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권준호

 

 

 

 

 

 

누군가 꾸준한 태도를 유지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꾸준함은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치열함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쉽게 판단하는 '원래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복제를 피하려 스스로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으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악착같이 작업에 매달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만드는 작업물을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경신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꾸준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향한 존중과 칭찬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말하자면, '원래' 그런 사람이란 없다. (33p. 꾸준함의 미덕 中)

 

 

 

자신이 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이 그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꾸는 꿈은 막연한 동경에 머무르게 되지만, 내가 꾸는 꿈의 형태를 조금이라도 가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흐릿한 이상은 선명한 목표로 거듭날 수 있다. 명확한 근거와 분명한 이유가 부재한 동경은 작은 떨림 하나에도 그 방향이 쉽게 바뀌고 말지만, 풍부하게 수집된 근거를 각주처럼 나열할 수 있는 꿈의 형태는 삶의 무참함 속에서도 그 골격을 단단히 유지해 낼 수 있다. (37p. 꿈의 형태 中)

 

 

 

작업자 개인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작업이 아닌, 클라이언트와의 의견 조율이 무엇보다 중요한 디자인 작업은 그 결과물의 대상이 누구이며 어떤 특성을 갖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식하며 작업해야 한다. 특히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페스티벌이나 공공 미술 전시의 경우, 특정 대상이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디자인이 진행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대중'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해석이 엇갈린다. 앞서 언급한 클라이언트에게 대중은 노골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은 이미지에서는 어떤한 상징이나 은유도 읽어낼 수 없는 존재이며, 해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직설적인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오로지 대중의 취향에 맞춰서 디자인되었다는 작업은 한편으로 대중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대중의 눈높이를 무시하는 디자인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디자인을 대하는 '대중'의 수준이 그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사실일까.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라는 표현이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대체할 만큼, 오늘날 디자인은 관계의 가치를 최우선에 두고 있고, 때문에 디자인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적 수준에 비례해 생산되고 소비된다. 문화 강국을 자부하는 대한민국에서 디자인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대중을 어떠한 재해석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단순한 그림을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에 대한 독해력이 없는 존재로 치부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멸시에 가깝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대중적인 디자인'이란 '대중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어떤 해석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게으른 디자인일 수 있다. 반면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다양한 형식으로 시각화해 프로젝트의 주제를 은유와 상징으로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는 디자인은, 대중이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품고, 그들에게 디자인을 매개로 한 진지한 대화를 건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52p. 대중적인 디자인 中)

 

 

 

디자이너는 사진이라는 단편적인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드러낼 것이며, 무엇을 감출 것인가를 판단하고, 그 드러냄과 감춤 사이에서 사진이 전달해야만 하는 이야기의 운율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보여줌으로써 전달되는 것과, 가림으로써 연상되는 것 사이의 긴장감을, 디자이너는 지면 위의 다른 요소와의 조형성과 맥락을 고려하며 배치해야 한다. 사진이 어떻게 잘리고 붙여지는가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 그 의도적인 왜곡이 때론 악의적인 욕망으로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을, 사진을 작업의 도구로 다루는 디자이너라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 (67p. 디자인으로써의 사진, 사진으로써의 디자인 中)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더 이상 책방에 읽지 않은 만화책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 같았던 가상의 세계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을 때, 나는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았다. 현실은 만화 같지 않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매번 대면해야 하는 어른이 된 지금, 만화책의 첫 장을 넘기며 새로운 세상으로 빠져드는 설렘에 들뜨던, 그 순간이 그립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설렘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 아주 오랜만에 만화방에 가 보고 싶다. (83p. 만화 中)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너무 통속적이고 직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어느 영화감독은 "나는 언제나 노골적이잖나. 그것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뭐 어떻게 하겠나. 내가 그렇게 생겼는데"라고 답했다. 또 다른 영화감독은 평론가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작품이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며 작품의 모든 장면에 의미 부여를 하는 평론하게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글쎄요, 그것도 흥미로운 해석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단지 그 순간에 그렇게 찍는 것이 더 재미있겠다고 느껴져서 그렇게 연출했을 뿐입니다."

 

(...) 내가 의도한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주는 해석은 달콤하지만, 모든 표현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자칫 작업 자체가 주는 '재미'를 간과하게 한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유혹이기도 하다. 작업의 의미와 재미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고민할 때 이정표가 되어 주는 것은 결국 내가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언젠가는 그 답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기를. (117p. 생겨먹은 대로 작업하기 中)

 

 

 

선배라는 호칭으로 부르지만 나는 사실 그들과 같은 학교나 회사를 다닌 적이 없다. 그들에게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아 본 적도, 함께 일하며 실무를 배운 적도 없다. 그렇지만 그들의 작업과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서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고 꿈을 키워 왔다. (...) 그들 앞에서 두 손을 모으게 되는 이유는 자세만으로도 존경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깨끗하고 단정한 그 감정은 그 순수함 때문에 조금의 불순물로도 쉽게 혼탁해진다. 막연하기만 했던 동경의 대상이, 그들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소심하고 지질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제는 내가 그들보다 낫다는, 나의 성취는 온전히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우월감으로 소리 없이 변질된다. 자세는 쉽게 흐트러지고, 눈빛이, 말투가, 미세한 몸짓이 달라진다. 그 급격한 자세의 이동은, 마치 꼰 다리의 위치를 바꾸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어느새 무릎 위에 걸쳐져 까딱거리는 발목을 보는 일은 곤혹스러움과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176p. 존경 中)

 

 

 

어쩌면 '진짜 내 작업'에 대한 갈증을 표출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을 어쩔 수 없이 긍정하고 있는 자신이지만, 작업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열정을 지닌 청년이 아직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외침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현실적인 가능성이 희박한 외침이라도, 진짜 내 작업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쏟아내는 사람과의 대화는 묘한 동질감을 준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상은 서로 다른 곳에 있더라도, '진짜' '작업' 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여전히 가슴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그 설렘을 공유하는 경험은 최소한 우리가 지금에 만족할 수는 없다는 동료 의식을 고취시키곤 한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오늘도 술잔을 기울이며 '진짜'를 찾아 헤맨다. (184p. 진짜 내 작업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