 있는 물체들도 그냥 평범한 물건은 아니다. 그것들은 '상표화된' 물건들이다. 상품 자체가 물리적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브랜드는 정신적 공간을 공략한다. 브랜드는 어떻게든 우리의 머릿속으로 파고들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오로지 이 과제만을 수행하는 마케팅 심리전문가를 고용한다.





상상해보자.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마다 그 감정의 무게를 측정하는 방법을 만들어놓으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의 정신과 신체를 연결 짓는 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자기 자신의 스트레스의 실체를 깨닫고 거기에 좀 더 잘 대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상상 속의 단위를 만들어 나는 '마음 소요량pg.psychograms'이라고 이름 붙였다.

지하철 타고 출근하기 1.298pg
거래처에서 걸려온 전화 받기 182pg
구직 면접 458pg
뉴스 시청 222pg
회신하지 않은 메일로 가득 찬 받은메일함 321pg
아무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은 내 트윗 98pg
운동하러 안 간 것에 대한 죄책감 50pg
거울 속의 내가 얼마나 늙었는지 유심히 살펴보기 177pg
어제 올렸던 SNS 피드에서 발견한 오탈자 82pg
최근 나타난 신체적 이상 증상을 포털에 검색하기 672pg
온라인 싸움꾼과 한판 붙었을 때 632pg
어색한 데이트 317pg
지나치게 많이 나온 카드 값 815pg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압박감 701pg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수많은 목표 1.293pg

이 마음 소요량 측정법은 아주 주관적인 데다 변동 폭도 매우 심하다. 내 마음을 지하 100미터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들을 인식할 때마다, 나는 반대로 내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것들도 있다고 상상한다.

구름 뒤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태양 -57pg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 -320pg
와이파이 없는 곳에서 보내는 휴가 -638pg
강아지와 산책하기 -125pg
요가 수련 -487pg
좋은 책에 빠져 무아지경 되기 -732pg
고달픈 기차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 -398pg
자연에 둘러싸여 있을 때 -1,291pg
춤추기 -1,350pg
가까운 친척이 수술 후 회복 중일 때 -3,982pg

나는 이것을 ‘마이너스 마음 소요량’이라 부른다. 당신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것들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우리가 탈공업화 사회(지식정보화 사회)로 깊숙이 접어들고 있으며 그 변화의 속도가 지금까지보다 더 빨라지고 있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빠른 걸까? 인텔의 공동창립자이자 바로 이 현상을 예언한 장본인인 고든 무어의 이름을 딴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컴퓨터의 성능은 몇 년마다 두 배씩 향상된다. 이 기하급수적인 기술 발전 덕분에 우리 주머니 속의 조그만 스마트폰이 1960년대의 창고 크기만 한 컴퓨터보다 훨씬 더 높은 성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급속도의 성능 향상은 단지 컴퓨터 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데이터를 담고 있는 아주 작은 비트부터 인터넷 대역폭으로 처리 가능한 대량의 데이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기술적 기기나 수단 전반에 걸쳐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기술이 단순히 발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의 속도 역시 가속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발전이 발전을 증식시키는 셈이다.

이제는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할 때도 컴퓨터를 활용하며 인간의 개입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런 진보와 함께 많은 사람이 ‘특이점’에 대한 우려를(혹은 기대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이 특이점을 비현실적 몽상이나 악몽의 대상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특이점이란 인공지능이 인류 최고의 지적 능력을 능가하는 변곡점을 뜻한다. 그 기점을 지나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낙관론 대 비관론의 비율에 따라) 우리 인간은 기술과 융합하여 함께 발전하고 마침내 불멸의 행복한 사이보그가 되거나, 생각하는 로봇, 노트북, 토스터의 지배를 받으며 그런 기계의 애완인간, 또는 노예, 또는 코스요리 처지로 전락할 것이다.

어느 쪽일지 누군들 알겠는가.





대충만 생각해봐도, 2000년에는 ‘셀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구글은 그냥 존재하는 정도였지 ‘구글’이라는 말 자체가 동사로 쓰이기까지는 아직 먼 길이 남아 있었다. 유튜브도 없었고 브이로그라는 것도, 위키피디아도, 왓츠앱도, 스냅챗도, 스카이프도, 스포티파이도, 시리siri도, 페이스북도, 비트코인도, 트위터 사진 업로드도, 넷플릭스도, 아이패드도, ‘ㅋㅋㅋ’도,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나는 얼굴 이모티콘도 없었다. 위성 내비게이션을 소유한 사람도 거의 없었고, 사진을 볼 땐 사진첩을 책장처럼 넘겨가며 봤다. ‘클라우드’는 비를 내리게 하는 물질을 지칭하는 단어로만 쓰였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글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시대에 뒤지게 될지 느껴지는 것 같다. 겨우 몇 년 후에 다시 보면, 위에 나열한 목록에서 누락된 것들이 민망할 정도로 늘어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곧 출시될 테크놀로지 브랜드와 발명품이 얼마나 많겠는가.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기술이라는 것이 불과 몇 년 만에도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시대에 뒤처지는가. 팩스기, 구형 핸드폰, CD, 전화회선으로 연결하던 모뎀, VTR 또는 VHS 비디오테이프, 최초의 전자책 단말기, 야후의 지오시티(웹호스팅 서비스)나 알타비스타 검색 엔진 같은 것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이런 흐름으로 봤을 때 당신과 내가 특이점에 대해 어떤 관점의 미래상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이 두 가지만은 확실하다. 첫째, 우리 삶은 유례없을 정도로 기술 친화적이 될 것이다. 둘째, 기술 변화는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며 빨라지기만 할 것이다.





가끔 내 머리가 컴퓨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수히 많은 윈도우 창이 화면 가득 열려 있는 컴퓨터. 온갖 폴더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바탕화면. 내 안에는 동그란 무지개색의 로딩 중 아이콘 같은 것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 한다. 수없이 열려 있는 윈도우 중 몇 개라도 닫아버릴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바탕화면을 꽉 채운 아이콘을 몇 개만이라도 휴지통 속으로 던져 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면 나도 좀 괜찮아질 텐데. 하지만 다들 하나같이 너무 필요해 보이는데, 어느 창을 닫을지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이 세상이 이미 과부하 상태인 마당에 내 정신이 과부하되는 걸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우리는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해서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데,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우는 전원을 다시 켜려면, 가끔은 이런저런 스크린을 꺼버릴 수 있을 만큼 용감해져야 한다.

재접속을 위해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한다.





이 세상은 몇몇 측면에선 아주 빠른 진전을 이뤘다. 하지만 그런 변화속도가 우리 모두를 대단히 평온하게 해주지는 못 했다. 게다가 어떤 변화는, 특히 기술을 활용한 변화들은 그 외의 변화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ㅡ 정치.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 이 현상은 부분적으로는 소셜 미디어의 에코 체임버와 키보드 워리어들의 싸움터에서 증폭된다. 에코 체임버나 워리어 구역에서는 타협이나 합의, 객관적 사실 같은 것들은 완전히 구시대적 개념으로 여겨진다. 미국 사회학자 셰리 터클의 말을 인용하자면 "기술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지고, 같은 인간에 대한 기대는 점점 줄어드는" 공간이며,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남들에게 자신을 공유해야 하는 그런 세상이다. 물론 이런 변화에 좋은 측면도 있었다. 뭐든 급속히 퍼지는 인터넷의 속성 덕에 다수에게 대의명분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짜 뉴스, 정치적 악의성을 지닌 정보, 대규모의 온라인 개인 정보 유출 등의 횡행은 우리의 정치를 괴상하고 불가역적인 방향으로 조종하며 변형시키고 있다.

에코 체임버 효과Echo Chamber Effect : 반향실 효과. 갇힌 공간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비슷한 입장의 커뮤니티에서 유통되는 정보만 공유/ 전달/ 증폭되어 기존 신념이 더 강화되는 현상.


ㅡ 일. 로봇과 컴퓨터는 인간의 일을 빼앗고, 고용주들은 사람들의 주말을 빼앗고 있다. 고용은 비인간적 과정이 되고 있다. 일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간이 일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형국이다.


ㅡ 소셜 미디어. 미디어의 소셜화는 급속도로 우리 삶을 집어삼켰다.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콘텐츠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잡지나 마찬가지다. 그게 과연 건강한 활동일까? 소셜 미디어 가입자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하고 사용하는 등의 윤리적 위반 사례도 점점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런 문제 외에도 우리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문제도 많다. 마치 감자가 감자칩 행세를 하듯 우리도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된 상태로 전시해야 한다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최고로 멋져 보이고 신나게 사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 한다면 심리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ㅡ 언어.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영어는 지금까지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의사소통의 보조 수단이 채팅 용어나 초성체, 약어, 이모티콘이나 '움짤' 등의 생성과 진화는 기술 발전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준다(더불어 생각해보라. 수 세기 전엔 인쇄술이 철자법과 문법의 표준화를 이끌었다). 따라서 이제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뿐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도 중요해졌다. 수백수천만 명의 사람이 이제는 대면 대화보다 문자메시지로 더 많은 소통을 주고받는다. 이 현상은 단 한 세대 만에 벌어진 사상 초유의 변화다. 이 변화 자체가 나쁘다고까지 할 건 없지만, 확실히 획기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ㅡ 환경. 일부 과학자들은 우리 행성이 질적으로 새로운 지질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2016년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세계지질과학총회International Geological Congress에서 몇 명의 선도적 과학자들은 우리가 홀로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 즉 인류세로 이미 들어서는 중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급격한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 해수면 상승, 해양 오염, 플라스틱 증가(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플라스틱 생산은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20배 증가했다), 수많은 생물종의 멸종 가속화, 삼림 파괴, 공장식 농어업, 도시개발 등의 현상을 우리 지구가 새로운 휴지기에 이미 도달했다는 증거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현대 생활은 사실상 이 행성을 천천히 '끝장내고' 있다. 사회가 이렇게 유독성을 띄고 있으니 지구뿐 아니라 우리까지 망가지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홀로세Holocene : 마지막 빙하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던 약 12,000년간의 시기.
인류세Anthropocene : 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켜 만들어진 새로운 지질시대.





행복이 뭘까. 어쩌면 행복은 우리 각각의 개인과는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향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 우리가 '베풀 수 있는 것'과 상관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정해진 방법이 없는 커다란 '어쩌면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에밀리 디킨슨이 말했듯 "수많은 지금이 모여 영원이 되는 것"이라면, 그 수많은 '지금'을 이루는 것은 수많은 '어쩌면'들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삶의 핵심은 확실성을 포기하고 삶 자체가 지닌 아름다운 불확실성을 잠자고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우리는 불행을 영업당하고 있다. 왜냐, 불행이야말로 돈이 몰리는 곳이니까. 현대인들에게 가장 장사가 잘되는 것들의 핵심은 결국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영국 패션잡지 <보그>에서 패션 디렉터로 25년간 일했던 루신다 챔버스는 일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어 자신이 떠나온 업계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패션잡지가 떠들어대는 자기 주도권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누구에게든 자기 주도권을 회복했다고 느끼게 해주는 패션잡지는 거의 없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패션잡지나 웹사이트, 소셜 미디어 계정이 파는 것은 일종의 현실 초월성이다. 활로, 탈출구. 하지만 그 길은 보통 건강한 방향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초월하고 싶게 만들려면 먼저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불만스러워지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특정 모델과 같은 몸매가 되고 싶어 그 모델이 홍보하는 다이어트 책자를 살펴보고, 병에 이름이 박힌 유명인의 이미지를 풍기는 향수 제품을 구매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모든 것에 사람들이 치르는 값은 금전적 대가에 그치지 않는다. 물건을 사면 즉각적인 쾌감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는 있지만, 좀 더 길게 보면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좀 더 화려하고 좀 더 매력적이고 좀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더 키우기만 할 뿐이다.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라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탐내라고, 무지개 너머의 황금단지보다도 더 현실성 없는 그런 삶을 욕심내라고 우리는 자꾸만 충동질을 당한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도록 끊임없이 종용당한다. 우리 몸은 너무 뚱뚱하거나, 아니면 너무 말랐거나, 그것도 아니면 너무 처졌다. 피부는 모름지기 딱 알맞게 '햇살을 머금은 윤기'가 감돌거나, 적정한 밝기의 음영을 갖춰야 한다. 피부 미백 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수십 억 달러에 버금가는 비즈니스가 되었으며 해가 갈수록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있다.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그렇게 괜찮은 수준은 아니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비즈니스 업계가 이용해먹으려는 핵심이다. 비즈니스 마케터 로버트 로젠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14년 당시 로젠탈은 <패스트 컴퍼니>에 기고한 글에서 "성공적인 마케터가 되려면 제품의 특징이 아니라 제품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라고 썼다. 이 정도면 특별한 악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덧붙인 말에 따르면 그 혜택엔 종종 '심리적 요소'가 포함되며, '공포Fear', '불확실성Uncertainty', '의구심Doubt'을 일컫는 FUD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자기 행동 방식을 중단하거나 고민하고 바꾸게 만들려는 의도로 여러 비즈니스에서 공공연히 사용하는 아주 흔한 방식이다. FUD의 세 가지 심리 요소는 매우 강력해서 경쟁자를 상대로 사용하면 핵무기급의 충격을 가할 수도 있다.





광고캠페인이 대놓고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심리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광고에 나오는 아이템이 한 벌의 바지로 얻을 수 있는 '쿨함'이라고 치자. 그러면 우리의 잠재의식은 그 '쿨함'을 소유해야 할 것 같은 압력을 느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느라 많은 돈을 쓰고 난 뒤에는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너무 많다. 물건에 대한 갈망이 물건을 소유한 후 만족으로 바뀌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족하지 못한 우리는 더 많이 갈망한다. 그리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우리는 더 갈망하라고 충동질 당하지만, 그런 갈망은 오로지 더 많은 갈망으로 이어질 뿐이다.

결국 우리는 중독자가 되라고 부채질당하는 셈이다.





사회의 조류가 우리를 특정 방향으로 끌고 가더라도 만약 그 방향이 우리를 불행에 빠뜨려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수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진실을 향해, 수많은 딴짓거리가 숨겨둔 진실을 향해 물을 거슬러 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생사가 거기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인류에 시간 개념이 늘 있었던 건 아니다. 고대에 '5시 15분 전'이라든가 '4시 45분' 같은 개념이 얼마나 무의미했겠는가. 알람을 놓치는 바람에 9시 임원 회의에 지각하게 된 원시인이 스트레스에 찌든 모습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그려진 동굴벽화는 아직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옛날 옛적의 시간은 그냥 두 종류였다. 낮과 밤. 밝은 때와 어두운 때. 깨어 있는 시간과 잠들어 있는 시간. 물론 다른 종류의 시간도 있긴 있었다. 식사 시간, 사냥 시간, 격투 시간, 휴식 시간, 오락 시간, 키스 시간 등. 하지만 이런 시간은 시계에 지배되지 않았다. 시계의 수많은 숫자 조합과 영겁의 눈금에 얽매여 인위적으로 구획된 시간이 아니었다.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급변은 겨우 10년 남짓한 기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며, 좋고 나쁨을 떠나 이런 변화가 온라인상에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894년에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라는 작품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인간이 궁핍에서 점점 더 해방될수록 전신, 전화, 책, 종이, 신문잡지도 점점 더 많아질 것이고, 그럴수록 모순된 거짓과 위선을 퍼뜨릴 방법도 더 많아질 것이고, 그럴수록 인간은 점점 더 분열되고 결국 비참한 존재로 전락할진대, 참말로 우리 눈앞에서 이 모든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그 속도도 너무 빨라서 우리가 변화의 장단점을 미처 살펴볼 틈조차 주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빠를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수많은 것이 도태되어 우수수 사라지고, 숱한 정보가 밀려들고, 온갖 것이 테크놀로지로 얽히고 설켜 있다. '세계의 뇌'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들리긴 해도 지금의 상황에 꼭 들어맞는 비유 같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세계의 뇌 속에 들어 있는 신경세포다.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세포에게 끊임없이 송신해대고 과잉 적재된 온갖 것을 앞뒤로 떠넘긴다. 우리는 멘붕에 빠진 행성에 거주하는 과부하된 신경세포들이다. 언제 터져 버려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신경생물학자들은 '미러링(무의식적 모방)'이 우리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가 서로 교류하는 동안 뇌에서 활성화되는 신경회로의 작용임을 밝혀냈다.

연결의 시대엔 '거울'도 더 커진다. 끔찍한 사건으로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면 그 두려움은 인터넷에서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사람들이 분노하면, 그 분노는 번식하듯 불어난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감정을 드러내면, 그 감정만큼은 비슷하게 느낀다. 가령 온라인에서 벌어진 문제로 누군가가 나에게 미친 듯이 화를 낸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격분한 그의 감정은 십중팔구 나에게 옮겨붙을 것이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매일 이런 일을 목격한다. 사람들은 말싸움을 벌이고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사수하다시피 하면서도, 상대의 감정 상태는 모방한다.





자신의 증상을 구글에서 검색하지 마라. 일곱 시간 동안의 검색 끝에 자신이 저녁밥도 못 먹고 죽게 될 거라고 믿고 싶은 경우가 아니라면.





등급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지 마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얻으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특징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라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그런 그도 굿리즈Goodreads 사이트에서 평균 3.7점의 중간급 별점을 받는다.





"파이프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르네 마그리트는 말했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영원히 좁혀질 수 없는 갭이 존재한다. 내 절친의 온라인 프로필은 실제 내 절친과 다르다. 온라인에 업데이트한 '공원에서 보낸 하루'는 실제 공원에서 보낸 하루가 아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세상에 떠들어대고 싶은 욕망은 내가 지금 얼만큼 행복한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짜 행복은 자기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않을 때 온다.

'기표', '기의' : 소쉬르의 언어학 개념. '기표'는 소리나 글자 같은 기호 형태, '기의'는 소리나 글자로 표현된 의미(관념)를 말한다. 사과(기의)가 우리나라에서는 '사과', 미국에서는 'apple', 독일에서는 'apfel'이라는 글자(기표)로 각각 다르게 표시되는 것처럼,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필연적 상관관계가 없다는 소쉬르의 주장을 빌려 현실과 온라인의 무관함을 비유한 말이다.





우리가 보는 하늘은 그냥 저 바깥에 있는 우리와 상관없는 세상이 아니다. 하늘을 본다는 건 우리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는 것이다. 물리학자 칼 세이건이 자신의 역작 <코스모스>에서 했던 말처럼 "우리 DNA 속의 질소, 우리 이빨에 있는 칼슘, 우리 혈액 속의 철분, 우리가 먹는 사과파이에 들어 있는 탄소는 전부 별들이 폭발하고 죽어가면서 그 안에 있던 물질이 방출되어 만들어지는 원소들이다. 우리는 별의 알갱이들로 만들어졌다".

프랜은 시트콤 「프렌즈」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했다. ‘프렌’이라고 하면 어색해서 ‘프랜’으로 했어요. 한국어는 아이가 자연스럽죠. 강사와 수강생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어이나 아이나……. 어쨌든. 「프렌즈」를 좋아하나 봐요? 프랜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프렌즈」가 제일 성공한 드라마니까요. 수강생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기지? 프랜은 펜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했다. 쫄보들. 나는 시시한 드라마나 만들면서 시간을 죽이진 않을 거야. 바로 OTT로 직행이다.





메타플렉스는 여타 대형 몰과 달리 지붕이 없다. 1851년 런던박람회의 조셉 팩스턴으로부터 시작된 미래주의적 관습에 의해 모든 건축가와 계획가들은 외부 자연으로부터 격리되고 보호되는 공간을 상상하고 창조했다. 온도와 습도가 완벽히 통제되고 관리되는 시스템. 그러나 mall은 본래 걷기 좋은 산책로라는 뜻이다. 메타플렉스 프로그래머들은 미래의 몰이 진짜 mall이 될 거라고 예측했다. 몰이 화려해질수록 사람들은 낡고 녹슨 옛 동네에 낭만을 느끼고 디지털이 일상이 되면 아날로그의 가치가 상승한다. 메타플렉스는 거대한 지붕 아래 조성된 억지 정원이 아니라 진짜 가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자연의 이치를 감각하는 장소를 제안한다. 메타플렉스의 목표는 자연과 구분 불가능한 인공을 현실에 겹치는 것이다. 전 지구에 몰적 층위를 공존시키기. (메타플렉스 웹사이트의 nature 항목 참조.) 





프랜은 메타북스에 지원할 때만 해도 그냥 서점이겠거니 했다. 책을 좋아하는 룸펜이나 오타쿠, 국문과나 영문과 출신의 문과생들이 일하는 잉크와 종이 냄새 가득한 아날로그의 성지.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메타북스는 모르는 기능이 잔뜩 있는 전자 제품 같았다. 외관은 시계인데 단순한 시계가 아니라는 거다. 그럼 뭔데? 미래. 더 나은 삶을 위한 최선의 선택, 우리 모두를 잇는 연결, 그 진화의 현장. 





최종 심사 위원으로 마셜 매클루언이 올 거래.
그 사람 안 죽었어?
죽었지. 근데 토론토 대학 AI 리서치랩에서 되살려 냄.

마셜 매클루언은 방대한 아카이브와 생전에 촬영한 뇌 지도 영상을 바탕으로 가상 인간으로 재탄생했다. 유족들은 디지털 합성된 마셜 매클루언의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인간적이야…….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말해 주세요.
먼저…… 유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야기했다. 프랜이 금연 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봤다는 제보가 있었다.
흡연 구역은 지구 끝이잖아요. 쉬는 시간 동안 갔다 올 수도 없어요.

프랜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었어.
그건 오해예요.
손님이 무라카미 하루키 책 어딨냐고 물으니까 교보문고에 있다고 했다면서.
그건 사실이잖아요……라고 프랜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버키의 제자이자 수석 프로그래머인 쇼지 사다오는 「월드 게임」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생체 정보를 동기화했어. 그의 세포가 비트로 치환되고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코딩됐지. 한 사람이 곧 세계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프로그래머들은 「월드 게임」에서 여러 변화를 시도하고 그것들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예측할 수 있었어. 세상 안에 세상을 만들어 놓은 거지. 단 하나의 입자까지 완전히 동일한 세계.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갖은 고생 끝에 구현은 했지만 문제는 「월드 게임」을 관찰하거나 조작하는 순간 생겨났어. 단 한 번의 관찰이나 조작만으로도 세계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어. 원래의 세계를 예측하기 위해 만든 건데 원래의 세계와 달라져 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월드 게임」으로 원본의 세계를 예측할 수 있는 건 오직 단 한 번뿐이라는 거지. 그 사실을 깨달은 프로그래머들은 쇼지 사다오에 이어 부수석 프로그래머를 컴퓨터에 갈아 넣은 후 「월드 게임」을 봉해 버렸어. 아무도 보지 못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월드 게임」은 세상과 100퍼센트 동일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을 거야. 우리가 그 과정을 관찰할 순 없지만 말이야.





그리스어에서 형상과 이데아가 보다, idein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거 알지?
아니요.
호메로스 작품을 보면 보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아홉 개가 넘거든. horan, idein, leussein, athrein, theasthai, skeptesthai, ossesthai, dendillein, derkesthai, paptainein. 그때까지 보다라는 말이 추상화되지 않았다는 뜻이야. 예를 들면 데케스타이는 강렬하게 응시하는 시선을 뜻하는데 뱀의 눈에서 따온 말이야. 테스타이는 놀라서 크게 뜬 눈, 오세스타이는 뭔가 의심하는 눈. 모든 보다라는 단어가 특정 행위와 연결된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거지. 객관적이고 초연한 시선, 이른바 관찰은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불가능했다는 거거든.





행기에서 MEQs를 다시 했다. 그걸 왜 가져왔어? 프랜이 말했다. 나는 질문이 재밌어서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우리는 태평양 위를 날고 있었다. 창밖으로 끝없는 바다의 표면이 보였다. 제트 기류가 비행기를 감쌌고 몸이 기우뚱하며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봐 봐. 내가 설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상 시험에 대한 질문이 아닌 거 같지 않아? 프랜이 질문을 보려고 고개를 숙였다.

경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어렵다는 느낌은 어느 정도입니까.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가 없다는 감각은 어느 정도입니까. 

사랑하는 베로니크. 침울한 절망감 속에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우리 가족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고, 최대한 좋게 말해 불확실한데, 어쨌든 2일 이전에는 못 돌아오는 게 확실해. 따라서, 황홀하리라 예측되는 수도원으로 널 보러 가는 게, 매력적이리라 예측되는 너의 테리블 프레르terribles freres를 만나는 게, 번개처럼 빠르리라 예측되는 너의 늙은 말을 타는 게, 이미 끔찍하다는 걸 알고 있는 매력적인 베로니크를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얘기지. 오슈의 아일랜드 상륙작전이 실패한 후 나폴레옹이 말했듯, "내 후회는 무한하다." 사랑하는 베로니크, 진심으로 미안해. 물론 너도 내가 미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만. (p30)

테리블 프레르terribles freres : 무서운 오빠들. 당시 유행하던 '앙팡 테리블'을 변용한 표현.

루이 라자르 오슈Louis Lazare Hoch : 프랑스 대혁명기의 군인. 1792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에 종군했고 1796년 아일랜드 원정군 사령권으로 임명되어 브레스트 항을 출항했으나 폭풍우로 함대가 흩어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어떻게 지내고 있어? 많이 보고 싶어. 내가 여기서 보내는 바보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생활이 너를 기쁘게 할지도 몰라. 필리프는 나보다 훨씬 많이 마시고, 나보다 조금 더 먹고, 우리가 빌린 플리머스를 훨씬 더 빨리 몰고, 살짝 미치광이이면서도 다정해. 하여튼 필리프는 스물네 살이고 문학을 비웃지. 사강은 멀리 있어. 모든 게 다 괜찮아. 나는 건강도 잘 챙기고, 아침에는 수상스키를 타고(지금은 아주 잘 타), 삼나무 사진을 찍고, 오후에는 당나귀 사진을 찍고, 저녁에는 술에 취해 춤추고, 밤에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젊은이들처럼 길거리를 누비고 다녀.

완벽해. 그래도 나를 잊지는 마. 이번 겨울은 나쁘지 않을 거야. (p46)

필리프 카르펜티에르Phillippe Charpentier : 사진작가이자 사강의 연인.

플리머스Plymouth : 1928년부터 2001년까지 크라이슬러와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 제조하던 자동차 브랜드.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일광욕을 하고 있어. 나중에 너랑 같이 이곳에 와야 할 것 같아. 나는 1일에 파크 애비뉴 34번가의 뉴욕 밴더빌트 호텔로 돌아가. 그쪽으로 편지해. 내가 너에게 필명을 하나 만들어주려는데, 내가 지금까지 본 성性은 하나같이 애매하기 짝이 없지 뭐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 부모님을 스위스나 이누이트 사람으로 만들고, 듀튼이 네가 쓴 글에 돈을 지불하게 하는 일이야. 그건 정말 쉬운 일이야. 나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2위, 뉴욕에서는 1위를 달리고 있고 달러 돈방석 위를 뒹굴고 있거든.

윌도프에 살면서 내가 지명하는 남자친구들을 만나며 자유롭게 지내는 건 네게도 엄청나게 재미난 일이 될 거야.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p58)

듀튼Dutton : 사강 작품을 출간하는 미국의 출판사.

윌도프Waldorf : 맨해튼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로, 당시에는 세계 최대의 호텔이었음.

네가 많이 보고 싶다. 브뤼노, 쉬즈, 나, 우리 모두 네 얘기를 자주 해. 이곳에서 함께 웃을 수도 있었는데, 미치겠다.

돌아가면 우리 열심히 토론하자. 미국과 우리에 대해서. 왜냐하면 내가 너를 잃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구멍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그건 아마 내 잘못일 테고, 그래서 신경 쓰여. 

나와 함께 프랑스 남부에서 열흘 보낼 수 있게 일정을 조정해줄래? 나는 1월 초에 거기 있을 거야. 내일은 뉴욕, 뉴욕 시 파크 애비뉴 34번가 밴더빌트 호텔에서 다시 집결할 거야. 그쪽으로 편지하고, 날 잊지 마. 곧 보자. (p62)

추신.

말론 브랜도를 봤어, 푸른 눈에 대단히 영민한 사람이야. (p64)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 : <대부>, <지옥의 묵시록>으로 유명한 미국의 배우.

다카르에는 헤이그가 있지만 볼링은 없어. 그대신 바다가 있지, 하지만 레스키나드는 없어. 결론은? 난 25일 아침에 돌아가. 사랑해, 오랜 친구. 쇼크Chocques에서 너에게 전화할게. (p66)

헤이그Haig's : 딤플 위스키의 시초.

볼링Bowling : 버번 위스키의 일종.

레스키나드L'esquinade : 프랑스 남부 칸 서남쪽에 있는 해변.

우리 엄마는 오토바이를 한 대 가지고 있는데 이상하게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현상을 보이며ㅡ클러치에 대한 그녀 나름의 개념이 있어서ㅡ 그냥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어. 이제 줄리아에게 가르쳐주는 수밖에. 오토바이 뒤를 따라 달려가면서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아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느끼며 "클러치, 핸들, 클러치!"하고 소리치는 건 정말이지 진빠지는 일이야. (p68)

이제 널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 네 편지를 필두로 해서 말이지. 날씨는 화창하고 우리는 작은 바닷가재를 먹고, 그레이엄은 망아지처럼 걸어가고, 나는 네가 많이 보고 싶어. 곧 보자, 프랑수아즈. (p69)

그레이엄Graham : 그레이엄 형제가 1927년에 설립한 자동차 회사 그레이엄 페이지Graham-Paige에서 생산한 자동차. 1940년에 자동차 생산을 중단했고, 1962년에 완전히 폐업했다.

우울해하지 마. 그럴 만한 심각한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예를 들어 보노Bonneau를 생각하거나 아니면 부사르Boussard 같은 여자애들을 생각해 봐. 물론, 비교한다고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지만 언젠가는 너 스스로 무언가를 이룰 거라고 나는 확신해.

"조숙함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성급함은 지성에 이르는 탁월한 상태다." (프랑수아즈 사강), 하하. 사람들이 행하는 악행에 관한 와일드의 명언을 떠올릴 수가 없네. 반대로, 너무나 매력적인 <서푼짜리 오페라>의 짧은 곡 하나를 배웠어. 뭐냐면, 너도 알고 있겠지만......

"더 낫구나 / 훨씬 / 그 마음을 강요하지 마..." 대단히 유쾌한 곡조에 맞춰서. (p74)

나의 귀여운 베로니크. 네 편지는 눈물 나게 감동적이었어. "너무나 매력적이고, 나와 내 가족을 많이 웃게 했고, 극도의 권태로부터 나를 구해준 베로니크가 정작 자기 자신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가엾어라. 그렇게 믿게 내버려둔 내가 얼마나 역겨웠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어.

간단히 말해, 이번에는 내게 후회가 찾아왔어. 이 문제에 관해서 내게 편지해줘. 농담 아니야. 넌 '완벽'했어. 네가 없는 오스고르Hossegot는 을씨년스럽지만 생장드뤼즈Saint-Jean-de-Luz로 가는 몇몇 코스나 바닷물에 젖은 채 뜨거운 모래 위에서 즐긴 낮잠은 잊지 못 할 거야. (78p)

타자기로 112페이지째 작업하고 있고, 50페이지는 더 써야 끝날 것 같아. 저명한 문학비평가 클로드 로이Claude Roy가 그 글을 읽고 정말 훌륭하다고 내게 말해줬어.

간단히 말하면, 나는 무척 기쁘고 오로지 기쁘기만 해. 한가지 골치 아픈 건, 기(슐러)가 뤽(주인공)과 닮았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인생은 픽션을 능가하는 법이니까 모든 게 유쾌하게 섞이면 좋겠어. 네가 어디 있는지, 뭘 하는지 신께서 아시려나? 설마 임신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빨리 돌아와, 내가 널 돌봐줄게. 그렇지 않더라도 빨리 돌아와. 네가 없으니 지루하단 말이야. 얘, 미치겠어.

네가 나를 보면 아마 변했다고, 아주 많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할 거야. 소설이 나를 정화했어. 어쨌거나 돌아와. 그리고 서둘러. 농담은 충분히 했잖아! 콘스탄티노플 거리 만세(네가 돌아온 후 힘든 며칠을 보낼 수 있게 도와줄게). 키키 프랑수아즈. (82p)

요약하자면, 나는 죽을 만큼 지겨워. 작업을 하기 힘들 정도로. 나의 유일한 위안은 바로 너 그리고 내가 곧 가지게 될 애스턴이야. 밀리 만세! 날씨는 좋아. 주목. 그래서 우리는 마그뉘스와 모래언덕에서 나체로 돌아다닐 거야. 아나벨과 마그뉘스가 벌거벗고 있는 모래언덕 옆의 모래언덕에 내가 벌거벗고 있는 게 짜증스럽지만, 어쩔 수 없어. 이건 정말 부조리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 나는 루소를 읽는데 무척, 무척 재미있어. 그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면 포복절도하게 돼. 

하지만 루소를 읽으러 카나리아 제도에 가다니, 하고 넌 말하겠지... 크노의 병사가 말하듯 멍청하게 굴지 말아야 해. 우리는 18일에 돌아가. 다행히 16일에는 내 영사가 나를 기다리는 마드리드에 있을 거야. 그쪽으로 편지해줘. 페닉스 호텔Hotel Fenix. 그렇게 쓰면 충분할 거야. 사랑해, 플릭. (85p)

애스턴Aston : 영국의 유명한 스포츠카 애스턴 마틴을 말함.

크노Queneau : 언어유희와 실험소설을 쓴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

나는 여행에 어울리도록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야, 한 번 더 그 사실을 확인해. 여긴 괜찮아, 무엇보다 페테르 때문에, 하지만 처음에는...... 어휴. 그래서 이제 더는 여행을 안 할 거야. 플록과 함께 하는 여행 빼고는. 왜냐하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우리 각자 알고 있듯이 짓궂은 장난의 연속일 테니. (98p)

나의 다음 책에는 프랑수아즈 P. 사강이라고 쓰고 말 테야. 두고 봐. 사람들은 내가 비밀 결혼을 했다고 여길 거고, 그 상대가 '플릭'이라고 믿겠지. 후후후, 그렇게 할 거야! (99p)

마뉴가 네게 우아한 안부를 전해달래. 그가 창꼬치 한 마리를 낚았는데, 수탉처럼 붉은 데다 얼이 빠져 있었고, 나는 그 물고기가 죽을까 봐 겁이 났어. 흔히 말하듯, 열대지방은 리지외와 다르네. 낚시한 물고기들을 바라보면서, 오늘 오후에, 나는 나의 좌우명을 찾았어. "죽든가 달아나든가." (100p)

리지외Lisieux :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지방. 카르멜회 수녀이자 사후에 성녀로 추대된 테레즈가 살았던 곳으로, 루르드 다음으로 널리 찾는 성지순례지.

산책하고 나서는 폴 모랑의 칵테일파티가 있으니 아마 이 편지는 취한 상태에서 끝맺게 되겠지. 그래서 난 지금 이 순간 네가 많이 보고 싶다고, 너야말로 내가 변함없이 보고 싶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해두려고 해. 사람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똑똑해. 무엇보다, 무엇보다 그들은 절대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너는 그런 사람이지. 그건 어마어마한 힘이고, 나는 네가 오랫동안 그 마음을 간직해주기를 바라. 이건 공연한 미사여구가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우리는 한계의 한가운데에 살아가고 있어. 프랑크조차 자기의 한계가 있어.

말이 났으니 말인데, 난 이제 그게 뭔지 모르겠어. 방금 데옹과 한 잔 했어.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야. 그런 사실이 놀랍고 요컨대 마음에 들어. 프랑크의 원고, 넌 어떻게 생각해? 네가 돌아오면 술을 곁들인 멋진 지성인의 저녁 식사를 하자. 벌써부터 기뻐. 다만 식사 10분 전에 내가 내 머리칼을 쥐어뜯을 테니 너도 나의 불안, 공포를 함께해줘야 한다는 점만 빼고. (p108)

폴 모랑Paul Morand : 사강보다 쉰 살 가까이 나이가 많았던 프랑스의 작가이자 외교관.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한 플릭과 플록은 새로운 이동 수단을 물색한다.

플릭 : 걸어가면 어떨까, 플록?

플록 (우아하게) : 그걸 말이라고 하니, 샤를!

그렇게 말하고 나서 플릭과 플록은 엉덩이 통증 치료법에 대해 여러 의견을 교환하고 나서 다시 아르니카를 언급한다.

플록 : 저기 봐, 아르니카야!

완치된 후 플릭과 플록은 말을 듣지 않는 근육을 풀고자 다양한 운동을 하기로 한다.

네게 편지 쓰는 게 힘들어. 쇄골이 부러져서 손목으로만 글을 쓸 수 있는데, 이제 손목이 진저리를 치고 있거든. 사랑하는 베로니크, 우린 정말 운이 좋았어. 너를 다시 만나 새로운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 간절해. 이제 때가 됐어. 내게 편지해. 네가 보고 싶어, 네가 다쳐서 당황스럽고 슬퍼, 사랑해. (p112)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는 “어디서 가져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져가느냐가 중요하다”라고 했어요. 빌려 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으세요. 적합한 예의와 절차를 거쳐 내 것으로 만들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져가면 돼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려면 어렵습니다. 내가 모아 놓은 문장에서 출발해 보는 거예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소설의 문장을 수집해 카피에 응용하는 나름의 노하우를 체득한 뒤로는 ‘문장 수집’을 게을리할 수 없었어요. 어떤 문장과 그 속의 단어가 꼭 필요할 때 찾아볼 수 있는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게끔 정리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내가 선택한 좋은 문장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기도 했어요. 책에서 발췌한 탁월한 문장을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고 씀으로써 나의 문장을 쓸 때 이 느낌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품질 좋은 물건을 사용해 본 사람이 훌륭한 제품을 만들 수 있듯, 좋은 문장을 지속적으로 읽고 베껴 쓰면 나도 언젠가는 그 감을 익혀 내 것에 충분히 녹여 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실제로 감각적인 문장에 쓰인 단어나 시적인 리듬감 등을 익혀 두니 가끔 저도 모르게 그런 문장을 쓰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능하면 문장력이 좋은 책 위주로 읽으려 해요. 말장난이 심하거나 트렌드만 반영해 사람들을 자극하는 책은, 읽어서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선택합니다. 물론 스토리에만 주목해 책을 골라 읽을 때도 있어요. 마치 영화를 보듯이요. 주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가운데 문장력과 더불어 스토리에 충실한 작품이 많죠.

작가들 사이에서도 필사에 대한 찬반 논쟁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왜 하는지 모르겠다, 시간 낭비다, 그 시간에 차라리 내 글을 하나라도 더 쓰는 게 낫다,라고 하는 분들도 적지 않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필사는 훌륭한 한 줄을 뽑아내기 위한 ‘도움닫기’라고요. 도움닫기는 높이뛰기, 멀리뛰기, 창던지기에서 뛰거나 던지는 힘을 끌어 올리기 위해 구름판까지 일정한 거리를 달리는 일이죠. ‘일정한 거리를 달리는 일’, 이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필사의 정확한 비유입니다. 한 번에 끝나는 게 절대 아니고 꾸준히 해야 하는 거예요. 더 높이 성장하기 위해선 일정한 거리 달리기를 멈추면 안 돼요. 책을 읽다 보면 ‘아, 이 문장을 내가 썼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가 있는데요. 저는 그런 문장을 보면 질투가 생기는 데서 끝나지 않아요. 그 문장을 베껴 써서, 작가가 이 문장을 뽑았을 때의 감각을 저도 한번 느껴 보려고 하죠. 때로는 문장 정도가 아니라 한 꼭지를 다 베껴 쓰기도 하는데, 이건 그 꼭지의 기승전결 패턴을 따라가 보기 위해서예요. 

물론 카피 쓰는 모든 분이 필사를 하진 않을 거예요. 여전히 필사에 대해 부정적인 분들도 있을 테고, 이쯤에서 나도 한번 해 볼까 하는 분도 있을 텐데요. 결정은 각자의 몫입니다. 다만 경험은 한번 해 보면 좋겠어요. 필사가 좋은 점이 또 있어요. 잘 이해되지 않던 문장을 옮겨 적으면서 저도 모르게 그 문장이 제대로 이해되기도 하더군요. 정여울 작가도 『끝까지 쓰는 용기』에서 ‘필사는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며, 필사야말로 텍스트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은 읽기 방법이 필사입니다. 시간도 참 잘 가고요, 무엇보다 뭔가 해낸 것 같은 성취감과 쾌감이 따라와요. 타인의 글이지만 제 손으로 다시 한 번 썼다는 데서 오는 착각의 뿌듯함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통해 계속해서 쓸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믿어요. 





내 눈앞의 공간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는 거예요. 그런 다음 한가할 때(저는 예전에 회사에서 졸음이 쏟아질 때 이 훈련을 했답니다) 사진을 보면서 보이는 대로 씁니다. 별로 어렵지 않죠? 사물의 색이나 질감을 나타내는 표현도 찾아 써 보고 공간의 온도, 습도 같은 것도 적어 보세요. 단순히 ‘그때 온도가 25도였다’라고 쓰는 게 아니라 온도가 25도일 때의 분위기를 적는 거죠.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바람이 분다’, ‘공기가 미지근하다’처럼요. 제가 이 과제를 내면 가끔 사진을 보면서 개인적인 느낌을 추상적으로 쓰는 분도 있어요. 그게 틀린 건 아니지만 이 훈련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쓰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느낌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집중해서 쓰는 것이 좋습니다.





『멜로가 체질』 한 장면을 볼까요. 여자 주인공(드라마 작가)이 넋이 나간 듯 바닥에 누워 있습니다. 그 앞으로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남자 주인공(감독)이 케이크와 커피가 든 쟁반과 함께 노트북을 쓱 밉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누워서라도 쓰세요.” 감독은 작가가 원고를 써 줘야 촬영할 수 있으니, 당신이 힘든 상황인 건 알겠는데 일단 좀 써 달라는 얘기입니다. 그러자 작가가 그 노트북을 힐끗 보며 이렇게 답합니다. “참 따뜻하게 잔인하다.” 





인스타그램에서 요조 작가의 신간 안내 페이지를 본 적이 있어요. 거기서 책 속에 나오는 한 줄을 카피로 활용했더군요. “아주 용감하게 겁이 나.” 겁이 나는데 용감하게 겁이 난대요. 보통은 ‘너무 겁이 나’, ‘무서워서 겁이 나’처럼 쓰는데, 겁난다는 말 앞에 ‘용감’을 붙인 거죠. 제가 이 한 줄을 보고 받은 느낌 그대로 해석하자면 겁이 나지만 그 겁이 너무 용감해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을 표현한 듯해요.





카피가 쉽게 써질 때를 경계해야 합니다. 쉽고 빠르게 써질 때는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대부분 진부한 표현이나 습관적으로 따라 붙는 말을 걸러 내지 않고 그냥 썼을 경우가 많습니다. 카피라이터는 진부한 표현이라는 편안하고 쉬운 길로 뻗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뻔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진 않은지, 우리 제품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서요. 쓰는 사람이 쉽게 썼다면 의심해 봐야 합니다. 당연하다는 안일함에서 파생된 결론이 내 카피로 완성됐을지 모르니까요.





카피를 쓸 때는 이것을 읽을 사람의 기분까지 추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쇼핑의 B안’이란 타이틀을 쓴 적이 있어요. 그 전의 타이틀은 ‘B급 제품 리퍼브 세일’이었어요. 리퍼브 세일은 고객의 변심으로 인해 반품됐거나 작은 스크래치 때문에 제값에 팔지 못하는 물건을 모아 할인하는 거예요. 근데 제 경험상 리퍼브 세일이라 할지라도 가격이 매우 낮아진 제품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어요. 정가와 얼마 차이 안 나는 경우도 있죠. 세일은 세일이지만 고객들이 인정할 만큼 저렴한 게 아닌 거죠. 그런데 커다랗게 ‘B급’이라는 말까지 적혀 있는 거예요.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이 제품을 구매하려던 고객들이 이 단어를 보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래서 저는 ‘B급’, ‘리퍼브’, ‘세일’ 이 세 단어를 다 빼고 써 보기로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게 ‘쇼핑의 B안’이고, 서브타이틀은 “모두에게 A안이 최고의 해답일 순 없죠. 당신에게는 B안이 정답일 수 있습니다”였습니다. 누군가는 눈여겨보지 않을지 모르는 제목일지라도 다방면으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페이지에서 물건을 보고 지갑을 여는 고객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말이죠.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흉측스런 벌레로 변해버린 것을 발견했다. 딱딱한 각질로 된 등을 대고 누워 있는 그는 고개를 조금만 쳐들어도 갈색의 불룩한 마디마디로 나누어진 배를 볼 수 있었다. 그 배 위에는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떨어질 것처럼 이불의 한 모퉁이가 가까스로 걸려 있었다. 다른 부분에 비해 비참하게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이 그의 눈앞에서 속절없이 간들거렸다. 

그레고르가 이미 몸을 반이나 침대에서 일으켰을 때―이 새로운 동작은 힘든 일이라기보다 차라리 유희 같아서 좌우로 몸을 흔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누가 와서 그를 도와준다면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힘센 사람 둘―아버지와 하녀가 생각났다―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그들이 와서 나의 둥근 등 밑에 팔을 집어넣고 몸을 굽혀 나를 침대 밑으로 내려준 뒤 내가 몸을 뒤집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버티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조그마한 발들도 신경을 회복하여 제구실을 하겠지. 문이 잠겨 있는데, 와서 도와달라고 정말 소리를 쳐야 되나? 이런 어마어마한 곤경 속에서도 이 생각을 하자 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레고르는 방문객의 인사 첫마디만 듣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지배인 자신이었다. 어째서 그는 조금만 태만해도 곧 의심을 사는 그런 회사에서 근무하는 팔자를 타고났을까? 도대체 모든 직원들이 깡그리 불량배란 말인가? 그래, 그 직원들 중에는 아침 두서너 시간을 회사를 위해 전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얼까지 빠져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그런 충실하고 희생적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사환을 보내 문의해도 충분한 일이 아닌가? 어쨌든 물어봐야 할 일이 있다 치더라도 꼭 지배인이 직접 와야만 하는가? 그럼으로써 이 수상한 사건의 조사는 지배인의 분별에만 맡겨질 수 있음을 죄 없는 가족에게까지 알려야만 하는 것일까? 확고한 결단이 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들로 인해 흥분하여 그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큰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해서 요란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레고르는 천천히 의자를 문 쪽으로 밀었다. 다시 그 의자에서 몸을 뗌과 동시에 문을 붙들고 꼿꼿이 섰다―그의 발끝에서는 찐득찐득한 물질이 약간 분비되고 있었다―그러고 나서 긴장을 풀고 잠시 몸을 쉬었다. 그 다음 입으로 구멍에 꽂힌 열쇠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가 하나도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무엇으로 열쇠를 조인담!―그러나 이가 없는 대신 힘센 턱이 있었다. 턱의 힘으로 열쇠를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분명히 어딘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거무튀튀한 액체가 입에서 나와 열쇠 위로 흘러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손 잡을 곳을 찾다가 이내 조그만 비명과 함께 숱한 발들을 아래로 한 채 엎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쓰러지는 순간 그는 오늘 아침 처음으로 육체적 안정감을 느꼈다. 그의 발들은 딱딱한 마루를 딛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발들이 그의 뜻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을 의식하고는 기뻤다. 심지어 발들은 그가 가려는 곳으로 그의 몸을 운반시켜주려고 애쓰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레고르는 새로 꾸며야 할 자기 생활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볼 충분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마룻바닥에 엎드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되고 보니 이 높고 텅 빈 방은 오히려 그에게 불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방은 5년 동안이나 자신이 살아온 방이었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갔으나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약간 등허리가 울리고 머리를 들 수 없었지만 이곳이 더 아늑한 맛을 주었다. 다만 몸집이 너무 넓적해서 소파 밑으로 충분히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레고르는 밤새도록 소파에 누워서 잠을 못 이루고 소파의 가죽만 쥐어뜯고 있을 때가 많았다. 때로는 힘드는 줄도 모르고 의자를 창가로 밀고 가서 창턱에 기어오르기도 하고, 그냥 그 의자에 기어올라 창문에 기대어 전에 창 밖을 내다보며 느꼈던 해방감을 추억 속에서 되살리기도 했다. 하루 하루가 지남에 따라 매일 그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조금만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사물이 불분명하게 보였다. 전에는 아침 저녁으로 너무도 자주 보여 저주스러웠던 맞은편 병원조차도 이제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한적하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도회지 맛을 풍기는 샤로텐 거리에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더라면 회색 하늘과 회색 대지가 서로 합쳐져 분간할 수 없는 지평선이 전개된 어떤 황야를 내다보고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에나 용의주도한 누이동생은 의자가 창가에 와 있는 것을 두 번이나 발견했기 때문에 방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의자를 창가에 밀어놓았고 안쪽 창문까지 열어놓아주었다.

동생에게 추한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어느 날 그레고르는 이불을 잔등에 얹고―이 일을 하는 데 무려 네 시간이 걸렸는데―소파 밑으로 운반했다. 그러고 나서 몸을 다 가리도록 이불 표면을 조절했다. 누이동생이 몸을 일부러 굽히고 보아도 보이지 않도록 잘 덮었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소용없는 수작밖에 안 된다면 누이동생이 걷어치워줄 것이다. 내가 나 좋으라고 이불을 뒤집어쓴 것은 아니다. 이것쯤은 누이동생도 알아주겠지……. 그러나 누이동생은 이불을 건드리지 않고 있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이불을 몸 전체 위에 뒤집어쓴 모습을 누이동생이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그레고르는 이불을 약간 들치고 보았다. 누이동생이 감사하다는 눈매로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를 보고 싶었던 그레고르의 소원은 곧 이루어졌다. 낮에는 부모를 염려해서 창가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2, 3제곱미터밖에 안 되는 방바닥을 기어다닐 수만도 없었다. 누워 있는 것은 밤만으로 충분했다. 식사에 대해서도 역시 흥미를 잃었다. 따라서 벽이나 천장을 아래위로 기어다니며 기분 전환을 시도했다. 특히 천장에 매달려 있기란 유쾌한 일이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것과는 전혀 판이한 기분이었다. 숨쉬기도 편했고 가벼운 경련이 전신에 일어나기도 했다. 천장에 매달려 흐뭇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머지 방심한 채 발을 떼어 밑으로 떨어져서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과 달리 몸을 자유롭게 가눌 수 있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몸을 다치는 일은 없었다.

누이동생은 그레고르의 새로운 취미를 곧 알아챘다. 왜냐하면 그레고르는 기어다닐 때 여기저기에 찐득찐득한 발자국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이동생은 오빠가 기어다닐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방해되는 가구들을 치우려 했다. 우선 옷장과 책상을 내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감히 아버지에게 거들어달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고 하녀도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 열여섯 살 난 새로운 하녀는 먼젓번 하녀가 나간 후 모든 살림을 도맡아 해왔다. 부엌 문은 언제나 꼭 잠가두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열어놓았다. 따라서 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어머니를 불러오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가구를 치워버리는 것은 네 오빠의 회복을 우리가 원치 않는다는 뜻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돌봐주기 싫어서 내버려두는 것이 되지 않겠니? 방은 전처럼 놓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만……. 네 생각은 어떠냐? 그리고 네 오빠가 병에서 회복되면 이전과 다름없는 방을 보고 그동안의 일을 쉽게 잊지 않겠니?” 

이러한 어머니의 말을 들었을 때 그레고르는 말을 할 수 없는 데다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 자신의 머리가 돌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의 가구를 치워주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이 돌았다고 자인하는 것밖에 없었다. 빈 방이 되면 자유롭게 기어다닐 수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인간으로서의 과거는 완전한 망각 속에 매장시키는 것이 되며 대대로 물려 내려온 가구가 놓여 있던 인간의 방을 동굴로 변화시키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이미 내 과거는 나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다만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어머니의 음성이 나의 정신을 돌이켜주었을 뿐이다. 역시 가구는 한 점도 치워서는 안 된다. 전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가구가 현재 나에게 끼치는 영향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 쓸데없이 기어다니는 데 방해가 된다 해도 결국 그 방해는 나에게 이익은 될 망정 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오빠가 기어다니려면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이동생은 알고 있었다. 사실 누가 보아도 가구가 필요치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기야 그 나이의 소녀들이 갖는 맹목적인 열성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열성은 기회만 있으면 충족을 위한 출구를 찾는 법이다. 그래서 누이동생은 지금 오빠를 더 비참하게 해놓고 그와 동시에 오빠를 위해서 더 애쓰겠다는 자신의 그 광적인 열성에 사로잡혀 있었고 또 그 열성의 유혹에 빠져 있었다. 텅 빈 방에 그레고르가 혼자 있게 되면 그레테 이외에는 감히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등에 꼭 박힌 사과를 빼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기념물처럼 박혀 있었다. 

식사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레고르에게 가장 이상스러운 것은 음식을 씹는 와삭와삭 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치 음식을 먹으려면 이가 필요한 법이며 이가 없는 턱은 아무리 멋있게 생긴 턱이라도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웅변처럼 그레고르의 귀에 들려왔다. 

그레고르는 누이동생 곁으로 기어가려는 참이었다. 누이동생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겨 내 방으로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알릴 심사였다. 왜냐하면 이 방에 있는 사람치고 나만큼 누이동생의 연주를 칭찬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는 나의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내 방에다 누이동생을 두고 싶다. 그의 흉악한 모습이 처음으로 쓸모 있을 것 같았다. 내 방문은 어느 문이건 지켜 서서 들어오는 놈들한테 덤벼들리라. 그러나 누이동생에게 강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유로운 상태로 내 옆에서 지내게 해줘야 한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나의 쪽으로 그 애의 머리를 기울이도록 해야지. 너를 음악 학교에 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었노라고 말해줘야지. 이런 불행한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난 크리스마스 저녁에 여러 사람 앞에서 나의 계획을 발표했을 것이라고 말해줘야지. 벌써 크리스마스는 지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애는 분명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면 어깨까지 올라가 그 애의 목에 키스를 해줘야지……. 누이동생은 직장에 나가면서부터는 리본도 칼라도 없이 목을 드러내고 다녔다. 

그레고르는 자문해보며 어둠 속에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는 더는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것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와 같이 가느다란 다리로 지금까지 걸어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 이상스럽게 생각될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쾌감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사실 그는 온몸이 아팠지만, 점점 아픈 것이 가라앉고 결국 머지않아서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았다. 등에 박힌 썩은 사과도, 얇게 먼지가 덮인 그 주위의 염증도 느끼지 못한 지 벌써 오래되었다. 말할 수 없는 동정과 애정을 느끼며 그는 가족들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누이동생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단호했다. 교회의 탑시계가 새벽 3시를 칠 때까지 그는 내내 이런 허전하고 평화로운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창 밖에서 세상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그도 모르게 밑으로 푹 수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그들이 이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잠자 씨와 그의 부인은 점점 활기를 띠어가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최근의 온갖 고생으로 그 애의 얼굴이 다소 창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딸이 아름답고도 탐스러운 처녀로 활짝 피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잠자 부부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으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앞으로 딸을 위해 좋은 신랑감을 얻어주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전차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 토실토실한 젊은 육체를 쭉 펴자 그들에겐 그 모습이 마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을 보증해주는 것만 같았다. 

연결에 대한 본능은 인간의 DNA 속에 들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사회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받았다. 생존하기 위해 집단을 구성했고, 더 큰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했다. 언어가 점차 정교해지고, 집단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우리의 사회적 두뇌social brain도 함께 커졌다. 네트워크에 의존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인류는 더 크고 주름진 뇌를 가지게 되었으며, 커지는 머리를 지탱하기 위해 골반과 허리의 모양도 바뀌었다. 우리 신체 곳곳에도 네트워크가 만든 진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네트워크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네트워크는 우연한 만남, 혈연, 친구, 종교, 경제, 정치 등 다양한 계기로 형성된다. 목적에 따라 촘촘하게 연결되기도 하고 때로는 느슨하게 연결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생각, 기술, 자원, 인력을 교환했고, 그 교환 과정에서 전염병과 잘못된 신념, 악습과 같은 해로운 것들이 뒤섞이기도 했다. 네트워크를 통해서 서로 얽히고 설키는 과정과 그에 대한 인간의 대응은 인류의 역사가 되었다.





두 번째 정보혁명은 15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다. 오늘날 독일에 해당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1450년 세계 최초로 대량 '활판인쇄술'을 발명한다. 상형문자를 사용하던 중국 문화권과 달리, 알파벳을 사용하는 유럽은 대량 인쇄술이 발달하기 유리한 환경이었다. 구텐베르크는 균일한 압력으로 인쇄하기 위해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짜던 착즙기press로 종이를 눌러 인쇄했다. 오늘날에도 언론을 프레스press라고 부르는데, 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에서 유래했다.

무엇이든 복제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값비싼 물건을 대량 복제하는 일일 것이다. 구텐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필사로만 제작되던 <성경>은 매우 값비싼 물건이었다. <성경> 한 세트의 값은 집 10채 값과 맞먹었다. 구텐베르크는 1452년부터 3년에 걸쳐 성경을 인쇄하기 시작했고, 이때 출판된 성경이 '구텐베르크 성경'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구텐베르크는 성경으로 떼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는 인쇄기를 발명하기 위해 많은 돈을 빌렸는데, 인쇄기를 발명한 후에도 이 대출금을 갚지 못해 파산하고 만다.

비록 구텐베르크는 파산했지만, '인쇄술'이 촉발한 두 번째 정보혁명은 우리 인류 사회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당시 책 1권을 손으로 베껴 쓰는 데에는 두 달이 걸렸지만, 인쇄기를 사용하면 1주일에 500권의 책을 인쇄할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개발된 직후인 50년 동안 2,000만 권의 책이 출판되는데, 이는 그 이전 1,000년 동안 출판된 책보다 많은 양이다. 인쇄술로 인해 소수에게만 독점되던 정보가 대량생산, 대량소비 되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중세시대가 유지되었던 원동력은 교회의 <성경> 독점이었다. 개인들이 집 10채와 맞먹는 가격의 <성경>을 소유하는 것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정보와 데이터의 집약체인 <성경>을 보유할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 교회는 자연스레 <성경>을 독점했으며, 이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유리하게 해석해 왔다. 교회를 짓는 데에 필요한 헌금을 내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을 덧붙였다.

그런데 인쇄술은 교회가 정보를 독점하는 구조를 완전히 깨뜨려버린 것이다. <성경>이 대중화되자 교회의 성경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독일의 젊은 수도사제였던 루터도 그 중 하나였다. 루터는 1517년 '95개 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교회의 해석을 반박했으며, 이는 중세사회를 무너뜨리는 종교혁명으로 이어졌다. 종교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 예술, 인문 등 모든 영역에서도 기존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나타났다. 인쇄술이라는 두 번째 정보혁명이 중세사회의 기득권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시장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책정된다. 소비자들이 누리는 혜택이 크면 더 비싼 가격이 부과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플랫폼 기업들은 전통적인 수요-공급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한쪽의 고객에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거나, 심지어는 음(-)의 가격을 부과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용자를 끌어모으는 전략이 우선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쪽의 고객을 끌어모으고, 비용을 모조리 부담시킨다. 공짜로 카카오톡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용자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플랫폼 반대편에는 광고주, 이모티콘 판매자, 기프티콘 판매자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양면시장에서는 돈을 내는 쪽money side과 혜택을 받는 쪽subsidy side이 다르다. 카카오톡의 사례에서는 광고업체들이 돈을 내는 쪽이고, 일반 메신저 서비스 사용자들은 혜택을 받는 쪽이다. 쿠팡의 경우에는 판매자들이 돈을 내는 쪽이고, 일반 사용자들은 혜택을 받는 쪽이다. 판매자들이 쿠팡 플랫폼에 입점하기 위해서는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상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판매자들은 상품가격을 낮게 책정하는 방시긍로 일종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그 대가로 플랫폼 반대편의 소비자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상품을 구매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위 표현은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즐겨 쓰던 격언이다. 경제기사에 수시로 등장하는 이 표현은 서부 개척 시대의 한 술집에서 유래했다. 당시 어느 술집에서는 술을 마시면 점심 식사를 공짜로 제공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집의 술값은 다른 가게보다 비쌌다. 즉,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술값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격언은 어떤 일에는 항상 그만한 대가(기회비용)가 따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네트워크 경제에는 공짜 점심이 있다. 앞서 말한 카카오톡, 결혼정보회사 같은 사례다. 양면시장에서는 비용을 지불하는 쪽과 혜택을 보는 쪽이 다르기 때문에 혜택을 보는 쪽은 거의 비용이 들지 않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렇게 혜택을 보는 쪽이 받는 돈을 교차 보조금cross-subsidy이라고 한다. 양면시장은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사용료를 내고 있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다.





양면시장 이론은 한쪽의 희생을 정당화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쪽은 수혜를 누리고 한쪽은 피해를 보는데, 어떻게 이것이 상쇄될 수 있느냐는 비판이다. 서로 다른 두 주체의 이해득실을 하나로 합쳐서 생각하자는 주장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관점에 기반한다. 그러나 어느 일방에 피해를 전가하고 더 큰 이득을 본 집단이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시각은 현실에서 정당화되기는 어렵다. 우리 모두는 법적인 보호를 받아야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는 '경쟁'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과거 자본주의 시대에는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면 관리비용도 덩달아 커지기 때문에 기업이 무한정 성장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보통은 산업별로 상위 3~4개의 업체가 형성되고 나머지 시장을 군소업체들이 장악하게 된다. 전자제품 시장에서 상위 두 쇠사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이며, 조선업에서는 현대, 대우, 삼성과 같은 식이다. 기업 간 경쟁을 통해 가격은 저렴해지고 소비자가 누리는 선택의 폭은 더 넓어졌다.

그러나 카카오톡 시장과 같은 네트워크 경제에서 소비자는 더 넓은 선택지를 바라지도 않으며, 경쟁을 통해 떨어뜨릴 가격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승자독식의 경제가 형성되며, 독점기업은 2위기업과의 격차를 크게 벌여놓는 경우가 빈번해지는 것이다.





네트워크 경제에서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양면시장 이론에서 본 바와 같이 플랫폼 경제에서는 교차 보조가 일반화되어 소비자들이 공짜로 양질의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기업의 생산비용도 0에 가까워진다. 카카오톡, 윈도우 OS 등의 생산비용도 0에 가깝다. 이 제품들은 초기 개발비용이 클 뿐, 추가 생산비용이 들지 않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네트워크 경제에서 상품의 가격은 기업 전략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기업의 독점력이 강할수록 가격은 더 높게 책정된다. 한마디로 가격은 더이상 수요자와 공급자의 의사를 바탕으로 한 시장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양면시장 이론은 플랫폼 서비스의 이용료가 공짜인 이유를 설명한다. 소비자들이 카카오에 아무런 비용을 내지 않는 것은 광고주들이 카카오의 운영비용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면 우리도 카카오에 일종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바로 광고 노출이라는 비금전적 비용이다. 카카오톡은 대화목록 위에 광고를 띄우는데 사용자들은 그 광고에 항상 노출된다. 광고에 노출되는 방식으로 우리는 카카오에 비용을 내고 있는 셈이다.

광고가 싫다고 해서 다른 메신저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도 없다. 이미 카카오가 메신저 시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카카오는 우리가 지불하는 비용(광고 노출의 정도,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독점력을 지닌 셈이다. 지금과 같이 카카오톡이 메신저 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에서는 카카오가 광고를 2개, 3개 띄우거나 광고창의 크기를 더 크게 만들더라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





조직이 부여한 권력은 이전 같지 않으며, 이제는 네트워크 스스로가 권력을 만들고 있다. 과거에는 공식적인 위계질서가 권력을 부여했다면, 이제는 더 많은 연결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이 일해야 할 필요성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네트워크 기술은 상품에 대한 수요를 줄이기 때문이다. 쏘카, 에어비앤비와 같은 공유경제의 확산은 우리의 상품 수요를 줄여가고 있다. 공유경제가 활성화되면 모든 사람이 자동차를 소유할 필요가 없어진다. 언제든 잠시 빌려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 수요도 줄어들 것이다. 사물인터넷IoT과 스마트그리드Smart Grid기술은 전기 사용을 최소화하여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차단한다. 또한 자동차 등 내연기관의 에너지 효율도 점점 높아졌다. 이 모든 변화의 방향은 상품생산을 줄이고, 우리가 일할 필요성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네트워크 경제는 '더 많은 노동시간 = 더 많은 소득'이라는 공식도 붕괴시킨다. 노동과 소득 간의 비례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전통적 경제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버는 구조였다. 그러나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놀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 유명 연예인들과 유튜브 크리에이터, 스포츠 스타들, 인기 학원 강사의 수입이 일반 노동자보다 매우 높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들은 노동을 통해 돈을 벌지 않는다. 이들은 최소한의 노동력만 투입할 뿐 소득은 TV, 인터넷 등의 네트워크가 스스로 창출한다.





정치는 데이터를 처리하는 시스템과 같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 데이터를 처리하여 공공의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정치다. 데이터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자는 권력을 획득한다. 대중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적합한 정책을 제시하는 사람은 더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정치 경쟁을 정보 처리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데이터를 더욱 빠르게 수집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지를 둘러싼 싸움이다.

지난 수십 년간 민주주의가 독재보다 우수했던 것도 민주주의가 독재보다 데이터를 더욱 적절하게 수집하고 처리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적 데이터 처리 시스템인 독재는 폐쇄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의사결정을 한다. 이로 인해 독재는 빠르게 데이터를 처리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틀린 결론을 내릴 확률도 높은 시스템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는 분산형 처리 시스템이다. 처리 속도는 느리지만 데이터 처리 과정에 다수가 참여하여 검증한다. 민주주의는 참여와 토론을 통해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고, 틀릴 확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시스템이다. 컹퓨터공학에서 "보는 눈이 많으면 프로그램의 오류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라는 '리누스의 법칙Linus' Law'을 정치체제로 구현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물론 항상 민주주의가 우수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업화 초기 단계에는 독재라는 중앙집권식 데이터 처리 방식이 효과적이기도 했다. 이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는 권위주의적 독재 기간을 거치면서 고도성장을 경험했다. 환경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대규모 자본을 동원해 기간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는 경제 개발 초기에는 국가가 자원을 독점하는 방식도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중앙집권형 방식이 언제까지나 옳을 수만은 없었다. 환경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자, 중앙집권식 데이터 처리 방식은 민주주의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도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민주주의적 처리 방식도 서서히 그 약점이 드러났다. 특히, 민주주의는 느리고 복잡한 데이터 처리 과정이 문제가 되었다. 공공 의사결정에 주민들이 참여하다 보니,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해졌다. 모든 정보는 투명하게 공개되었고, 지역주민들은 저마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 공원, 학교 등 수익성 있는 시설을 유치하려 들었다. 반대로 혐오 시설에는 결사반대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투명해지고,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해지면서 민주주의라는 참여형 데이터 처리 방식은 느린 속도라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과거에는 민주주의의 느린 속도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데이터 처리 속도가 다소 느리더라도 도로, 철도, 에너지, 기간산업 등 국가에 필요한 대형 인프라를 건설할 수 있는 주체는 정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민간경제의 규모와 역량이 정부 못지 않게 성장하자, 이러한 초대형 인프라 사업들은 더 이상 정부만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민간기업들은 정부보다 매우 신속하다. 민간기업들은 '돈이 되는가?'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모든 문제를 처리한다. 그래서 이들은 공공 의사결정과 달리 매우 실용적이고 빠른 문제해결을 보여 준다.





경제 권력은 정치 권력, 언론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법과 제도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치 권력을 설득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법과 제도가 한번 만들어지면, 그 이후에는 좀처럼 바뀌기 어렵다. 사람들은 한번 적응한 제도를 바꾸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움직이던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는 관성을 지니고 있듯이, 법과 제도도 사람들에게 적응되면 현상을 유지하려는 관성을 지닌다. 이를 제도의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이라고 한다.

경제 권력에 유리한 제도가 형성되는 현상은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세계 각국도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가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 투자자/ 국가 분쟁해결제도ISD 등은 친기업적 제도가 국제적으로 형성된 예다. 자본의 논리로 국제적 법정을 만들어 민주국가를 심판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기업이 우리의 일상을 관찰하는 오늘날 자본주의 모습을 '감시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라고도 일컫는다. 감시자본주의란 우리의 일상 행동에서 데이터를 추출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의 자본주의다. 구글과 카카오가 우리의 검색기록을 활용하여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감시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우리는 인터넷 공간에서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항상 흔적을 남긴다. 감시자본주의의 기업들은 이러한 흔적(행동잉여, behavioral surplus)들을 수집하여 데이터를 얻고, 이 데이터를 분석하여 타깃 광고, 가격차별, 맞춤형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제러미 하이먼즈는 신권력은 'Current(흐름)', 구권력은 'Currency(화폐)'라고 표현한다. 구권력은 소수만 가지고 있으며, 폐쇄적이고 접근하기 어렵다. 리더가 주도하며, 상명하달의 원리로 움직인다. 강한 유대감과 권위hierachy도 구권력의 특징이다. 정당이나 기업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구권력의 작동방식이다.

그러나 뉴파워는 흐름이다. 다수가 만들어내고, 개방적이면서 참여적이다. 물이나 전기처럼 흐름이 급증할 때 가장 강력해진다. 뉴파워는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결집하는 것이다. 뉴파워는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 즉 아나키anarchy에 가깝다. 이들에게는 조직도, 리더도 없다. 이들을 움직이는 힘은 참여, 공감, 확산이다. 네트워크에서 공유되는 메시지는 모두 수평적으로 움직이며, 많은 대중의 공감을 받은 메시지가 뉴파워가 된다.





코넬대학교의 베네딕트 앤더슨 교수는 민족주의의 근간을 동일한 언어와 인쇄자본주의print capitalism에서 찾는다. 출판 산업이 발달하자 동일한 언어가 확산되었고,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라는 민족주의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하는 도구는 인터넷 플랫폼이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취향에 맞는 영상을 찾아보고 '좋아요'를 누른다. 마음에 드는 정치인의 발언은 리트윗하여 널리 전달된다. 이는 인쇄자본주의가 오늘날 다시 나타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미래학자 제이슨 셍커는 이를 '디지털 인쇄자본주의digital print capitalism'라고 일컫는다.





위키백과는 세계 최고였던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 버금가는 정확성도 갖추고 있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따르면, 브리태니커와 위키백과는 정확성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브리태니커는 항목당 평균 3개의 오류가 발견되었으며, 위키백과 역시 항목당 4개의 오류가 발견됐다. 위키백과는 동료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정보가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한 정보만큼이나 정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사람들이 다양한 플랫폼을 동시에 이용하는 현상을 '멀티호밍multi-homing'이라고 부른다. 여러multi 채의 집home을 두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이다. 멀티호밍이 나타나는 산업에서는 여러 플랫폼이 공존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플랫폼과 플랫폼이 만나 경쟁하는 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플랫폼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승자독식이 불가능하다.

멀티호밍 현상은 플랫폼 '유지비용'이 낮을 때에 발생한다. 신용카드의 경우 연회비(유지비용)가 매우 저렴하기에 소비자가 여러 카드를 동시에 사용하더라도 부담이 없다. 플랫폼에서 다른 플랫폼으로 갈아탈 때 '전환비용'이 거의 없는 경우에 발생한다. 만약 플랫폼을 갈아타는 데에 엄청난 위약금이 부과된다면 멀티호밍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의 이커머스 시장은 아마존의 독주가 두드러진다. 아마존은 미국의 이커머스 시장에서 38%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2위 월마트(5.8%), 3위 이베이(4.5%)에 비해 엄청난 격차다. 그렇다면 아마존은 어떻게 멀티호밍의 성향이 강한 쇼핑 플랫폼 시장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했을까?

그 비결은 아마존의 '차별화된 서비스'에 있다. 철저한 박리다매 전략으로 저렴한 가격을 제시했으며, 아마존 프라임 서비스를 통해 배송기간도 혁신적으로 단축했다. 무료배송과 '묻지마 반송' 시스템도 일찍부터 구축했다. 고객의 리뷰를 토대로 상품에 대한 신뢰성 있는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도 아마존의 장점이다. 철저한 차별화와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스스로 '싱글호밍single-homing'의 이커머스 시장을 만든 것이다.





플랫폼 경제에서 중요한 경영 전략은 소비자들의 '멀티호밍을 막는 것'이다. 다른 플랫폼을 통한 소비자의 상품 구매를 막고, 자사 플랫폼을 통해서만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플랫폼 기업들의 최우선 전략이다. 고객들이 다른 플랫폼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아 독점력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플랫폼 기업에서 큐레이션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다. 이는 플랫폼의 특성 때문이다. 플랫폼은 다양한 판매자를 수용한다. 판매자가 많아져야 소비자도 덩달아 많아지는 교차 네트워크 외부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랫폼 기업은 까다로운 검증 절차를 두지 않는다.

이마트는 까다롭게 상품을 선별해 판매하지만, 쿠팡에서는 누구든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수많은 판매자가 플랫폼에 모여들고, 천차만별 다양한 상품들이 거래된다. 플랫폼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의 범위 또한 파이프라인 기업의 수준과 완전히 다르다. 이들이 판매하는 상품의 종류는 무한대에 가깝다. 아마존은 한국의 농기구인 호미와 낫도 판매 중이며, 유튜브에서는 전문적인 영상 제작업체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 콘텐츠 공급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상품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콘텐츠를 정확하고 빠르게 제공하고, 구매한 물건을 얼마나 신속하게 배달하느냐의 문제는 플랫폼 기업의 중요한 역량이 되었다. 더불어 넷플릭스, 쿠팡, 야놀자, 에어비앤비 등 플랫폼은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기본 영업 전략으로 삼는다. 때로는 기업이 가진 큐레이션 역량이 플랫폼 기업 간 경쟁의 판도를 바꾸기도 한다.





구글이 웹사이트를 큐레이션하는 비결은 바로 '링크'에 있다. 구글은 특정 웹페이지를 가리키고 있는 링크가 많다면, 그 웹페이지는 신뢰도 높은 정보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많은 페이지에 인용될수록 신뢰성을 부여하는 검색어 처리 방식을 '페이지랭크page rank' 알고리즘이라 하는데 구글은 이를 활용했다. 그리고 링크가 많이 걸려 있는 순서대로 검색 결과를 큐레이팅해 이용자에게 제공했다.

이 방식은 보기 좋게 먹혀들었다. 정확도에 승부를 건 구글은 수많은 데이터 중 정확한 정보를 골라내서 배달하는 큐레이션 역량을 통해 후발주자이지만 검색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구글의 전 CEO 에릭 슈미트는 인터넷이 두 개로 나누어질 것이라 예견했다. 하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버전 인터넷'이며, 다른 하나는 중국이 주도하는 '검열버전 인터넷'이다. 중국식 인터넷이 또 하나의 표준이 될 것이라 예측하는 데에는 중국의 '세계화' 전략이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라고 불리는 중국식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아프리카, 동남아, 유럽 지역에 자금을 투자하고 중국식 경제모델을 전파하는 프로젝트다.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 여러 개도국이 중국식 검열버전 인터넷 모델을 표준 모델로 도입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중국이 쌓아 올린 디지털 만리장성 속에서 중국의 토종 플랫폼 기업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메신저는 위챗WeChat, SNS는 웨이보Weibo, 검색은 바이두Baidu다. 틱톡TikTok 역시 만리장성의 보호 아래 글로벌 슈퍼스타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틱톡은 15초에서 1분 이내의 짧은 동영상을 제작하여 공유하는 동영상 플랫폼계의 트위터다.

틱톡의 성공 비결은 인터넷 밈meme 문화에 익숙한 MZ세대의 취향을 제대로 읽어낸 데에 있다. 젊은 세대들은 짧은 동영상 소통에 열광했다. 2021년 현재, 틱톡의 전 세계 이용자 수는 약 7억 명이며, 미국에서만 1억 2,00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 수를 기록했다. 플랫폼 제국이었던 미국도 중국이 만든 플랫폼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미국의 화웨이 거래 금지 정책에는 안보 문제뿐 아니라 향후 벌어질 플랫폼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전략적 의도가 숨어 있다. 화웨이는 차세대 통신기술인 5G 장비 시장에서 세계 1위(35.3%)의 업체다. 5G 기술 수준도 미국을 추월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5G 기술은 향후 플랫폼 시장에서 매우 핵심적인 기술이다.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등 향후 새롭게 등장할 플랫폼 사업은 5G 기술을 바탕으로 작동된다. 그래서 미국은 화웨이를 견제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기술굴기를 견제하여 차세대 플랫폼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장악하겠다는 미국의 숨은 의도가 엿보인다.





1955년 미국의 식품회사인 퀘이커 오츠는 프로모션으로 2,100만 명에게 2.4억 평이 넘는 큰 땅덩어리를 잘게 쪼개어 나누어 주었다. '빅인치Big Inch'라고 불리는 이 프로모션은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2,100만 주인의 이해관계가 모두 같을 수는 없으므로 잘게 쪼개어 놓은 그 큰 땅은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 땅이 되고 말았다. 이후 다행히 기술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되긴 했다. 일부 소유주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세금을 내지 않은 땅을 몰수하는 방식으로 다시 땅을 합쳐 경제적 가치를 회복한 것이다.





컬럼비아대학교 법학 교수인 마이클 헬러는 과도한 소유권 보호로 인해 사회 전체의 혁신이 저해되는 상황을'그리드락GridLock'이라고 표현했다. 그리드락은 교차로에서 차량이 꽉 막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빼곡하게 설정된 소유권을 차량 정체 현상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드락은 사유재산의 보호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사유제도와 공유제도 사이에 적절한 지점을 찾는 것이 혁신을 자극하는 최적의 균형점이 될 수 있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소설이 걷는 것을 묘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매체이기 때문이다. 시 또한 마찬가지다. 시는 걸음을 영원한 행위로 만든다. 또는 순간으로.

걷는 것과 뛰는 것은 함께 존재해야 한다. 동시대 문명의 문제는 걷는 것과 뛰는 것을 분리한 것에 기인한다. 걷는 곳에서는 뛸 수 없고 뛰는 곳에서는 걸을 수 없다. 걷는 복장으로 뛸 수 없고 뛰는 복장으로 걸을 수 없다. 그것은 위반이거나 수치, 비효율과 무능력이다.





러닝타임은 영화의 상영 시간을 의미한다. 런타임은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는 동안의 동작을 의미한다. 영화는 본래 형식상 이동적이기 때문에 movie라 불린다. 시네마Cinema와 독일어로 영화를 뜻하는 키노kino 모두 움직임을 뜻하는 그리스어 kinesis/kineticos에서 유래했다. Motion Pictures.

소설에서 러닝타임은 가독성이다. 다시 말해 소설의 러닝타임은 가변적이며 수신자에게 속해 있지만 전적으로 그들의 몫인 건 아니다. 이것을 해방의 기획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옛날 사람인 동시에 엘리트주의자이며 이것을 참여의 기획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옛날 사람인 동시에 시장주의자이다. 정치적 기획은 다수를 향하며 예술적 기획은 소수를 향하지만 이것은 아카데미화하거나 산화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예술과 예술적 기획으로서의 정치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해당 장르가 향하는 곳에 도달한다.

이른바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예술이 시장성과 대중주의를 담보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독성/러닝타임의 자유 속에서 아카데미와 소멸이라는 결과에 이르지 않기. 열여섯 시간짜리 영화의 극장 상영, 여덟 시간짜리 연극의 공연. 레프 도진의 작품은 뻔뻔한 클래식에 불과하지 않나. 엠은 넷플릭스에 열 시간이 넘는 작품이 수두룩하고, 〈기묘한 이야기〉 새 시즌이 오픈하면 사람들은 한자리에서 여덟 개의 에피소드를 본다고 말했다. 반면 베를린의 극장에서 열 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기 위해선 12유로짜리 티켓 네 장을 끊어야 해……. 미술관에서 러닝타임이 긴 영상을 상영하는 치들은 뻔뻔한 사기꾼이고. “유명 현대 예술가들의 제스처 인생.” 그러므로 러닝타임은 목표 지향적 직선 운동의 포로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서사의 스톡홀름 신드롬.

나는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모든 게 연결된다고 했다. 크리스와 스티브처럼, 안소니 루소와 조 루소처럼 달리기와 휴머니즘이 연결되고 자유주의와 리얼리즘이 연결되고 합쳐서 자유주의 휴머니즘,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발터 벤야민이 산책에 집착한 건 공산주의자라서 그렇고 그러므로 산책을 휴머니즘과 연결시키는 모든 철학은 오류다, 결국 이 이야기는 포스트휴먼과 신체, 인종차별과 여성혐오, 엔트로피와 특이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게 내 빅픽처야…….
좀 철 지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아? 엠이 말했다.

너무하네…….

안 보여? 엠이 주위를 가리켰다. 파리는 라임Lime에 점령됐어. 공유경제가 턱밑까지 치고 들어오는데 플라뇌르 이야기나 하고 있을 거야?

엠의 말처럼 파리는 공유 킥보드로 가득했다. 바구니에 바게트를 실은 자전거는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사람들은 힘들게 페달을 밟지 않고 자기 차를 소유하지도 않고 걷지도 않는다. 정거장도 필요 없고 주차장도 필요 없고 아케이드도 필요 없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라임을 다룬 기사의 첫 머리를 이렇게 장식했다. “거리의 무정부주의자들!”
이동 수단은 정치 체제다. 대의민주주의와 국민국가는 공유경제로 인해 와해될 것이다.

몇 달 전, 테슬라의 오토파일럿 기능을 사용한 남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오토파일럿은 운전자가 죽은 후에도 한참을 작동했고 자동차는 시체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끔찍한 일이라고? 그렇지 않다. 문제는 간단하다. 운전자가 죽어도 자동차가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으니까, 자동차는 움직이는 것이다. 중요한 건 왜 움직이느냐가 아니야.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라고. 움직일 수 있다면 움직일 이유가 없어도 움직인다. 윌리엄 제임스, “우리는 슬프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울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메이예르홀트, “우리는 무서워서 달리는 게 아니라 달리기 때문에 무섭다.” 질문. 13인의 아해는 달리기 때문에 무서운 것일까, 무섭기 때문에 달리는 것일까?





엠은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원래 엠은 영문학을 전공했고 시를 잠깐 썼지만 도저히 시 쓰기를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는 남과 자신에게 상처 주기의 연속이었다. 다른 시간대, 다른 국가에서는 다른 시 쓰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 쓰기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가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중학교에서 오래달리기와 200미터 달리기 모두 1등을 했다고 말했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야. 그러니까 시를 쓸 수 없지. 왜냐하면 시인은 달리지 않거든. 달리는 건 오로지 소설가들뿐이야.

나는 인정했다. 나는 비록 달리지 않지만, 소설가들이 달리기 선수라는 건 인정하지. 물론 그들은 학창 시절 계주에서 꼴찌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기 모두 고독한 레이스 아닌가. 더구나 달리기는 걷기와 달리 체력을 필요로 한다. 소설은 체력 싸움이다. 필립 로스는 말했다. 영감을 찾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다.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

그래서 내가 필립 로스를 싫어해.

엠은 〈휴먼 네이처〉 영화와 소설 모두 보다 말았다고 했다. 미국 소설을 왜 읽는지, 원…….





지수와 지수는 이틀 전 파리에 도착했고 바스티유 광장 근처의 에어비앤비에 묵었다. 두 사람은 커플이고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다. 나는 지수를 처음 알았는데, 나중에야 그의 연인이 지수라는 사실을 알고 조금 놀랐다.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게 곧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되니까 말이다.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은지 궁금했다.

생각보다 이름이 같은 커플이 꽤 있어요. 지수가 말했다.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서울에 같은 이름을 가진(성은 제외) 커플은 총 마흔네 쌍이다. 정연 커플, 민수 커플, 지호 커플, 태희 커플, 연수 커플, 승민 커플 등등.
우와, 그런 통계도 있어요?
아니요. 거짓말입니다.





지수는 현재 맥도날드 법무팀에서 일하며 밤에는 웹소설을 쓴다.

맥도날드에도 법무팀이 있어요? 엠이 물었다.

1982년 제정된 햄버거법이라는 게 있어요. 오리건주에서 덜 익힌 패티를 판매하다 생긴 햄버거병 때문에 생긴 법입니다. 아직 국내에는 관련 법 조항이 없고요. 한국에는 패스트푸드 산업과 관련한 법적 분쟁이 많지만 제대로 된 판례가 없어요.

그러면 분쟁에서 맥도날드 편을 드는 거예요? 엠이 물었다.

아니요.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지도 교수가 말했죠. 햄버거의 편을 드는 거라고 생각해.




네비게이션 맵에 따르면 노르망디의 해안가가 지척이었지만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금 냄새도 없었고 바닷바람을 연상케 하는 강한 바람이 유선형 차체를 감싸 흘렀지만 가로등이 없는 도로에는 달을 반사하는 아스팔트 흔적만 끝없이 이어졌다. 엠은 운전대를 쥐고 있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사망한 영국 비평가 스콧 딕슨의 기록에 따르면 야간 운전은 허공에 떠 있는 널빤지 위를 달리는 것과 같다. 속도, 방향, 움직임의 감각은 송두리째 사라지며 엔진의 저음과 홍예의 속삭임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곧이어 나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스콧 딕슨의 글은 운전이 인류의 필수 기예가 되기 전 그 낯섦을 담은 최초의 기록 중 하나이다. 엠은 인공 불빛이 존재하지 않는 이국의 해안 마을에서 20세기 초 야간 운전자들의 시계 속으로 들어갔다. 지수는 잠들었으며 지수는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이며 낮에 갔던 몽생미셸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뭐 해?
인스타그램 업뎃.

엠은 10구로 돌아와 카페에서 커피와 뺑오레쟁을 먹었고 집으로 오는 길에 편집숍에서 데님을 샀다고 말했다. 평소에 눈여겨봐둔 일본 브랜드의 오카야마산 데님이었는데 팔더라구.
한국보다 더 싸게?
아니, 더 비싸게.
그런데 왜 샀느냐고 묻자 엠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소비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물론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허영심 같은 거야?
아니. 지정학. 엠이 말했다.
흠.

우리는 페이스타임으로 대화 중이었다. 엠은 거리를 산책하며 통화했다. 생마르탱 운하의 검은 물길 위로 파리의 오렌지색 조명이 흩어졌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름의 바람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밤거리가 위험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걱정하지 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엠이 말했다.

엠은 조지 오웰을 고리타분한 작가로 생각했다. 경직된 리얼리즘? 단순한 메시지의 사회파 작가?

조지 오웰을 시시한 작가 취급하면 안 돼. 내가 말했다. 좌파와 우파 모두 좋아하는 단 두 명의 작가 중 하나거든.
또 하나는 누군데?
봉준호.
메흐드…….

그러니까 정리하면 구술 자료에서 내가 보고자 한 건 공적 자료와 서사화가 포착하지 못하거나 소거시킨 틈새다. 이런 틈새는 세계 곳곳에 산개해 있다. 영국의 작가 이안 싱클레어의 표현에 따르면 "잃어버린 호박돌"(Cities can be mapped by missing cobblestones)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호박돌은 집터 따위의 바닥을 단단히 하는 데 쓰는 둥글고 큰 돌을 말한다. 도시 건설 과정에서 무수히 깨지고 사라져간 이 돌들은 무의미하고 잡스럽게 여겨지거나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내겐 이러한 여담이 세계를 지지하는 구성물처럼 여겨진다. 무슨 역할을 하는지 짐작하기 힘들고 진실 또는 거짓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때로는 실존하는지 여부도 불투명한 사물들, 기억들, 일화들의 우주. 걷기는 이러한 틈새를 마주하는 급진적인 행위다.

이안 싱클레어는 걷기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주장한다. 국수주의와 극우주의 같은 배타적 사고방식이 득세하고 감시와 보안이 일상화되는 팬데믹 시대에, 걷기는 공공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다. 다만 여기서 걷기란 단순한 의미에서의 산책이나 순례 따위가 아닌 금지된 곳을 횡단하기, 잊혀지고 버려진 지역과 직접 마주하기, 경계를 넘어서기, 그리고 그곳에 대해 말하고 쓰기와 연결된다.





<런던순환도로London Orbital>(2002)는 런던 시 외곽을 토성의 고리처럼 둘러싼 도시환상고속도로 M25를 걷고 관찰하며 기록한 심리지리학 저술이자 서사시이며 소설이자 논픽션이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바이패스인 M25는 세계에서 가장 큰 주차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악명 높은 도로다. 채널4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영국 7대 공포' 중 1위로 뽑히기도 했으며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런던 다크투어리즘 명소이기도 하다. 기타리스트 크리스 리는 M25에서 운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앨범을 발표했는데 제목은 <The Road to Hell>이었다(앨범은 3주 동안 차트 1위에 올랐다). 영국 교통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가 왜 이렇게 돼버린 걸까. 영국인 특유의 사캐스틱한 농담인 걸까. 하지만 일단 M25에 진입하면 당신은 익숙하고도 끔찍한 디스토피아적 공포를 곧장 이해할 수 있다. 운전자들은 피부로 깨닫는다. M25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사실을, 권태가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집어삼키고 타임라인이 절멸의 가장자리에 얼어붙은 채 공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빠져나갈 수도 없고 빠져나간다 한들 갈 곳도 없는, 과거와 미래도 없이 영원한 현재를 순환하는 고속도로.





어린 시절부터 팀 크레스웰은 작가를 꿈꾸었고 언제나 시를 썼다. 시는 형편없을 때가 많았지만 글쓰기는 늘 그를 행복하게 했다. 그는 부르디외의 "구조화된 구조는 구조화하는 구조로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문장에서 아름다운 리듬을 발견했으며, 왜 지리학과에서 '방법론' 중 하나로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는지 의문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에게 글쓰기는 글을 읽는 것과 연구하는 것과 각각 분리되는, 그 모든 과정의 '끝'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을 한꺼번에 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학부생일 때 다른 모든 이들 가운데서 반한 사람으로 스웨덴 지리학자 군나르 올슨이 있었는데 올슨의 첫 번째 책인 <알 속의 새/ 새 속의 알Birds In Eggs/ Egg In Birds>은 앞에서 뒤로, 그리고 뒤에서 앞으로도 읽힐 수 있는 실험적인 책이었다. 올슨은 학계에 포스트모더니즘 광풍이 불어닥치기 한참 전부터 재현과 재현 불가능성에 대해, 그가 훈련받은 공간과학의 수학적 언어가 지향하는 명백한 확실성과 시가 추구하는 명백한 불확실성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 질문했다. 세계는 복잡하고, 이 세계의 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투명한 언어의 불가능성을 인식한다면 싸워야 한다. 지리학자의 전장은 보들레르, 말라르메, 조이스, 카프카, 베케트를 계속해서 읽는 곳에서 펼쳐진다. 이런 도박은 종종, 아니 자주 실패했으며 동료 학자들에게 "자신 말고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저자의 신비주의만 더할 뿐이다"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올슨이 보내는 신호는 크레스웰에게 단번에 이해 가능한 것이었으며 그의 글쓰기라는 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지리학자로서 교편을 잡았던 영국 로열홀러웨이대학교에서 창조적 글쓰기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고 세 권의 시집을 출판했다. 비록 논문에서는 천 명의 다른 분야 학식자들도 이해 가능한, 명확하고 덜 실험적인 언어를 구사하지만, 그에게 있어 어느 쪽이든 글쓰기는 행하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 그러니까 모빌리티였다.





크레스웰에게 모빌리티란 '장소'의 동적 등가물이며, 무브먼트는 '위치'의 동적 등가물이다. 북위 40도 46분, 서경 73도 58분이라는 지도상의 한 점이 위치라면, 장소는 이 숫자 집합의 이름이 뉴욕시 맨해튼 센트럴 파크 남부 어딘가로 밝혀졌을 때 활성화되는 기억이나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크루즈 미사일은 위치와 공간좌표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는데, 만약 그것이 '장소'로 프로그램화 될 수 있다면 사막에 불시착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숲속에 지네 한 마리가 있었다. 지네는 그 많은 다리를 이용해 멋있는 춤을 추기로 유명했다. 그걸 부러워하던 개구리가 어느 날 물었다. "당신은 춤을 출 때 어느 발을 먼저 움직이나요?" 그러나 지네는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지 못했고 생각에 잠기다 못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는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

한쪽에 복잡한 실재가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기호와 재현과 텍스트가 있다는 생각이 있다. 살아 있고 움직였던 것은 언어로 멈춰지고 의미나 상징으로 환원되어 평가된다. 이러한 재현은 원본에서 늘 뭔가를 탈락시키거나 살아 있는 것을 형편없이 생동강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불안이 있다. 춤이나 운동 같은 신체적 움직임을 묘사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 어려움을 갑자기 이해하게 된다.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고래를 바닷속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군요]

내가 신문 조각을 가위로 오린 것도 김민희가 기어이 가져가 버린 것도 그 사진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 사진을 보면서 여기 이곳은, 선혈이 낭자한, 날 새운 진검이 바로 옆구리로 날아드는 전쟁터임을 새삼스레 돌이키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득히 먼 곳으로 이끌어갔다가 문득 내가 딛고 선 이곳을 보여주기. 기억할 수도 없이 많은 그 광고 속에서 내가 그려내고자 했던 것도 저런 풍경과 현실의 콘트라스트였을까.

[에어로빅 배우러 오는 여사무원하고 몸매가 비슷해서는 선생님다운 카리스마가 없는 거죠. 저 자신이 움직이는 광고판이 돼야 하니까요. 에어로빅만 해서는 절대 마돈나 같은 팔의 라인을 만들 수 없어요. 조금만 참고 뛰면,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어, 하는 환상을 줄 수 있어야 해요]

조작된 환상. 그건 광고판에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얼핏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광고의 소비자조차 광고의 본질을 꿰고 있는 시대다. 하긴 사람들이 입는 건 청바지가 아니라 리바이스의 자유로움이며 들이마시는 건 담배가 아니라 말보로의 거친 마초 이미지니까. 그런데 몸매를 얘기하는 데 카리스마라는 단어는 적절한 걸까.

보디빌딩의 시대는 거去하고 보디스컬프쳐, 몸을 조각하는 시대가 래來했다고요. 왜 사람들은 자기에게 그렇게 관대한지 모르겠어요. 자기 배가 부른 건 살이 찐 게 아니라 다만 지방이 축적됐을 뿐이라고 합리화하거든요. 젊은 트레이너는 운동을 게을리하는 회원들에게 그렇게 침을 튀기곤 했다. 자신의 몸에 붙은 지방을 저주하며 어디론가 달려가는 저들은 왜 저토록이나 껍데기에 몰두하는 것일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것이 두려워서? 전염되듯 나도 러닝머신의 버튼을 눌러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몸매의 카리스마와 자신이 만드는 광고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살갑게 가까워진다, 이렇게. 패배의 뒤풀이에서, 누군가 술을 엎질러 작은 술렁거림이 일고 창밖에 조금씩 내리는 어둠만큼 사람들은 부드러워진다. 밤이 내리는 걸 막을 수 없듯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며.

[광고는 광고일 뿐이야. 이 바닥에서 더도 말고 삼 개월만 뛰어보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광고의 화려한 포장을 벗기면 거기 돈이 있다. 광고는 돈의 포장지일 뿐이야. 광고가 역사성을 획득하면서 두고두고 찬양받아야 할 예술이라는 착각은 버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 보자면 고고한 고급 예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껍데기를 벗기고 보면 그 속에 돈이 있죠. 더욱 교묘하고 고급하게 포장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예술이나 돈이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죠? 클라이언트가 원한다고 해서 내가 끝까지 깔고 있어야 할 베이스를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광고를 하고 싶은가?]

[요즘은 광고학과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저는 대학에서 광고를 전공한 건 아니에요. 물 건너오는 광고 전문 서적들은 놀라울 정도로 교육적이긴 하지만 길을 찾는 건 자기 몫이죠. 우리나라 광고의 대부분이 외국 광고 베낀 거 아니에요? 건방진 얘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제 냄새가 있는 광고를 만들고 싶어요. 이강호표. 결국은 나다운 것을 만드는 것이 글로벌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생각입니다]

김민희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옛날엔 그랬었어, 하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늘 새로워]

[뭐가요?]

[이 더위]

[전 좋은데요]

난 웃고 말았다.

브라운관 속에서 남자는 비명 없이 나동그라지고 격발음이 없는 권총이 느리게 흔들린다. 꿈속에서처럼 자동차가 고요히 폭발하고 물속에 잠긴 듯 여자가 입을 크게 벌리고 무언의 긴 비명을 지른다. 할리우드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늘 클라이맥스로만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긴 이미지 광고라고나 할까. 보고 있으면 어느새, 쫓기는 자의 심장이 내 것이 되고 만다. 내 삶을 지배하던 근심 혹은 슬픔 따위는 어디론가 밀려가 버리고 주인공의 심장이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자리잡는다. 영화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건 두 시간 동안 자기를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셀로판지로 바라본 부분일식처럼 너는 그렇게 내 속에 새겨져 있다.

선명하면서 아득하고 다만 완전한 집중을 요구하는 오만함으로, 그토록 멀리.

가을 해는 짧았고 나는 조바심치고 있었다. 자연광에 의존해 하는 촬영에서는 타이밍을 놓치면 일은 다음날로 미루어진다. 기우는 해에게 스탠바이를 외칠 수는 없으니까.

밖으로 나오자 거리에는 여름비답지 않게 질량도 없이 어깨에 얹히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열은 습기에 갇혀 더위는 한낮처럼 여전했고 술꾼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8차선 도로 위를 뛰어다녔다. 택시들은 누가 따블을 외치는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서행하고 있었다. 열대어들처럼 더위 속에서도 지치지 않는 질긴 활기가 밤거리에 가득했다.

모두들 어딘가로 가려고 기를 쓰고 있었고 나는 날마다 부딪치는 그 광경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일행은 두 패로 나뉘었다. 집과 술집으로. 날씨를 증오하며.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내는 그들이 새삼스럽게 대단해 보였다.

[사람들이 왜 저 프로에 열광할까?]

[절대 쉽게 해먹을 수 있는 요리가 아니기 때문이지]

[티파니의 쇼윈도 앞을 걸어가던 오드리 헵번처럼 미각의 아이쇼핑이지. 기왕 구경만 할 거라면 남대문 좌판에 놓인 액세서리보단 불가리 매장이 폼나잖아]

[다녀보면 우리나라처럼 음료수 다양한 나라도 드물어]

[맨 처음 콜라 마셨을 때 난 어지러웠어. 미각의 충격이라고나 할까]

[확실히 난 뉴욕에서 마시는 콜라가 더 맛있더라구]

[콜라란 음악에 있어서의 모차르트 같은 거라고 봐. 처음 모차르트를 듣다가 사람들은 가벼워, 상투적이야 어쩌구 하면서 다른 것들로 귀를 돌리지. 그렇지만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그러다 다시 모차르트로 돌아오는 거야]

[암울하네. 광고주 들으면 쓰러진다. 콜라를 제껴보겠다고 야심차게 시작해도 될까 싶은데 초장부터 콜라 지존설이니]

[현실을 알고 시작해야죠]

[패배주의에서 시작한 광고는 결코 시장에서도 이길 수 없어]

[김 대리. 거 콜라캔 버리고 다른 거 뽑아 와]

[이런 걸 두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죠]

김민희는 버리기는커녕 원샷으로 마셔버리고야 콜라캔을 내려놓았다.

[이강호부터 얘기해 봐. 사랑에 대해 얘기하긴 우린 너무 나이 들지 않았어?]

[왜 우리라고 말하는 거지? 난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서도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

[사랑이란 소통에 대한 갈망]

[무심한 들꽃 한 송이에도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 것]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를 들으며 눈물 흘린 게 언제였지?]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이라는 점에선 음료수가 필요하기도 하지]

[회색 콘크리트 벽 앞에서 다만 검은 비닐봉투 하나가 날아다니다 머뭇거리고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앉는 그런 풍경. 회색과 검은색. 느린 화면.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배경 음악마저도. 그런데 그 구겨진 검은 비닐봉투가 그리는 궤적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거죠. 그렇게 하찮은 걸로 삶을 그리고 싶어요. 그게 삶이니까.]

[자식아, 그거 영화에 나왔던 장면이지?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표절이라구요? 그건 영화였고 이건 광고예요. 그렇다면 광고가 그리는 풍경 중에 삶을 표절하지 않은 건 또 뭐가 있어요? 도대체 표절과 패러디를 가르는 기준은 뭐예요? 자수하면 패러디고 아니면 표절인가요? 웃기잖아요. 어떤 건 한 장면만 슬쩍 빌려와도 잡아먹을 듯 달려들고, 또 어떤 건 컨셉과 구체적인 그림까지 표절이 분명한데 패러디라고 쉽게 넘어가 주질 않나. 그 기준은 장르가 아닌가요? 광고를 베낀 게 아니라면 표절이 아니라고 봐요]

[그 기준을 가르쳐줄게. 물어봐]

[기준이 뭐예요?]

[안 베꼈다고 끝까지 우기는 것]

아하하. 강호는 소년처럼 웃어댔다. 

[안 돼]

[안 되긴. 어깨에 점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

어이없다는 듯 민은 웃었다. 척추의 둥근 뼈 모양이 아기자기하게 아래로 이어지던 등, 부화하기 직전의 조류처럼 발육부전의 날개를 감춘 듯했던 견갑골, 그 위로 자잘하게 뿌려져 있던 검은색과 갈색의 작은 반점들. 그것들은 확실히 하나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태껏 그 표정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컵라면 남은 거 있어?]

[웬일이세요? 집에 가서 홍어 테린 잡수셔야지]

[곧 회의 시작이야]

[왜 우리 회의 시간은 꼭 황혼에서 새벽까지예요?]

[흡혈의 시간이 되는 거지. 새벽에 걸어나오는 우리 몰골을 봐. 흡혈귀를 안 만났다면 어떻게 그렇게 누렇게 뜨겠나]

살아간다는 건 그 무언가를 위해 날마다 존재의 일부를 내어놓는 일이다.

대답 대신 일어나더니 강호는 컴퓨터를 켰다.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자 상투적인 빨간 페라리가 모터쇼에 나온 것처럼 클로즈업됐다.

[시뮬레이션 카레이스예요]

배경이 아주 낯익었다.

[어디야?]

[시청에서 반포대교를 지나 예술의 전당에서 양재대로로 가는 코스예요]

[골 때리는구나. 기왕 하는 게임인데 좀 폼나는 구간 없어? 몬트레이 해안이라든가 파리 다카르 랠리라든가]

[형은 시청에서 반포대교 넘어가면서 시속 180킬로미터로 달려본 적 있어요?]

[하긴]

마음을 연약한 근육이라고 말했던 건 우디 앨런이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불수의근이다. 내 것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얘들 말이야, 작년하고 또 다르지?]

[놀라운 크리에이티브야. 벽을 느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교육 제도를 생각하게 돼. 원초적인 발상의 자유로움, 나이가 들어버리면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게 되는 그런 감각 같은 거]

[고급스런 유머를 볼 때는 열등감을 느꼈어, 저건 안 되겠어 싶은]

[이제 컬트는 한물 가고 유머의 시대인가?]

[컬트는 그사이 벌써 낯익고 지루한 기성의 감각이 돼버린 거 같아. 아무래도 한동안은 유머와 엽기가 주목받지 않겠어? 이번에도 그런 것들이 눈길을 끌었잖아. 피가 흐르는 돼지머리, 굴러다니는 눈깔, 뒹구는 의수]

[과연 십년 후의 광고는 어떨지 정말 궁금할 때가 있어]

자막이 잘 안 보인다던 민도 어느 순간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울고 있었고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민이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팔뜨기처럼 자막과 자동차 사이 어느 지점에 상이 맺히지 않는 시선을 던져놓고 나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들려준 영화의 스토리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는데 민은 자꾸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금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습한 바람이 먼저 불고 멀지 않은 곳에서 하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내렸다. 비는 시작하면서 바로 장대비로 내려꽂혔다. 늦여름 비였다. 창문을 올리고 와이퍼를 켰다. 흐르는 빗물 사이로 스크린이 비틀려 보였다. 우리 두 사람도 누군가의 시선 속에 저렇게 왜곡되어 있을 것이다. 푸른 색조의 화면이 호수처럼 일렁였다.

[오래된 영화 필름을 보는 것 같아]

민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듯했다.

[윤호영, 넌 빠져. 경쟁사 직원하고 어울린 거 알면 우리 잘린다구]

[눈물겨운 식민지 역사의 현장에서 그런 치사한 구분은 하지 말자. 여기선 한국인이냐 일본놈이냐, 그 구분만 있을 뿐이야]

[동족의 탈을 쓴 프락치가 늘 있었지]

[하긴 한 시간 전엔 우린 전부 재퍼니즈였으니]

[무슨 소리를 해도 난 안 빠져]

아무런 인테리어도 없는 가건물 형태의 테크노바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완전히 딴세상이었다. 비트만 앙상한 테크노 음악이 귀를 찢었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아이들은 모두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방치했다. 십대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가설 무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넘치는 에너지를 털어내 버리고 싶다는 듯 발악을 했다. 공중으로 팔을 던지며 환호하는 옆의 아이에게 물었다.

[왜 여기에 오는가?]

이상한 질문이라는 듯 남자아이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춤추러]

막춤과 관광버스 춤을 추는 우리 일행을 둘러보며 나는 한 아이에게 더 물어보았다.

[왜 여기에 오는가?]

[나를 잊고 싶어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에게 물어보았다.

[왜 여기에 오는가?]

[여기 있는 동안은 편안하다. 그 무엇도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호텔 앞에 밴이 도착했을 때 김윤석이 강호에게 물었다.

[강호, 네 가이드 감동적이었어. 근데 오늘 묻지마관광의 컨셉은 뭐였어?]

[광고 제작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거죠. 장소 헌팅이든 감각의 재충전이든]

윤호영이 빈 캔이 가득한 박스를 챙기며 중얼거렸다.

[저 새끼, 죽으면 지옥편 이미지 광고 제작할 놈이야]

아무래도 삶이란 정색을 하고 저울질하기엔 너무 무거운 어떤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무거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여행을 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소비한다. 그리고 절대로 상처받지 않을 거짓 사랑에 짐짓 빠져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광고에서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말하자면 이 현실의 느낌과 가장 먼 것, 그러니까 깃털같은 가벼움, 거칠게 말하자면 진실과는 대척점에 있는 어떤 것. 현란하며 경박한, 눈 한번 깜빡이면 잊을 수 있어야 하는. 그 속에서 현실 속의 길은 잠시 잃어버릴 수 있는.

[어디쯤 왔어요?]

비행기 안에서 어디쯤이란 말은 아무래도 우습다.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해서 아직 서울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저 아래쪽으로 펼쳐진 대륙의 텐진산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프랑크푸르트와 서울. 그 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 아니면 거기. 스크린에는 고도 9000, 비행속도 시속 800, 그리고 지도상에서의 현재 위치를 나타내는 비행기 마크가 점멸하고 있다. 이 가공할 만한 속도는 그러니까 시속 4킬로미터로 천천히 산보할 때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미풍이나 발바닥에 느껴지는 흙의 감촉이 없이 우리를 어딘가로 옮겨놓는 것이다.

일이 너무 힘들어 다른 데 눈돌리지 못하고 그것에 파묻혀 산 세월이 있었다. 일에 매혹되어 미친 듯이 파고든 시간도 있었다. 그 시간들은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라 내 열정과 에너지를 조금씩 잘라서 가져가 버렸다. 나는 지금 내가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에 차가워져 있음을 느낀다. 물이 말라버린 오래된 우물처럼 차갑고 검은 공기만이 내 영혼을 채우고 있다.

내가 매달렸던 일들. 기껏 생리대의 기능을 예찬하거나 합성세제를 판매하려 애썼던 일들을 대단한 창의력이 필요한 예술적인 작업이라도 되는 듯 몰두했던 시간들. 조금 전 헤어진 친구와 나누었던 저급하고 불쾌한 농담을 그와 헤어지고 나서 혼자 떠올릴 때처럼 지난 시간에 대한 가혹한 모멸감만이 남아 있었다.

짧은 동안이지만 베를린 여행을 통해 이 어둡고 황폐한 우물에서 벗어나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결과는 반대였다. 공중에 떠서 자신이 빠져나온 육체를 내려다보게 된 영혼처럼 지금의 내 모습이 조감도로 선명하게 보였을 뿐이다. 

[서두르진 마라]

[병약하다는 건 조직 속에서 중요한 결격 사유예요. 동정 같은 건 없어요. 하자가 있는 제품은 아무도 구매하지 않는 것처럼요. 저는 잊어버리려고 해요. 가슴속의 동맥이 조금씩 망가져 가고 있다는 걸요. 어떤 여자와도 진짜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자기 검열을요. 이 거리에서 몸이 아프다는 건 열등한 종이라는 얘기일 뿐이죠.]

과장된 낙천성으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상처를 부끄러워한다. 하자 있는 상품처럼. 이 거리에서는 운명이 지워준 상처까지 인격의 결함이 되어버린다.

[보이지 않는 유리 감옥을 깨뜨리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강호야]

[나침반과 불씨와 지도 한 장만 들고 떠나고 싶은 거죠?]

[비웃는 거냐?]

[형, 장밋빛 인생이란 영화나 로맨스 소설 속에나 있다는 것쯤 알 나이가 됐잖아요]

강호는 차를 내 아파트 앞에 세웠다.

[누가 여기 데려다 달랬나? 지가 무슨 김유신의 말이라고]

[천관녀도 사랑하고 삼국 통일도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쩨쩨한 김유신은 되지 마세요]

강호의 랜드로버는 여름밤의 무거운 습기 속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노랗게 변한 아카시아 잎 하나가 팔랑거리고 눈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여름도 끝이었다.

기대앉아 담배들을 피우고 있는 등뒤로 흰 종이들이 이산가족을 찾는 벽보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으라고 붙여놓은 종이다. 자다가도 먹다가도 음담패설을 하다가도 한 줄의 아이디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펜의 색깔도 다양하기만 하다.

설득이냐, 이미지냐.

기업 상징물 활용할 것.

나는 빈약한 진실보다 화려한 허위를 사랑한다.

강호야, 기획 회의 이렇게 일찍 들어오는 거 아주 불행한 거다, 너.

누나, 질투하지 마요.

우리나라 광고 시장은 연 5조 원 이상의 규모로 세계 10위권.

흑백 이미지.

에게 해의 물빛.

사랑 속에는 한없는 너그러움과 지독하게 편협한 질투가 공존한다.

아, 사랑의 아포리즘씩이나.

혹은 광고주는 주님이다!

거의 기획 아이디어와는 상관없는 낙서투성이였다.

늘 그랬듯이 초읽기에 몰려야 아이디어들이 나올 것이다. 혹은 이런 발효의 시간이 있기에 초읽기에서 승부수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합숙에 들어가면 처음엔 한없이 풀어지게 내버려두었다. 발효와 부패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닿을 때까지.

나는 재킷을 걸치며 앞장서서 걸었다. 허깨비처럼 속을 빼놓고 사는 걸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간편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들고 다니기엔 크고 투박하고 무거운 그 카메라를 나는 늙은 애완견을 대하는 심정으로 다루었었다. 겉으론 원수처럼 구박하면서 속으로는 애정뿐이었다. 오래 같이 부대끼다 보면 사물과 사람 사이에도 정이 든다. 차에서 떨어져 다른 차 바퀴에 깔리면서 만신창이가 될 모습을 상상하니 제발 누군가가 주워갔으면 하는 마음이 된다. 나 대신에 내가 보았던 것을 기억해 주었던 것, 무심한 내 눈이 그냥 스친 풍경의 에스프리를 되찾아준 충실했던 것, 시즌이 끝난 야외 미술관에서 민의 모습을 담아서 내게 초라한 흑백 사진이나마 남겨주었던 것. 이 생에서 만나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알려주고 그 카메라는 나를 떠났다. 아니, 그걸 버린 건 나였다. 어깨에 걸리던 묵직한 그 무게가 정확한 분량으로 마음에 와서 얹힌다. 무엇이든 잃고 나서야 제 마음속에서 그것이 자리 잡고 있던 공간의 크기를 손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는 게 나라는 인간인지.

문을 열자 귀를 찢는 음악 소리와 번쩍이는 조명이 세찬 물살처럼 부딪쳐왔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야. 누군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술과 안주. 공허한 웃음소리. 얼굴과 팔과 몸 위로 가차없이 흘러내리는 색색의 불빛들. 그 광선 속에 사람을 선동하는 이상한 성분이라도 들어 있는지 맥주를 한 잔씩 들이켜고는 전부 스테이지로 달려나가 버렸다. 플래시처럼 터지는 조명 아래 사람들은 하얗게 혹은 푸르게 순간순간 바뀌었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나는 구경만 하고 앉아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일본 노래가 흐르자 윤재호와 김민희는 블루스를 추고 나머지는 자리로 돌아왔다.

[쟤들 어떤 사이야?]

[멀더와 스컬리라고나 할까요?]

[연애 감정은 없다는 얘기야?]

[본인들 외엔 누구도 알 수 없단 얘기죠]

[내일 죽더라도 지금은 열등한 종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요]

[뭘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만도 아니에요. 나 자신에게도 내 연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요. 형, 죽어가는 나무는 미친 듯이 열매를 맺는다더군요. 한 그루 식물에게도 이생은 그토록 질기게 뿌리내리고 싶은 영토인데 난 아니라고 말하면 웃기는 허세가 되겠죠. 형, 나 오래 살고 싶어요. 형처럼 광고계의 스타도 되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요. 절반만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놀랍도록 매혹적이에요. 형은 몰라요. 하루하루가 느낌표 같은......]

강호는 편육 접시에서 두껍게 썰린 돼지 내장을 하나 집더니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거 말이에요, 뭐 같아요?]

[막창 같은데?]

[<블루 벨벳>에 나왔던 잘린 귀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강호는 그걸 입에 넣고 씹었다.

[맛은 어때?]

[맛도 비슷해요]

궁금한 건 그것뿐이라는 듯 우리는 귀 모양의 막창에 집중했다. 뜨끈한 순대국밥과 달콤하게 느껴지는 소주 한 잔이며 상처나 아픔 따위 형이상학적인 고민이란 우습게 느껴지는 그런 저녁도 있다. 그래야 견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