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가 모니터를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돌려서 보여주었다. 발신자가 ‘홍빛나’인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제목은 ‘RE: 마케팅팀 트랜스퍼 지원자 모집’이었다. 언니가 보낸 메일의 내용은 “넵! 알겠습니다! 그런데 신입도 지원이 되나요?”였고 놀랍게도 그게 전 사원의 메일함에 일제히 도착해 있었다. 공지 메일의 발신자 아이디는 everyone이었다. 그게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 사원에게 보내는 전체 메일용 계정이라는 건,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수신자의 아이디가 everyone인 메일작성 창이 여전히 열려 있었고 내가 적은 ‘질문이 있습니다’라는 글자 뒤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하얀 바탕 위에 커서가 점멸할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회사 전체를 휩쓸고 있는 이 수군거림의 주인공이 빛나 언니가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아찔했다. 나는 두칸 정도 떨어진 빛나 언니의 자리를 건너다봤다. 언니는 자리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고 있다 해도 곧 알게 될 것이었다. 





나는 구재를 가만 쳐다봤다. 연애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연봉을 모르고 있었다. 여느 회사가 그렇듯 우리 회사도 자신의 연봉을 누설하면 해고할 수 있다는 사규가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가 모아둔 재산과 연봉을 공개해야 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말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가족오락관 찍는 것 같다는 농담을 하면서 웃고 있었다. 셋, 하던 그 순간. 나는 구재와 내가 외치는 숫자의 앞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만원. 정확히 천삼십만원 차이였다. 나보다 세전 기준 천삼십만원을 더 받는 구재는 당연히, 모아놓은 돈도 나보다 훨씬 많았다. 구재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자 자기도 민망했는지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이년 동안 백오피스에 있어서 그랬나봐.”

그래, 그게 맞는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왜 이년 동안 거기에 있었을까. 이력서에 빼곡했던 내 모든 경력이 전략기획팀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내가 일을 못해서 그랬나. 그런데 시켜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까. 무엇보다 지금은 같은 부서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연봉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야 할까. 구재가 일을 잘해서? 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딱 천삼십만원어치만큼?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구재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구나, 그래서 쟤가 화가 났구나,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다는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결혼 준비하는 내내 지겹게 봐온 눈빛이었다. 나는 진열대에서 바닐라향 핸드크림을 집어 들고 점원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제니퍼는 디자이너인데 한국 사람이다. 회사가 위치한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위계 있는 직급체계는 비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영어 이름을 왜 쓰나? 문제는 대표인 데이빗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수평문화 도입은 핑계고 촌스러운 자신의 본명─박대식─을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어 이름 사용의 폐해는 또 있었다. 이름만 부르고 존칭을 생략하기 때문에 연장자가 말을 놓기 더 쉽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나는 본명이 ‘김안나’라서 영어 이름도 그냥 ‘Anna’로 하고 입사했더니 여기저기서 안나, 안나, 이러면서 은근슬쩍 말을 놓는 통에 불릴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상의 자아와 분리 가능한 새로운 영어 이름을 지었어야 했다. 예를 들면 ‘올리비아’라든지.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그달 25일,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거북이알은 유비카드 포인트를 조회할 수 있는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회장의 한마디에 정말로 월급이 고스란히 포인트로 적립되어 있었다. 그 커다란 숫자를 보는 순간, 거북이알은 심장께의 무언가가 발밑의 어딘가로 곤두박질쳐지는 것만 같은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거북이알은 육교의 중간쯤에서 난간 쪽으로 다가가더니 거기에 양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나도 그녀 옆에 다가가서 주변 풍경을 둘러봤다. 표면이 거울처럼 반짝이는 빌딩들이 빼곡하게 펼쳐져 있었다. ‘테크노밸리’라는 이름을 너무나 의식한 탓에 지나치게 미래적으로 지어진 건물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SF영화에서 본 비정한 우주도시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크노밸리에도 겨울이 지나면 물이 흐르고, 봄이 오고, 벚꽃이 예쁘게 피고, 또 여름이 올 것이다. 거북이알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우와, 저기 엔씨 빌딩 진짜 멋지다.”

판교에서 가장 큰 게임 회사인 엔씨소프트 사옥이었다. 회사 규모만큼 건물의 크기도 압도적이었다. 내가 말했다.

“저 건물에 유리 한두장 정도는 제가 붙였다고 봐야 할 거예요.”
“리니지 하나봐요?”
“예전에요.”
“이 동네에는 스타트업도 많죠?”
“엄청 많아요. 저희가 입주해 있는 건물에도 대여섯개는 있을걸요.”
“어디서 읽었는데, 전체 스타트업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비율은 3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어때요, 우동마켓은 성공할 것 같아요?”

나는 다시 엔씨소프트 사옥을 바라봤다. 거대한 건물 가운데가 뻥 뚫려 있었다. 옆으로 길쭉한 ‘ㅁ’자 같은 모양새였다. 그 사이로 한낮의 쨍한 하늘이 보였다. 사원증을 걸고 커피를 들고 돌아다니다보면 누구나 한번씩 올려다보게 되는 네모난 하늘이었다. 나는 액자 틀을 두른 것 같은 네모반듯한 하늘을 볼 때마다 그 속으로 무언가가 통과해 지나가는 상상을 했다. 용, 새떼, 열기구, 헬리콥터.

“글쎄요. 저희 대표나 이사는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하겠죠? 어떻게 돈 끌어오고, 어떻게 돈 벌고, 어떻게 3퍼센트의 성공한 스타트업이 될지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하느라 걱정이 많을 거예요. 전 퇴근하고 나면 회사 생각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나도 그래요. 사무실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 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예를 들면 거북이라든지, 거북이 사진이라든지, 거북이 동영상이라든지.”

내가 고개를 돌려 거북이알을 쳐다봤을 때 그녀는 이미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첩을 스크롤하고 있었다. 그리고 클로즈업으로 찍힌 거북이 옆얼굴 사진을 하나 보여줬다. 거북이의 눈 밑이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귀엽죠? 우리 집 거북이예요. 이름은 람보.”

그녀가 덧붙였다.

“람보르기니의 람보.”

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조금 전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거북이 사진을 내밀며 말했다.

“얘는 둘째 마쎄.”
“……라티?”
“오, 그렇지.”

그녀는 신이 나서─역시나 방금 두마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거북이 사진을 한장 더 골라 내밀었다.

“얘가 막내고.”
“페라일까요? 페라리의.”
“자기, 엄청 똘똘하구나.”

나는 지갑을 꺼내면서 거북이알에게 물었다.

“우동마켓에 올려두신 물건이요. 한개 더 살 수 있을까요?” 

“우리 회사는 소규모잖아요. 그래서 개발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랑도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하거든요. 열명도 안 되는데 트러블이 생기면 여기는 피할 수도 없는 곳이잖아. 매일 봐야 하니까. 그래서 어떤 소셜함, 이런 것도 중요하거든. 사람들하고 잘 어울릴 수 있겠어요?”

그때 케빈은 카이스트 레고 동호회에서 삼년 동안 총무일을 했던 경험을 예로 들며 자신의 사회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나는 대표 옆에 투명인간처럼 앉아 있다가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카이스트, 레고, 총무. 그 어느 하나도 사교적으로 들리지 않는데. 총무가 아니라 회장이라면 또 몰라. 내성적인 개발자는 대화할 때 자기 신발을 보고 외향적인 개발자는 상대방의 신발을 본다더니. 이 세계에서 레고 동호회란 대체 뭐란 말인가. 크레이지 파티광쯤 되는 건가. 

머리로는 이걸 받아도 되나,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손은 레고 박스로 향하고 있었다. 알고리즘에 오류가 생긴 로봇 같았다. 

사실 야근하려고 남아 있던 건 아니었다. 루보프 스미르노바 리사이틀 예매가 아홉시부터 시작이었는데 집에 도착하면 아홉시를 훌쩍 넘길 것 같았다. 아예 회사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예매에 성공한 다음 마음 편히 퇴근할 생각이었다.

나는 예매 사이트의 서버 시계를 켜두고 21:00:00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고독한 조성진’ 채팅방에 접속했다.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카네기홀 사진 고화질로 보내주세요”라는 문장이 쓰인 조성진 사진을 올렸다. 나는 내 맥북의 ‘쵸팽’ 폴더를 열었다. jpg, gif, avi로 된 수천개의 조성진이 모니터 위에 좌르륵 펼쳐졌다. 그중 하나를 더블클릭했다. 입을 오리처럼 오므리고 앞머리를 찰랑거리며 연주하고 있는 gif 파일이 떠올랐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연주하고 있는 곡이 드뷔시의 「달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완벽하게 잘생겼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우아하게 생겼을까.

이번에는 카네기홀 사진을 모아둔 폴더를 열었다. 그중 화질이 좋은 몇장을 채팅방에 보냈다. 그러자 또 금방 사진이 한장 도착했다. 그랜드피아노에 턱을 괴고 있는 조성진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여백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아홉시가 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또 있었다. 몇달 전 예매해두었던 조성진 홍콩 리사이틀이 벌써 다음 달이었다. 공휴일과 주말, 그리고 아껴둔 연차를 하루 붙여서 삼박 사일을 놀고 공연도 볼 것이다. 항공권 예매 사이트에 접속한 다음, 홍콩행 왕복 티켓을 결제했다. 조금 비싼가 싶었지만 오늘은 월급날이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했다.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

기억 속 교실은 하나같이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

너는 항상 왼쪽 창가
그 너머가 빛

머리가 큰 천사가 둥둥 떠 있고
미사일과 운석이 격돌하는 장면

그런 장면은 내 기억엔 없지만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

그러나 이런 기억은 있었다

 교실 뒷문을 반쯤 연 채
창가에 앉은 너를 하염없이 쳐다만 보던 날
빛을 받은 너의 목덜미가 너무 하얘서 혼자 놀랐던

그것이 나의 처음이었고

당신의 시에는 현실이 없군요
현실에는 당신이 없는데요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그냥 흰 빛뿐이지만
그 이상이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지만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
죽은 사람이나 왼쪽으로 걷는 거라고 누가 소리지르고 있었다

이미지 사진

아름다움 하나
나무의자 둘

잠시 찾아와서 내려앉는 빛

이 장면은 폐기되었고

이해하자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거잖아 하나
서양 난 화분이 쓰러진 모양이 둘

너는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하니(다 날아가고 눈 코 입만 남은 사진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날들의 기억)

사진관에 모이는 것으로 마음을 남기던 시절의 기억 속으로 내려오는 저녁이 하나 휘어지는 빛이 둘

(이 순간을 어떤 영화에서 본 것만 같다고 잠시 느꼈을 때, 그것이 어떤 시절에만 가능한 착각이라는 점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서의 부끄러움)

죽은 아름다움 하나
부서진 나무 의자 다섯

자꾸 뭘 기억하려고 그래(여전히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빛) 예전에는 이렇게 많이들 날려서 찍었지?

(작은 강의실이 젊은 옛날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미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귀를 기울이세요 말하는 사람과 이미지인데 왜 귀를 기울여요 말하는 사람)

웃으세요
친구끼리 왜 그렇게 멀찍이 서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그냥 웃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의 사라짐

그 장면은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빛이 들어가면 다 상하니까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세요

불 꺼진 실내에 웅크리고 앉은 빛 

받아쓰기

바다 쓰기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 삼십 년 전 필름인데 인화할 수 있나요?”
“뽑아봐야 알 것 같은데요”

사진관에 앉아 기다리는데 그런 말이 들려왔다
나는 바다를 쓰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만

“이 사람 멋있네요”
“죽었어요”

겨울 바다는 너무 적막해서 아무것도 받아 적을 말이 없었다 바닷바람은 자꾸 뭐라고 떠드는데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쓰기요
받아쓰기

매년 바다가 넓어진다고 했다

“이 사람은 누구 동생인데 죽었어요”
나는 흰 벽을 뒤로 두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턱을 당기세요 이쪽을 보세요 미소, 아주 조금만요
지시를 따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이 웃고 있으면 너무 이상해”

터지는 소리가 나고
빛이 보이고

화면 위로 보이는 얼굴은 모르는 사람

바다를 어떻게 써요
왜 쓰는데요

바닷가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겨울 바다 위를 물새들이 돌고 있었고

“조금 돌아갔어요 이 사진은 안 되겠는데요”
그런 말을 들었다 

인화

그는 저녁을 먹다 말고 여름 계곡의 물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 거기에도 음악이 있다나

지난여름, 우리는 계곡의 한가운데 있었다

계곡물로 차가워진 수박과 웃고 떠드는 아이들, 여름의 빛과 근교 유원지의 나른한 소란스러움 따위로 가득한 곳

거기서 우리는 그 여름의 마지막 수박을 갈랐다
그러자 쩍 소리와 함께 시커먼 속이 보였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고 시원했지만 그다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산속의 밤이 어두웠고 반딧불의 흐린 빛은 물위를 떠돌다 곧 사라졌다는 것만이 기억날 뿐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수박의 시커먼 속에
희고 작은 빛이 어른거리는 장면만 떠오른다

그런데 그 수박은 뭐였을까? 그가 질문을 꺼내자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그날의 저녁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후로 우리의 삶은 결코 해명되지 않는 작은 비밀을 끌어안은 채로 계속된다

잠들기 전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끝에도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놀라는 순간에도

그 여름은 뭐였을까, 자꾸 생각하게 되고

우리의 생활은 여름밤의 반딧불이 점멸하다 사라지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끝나게 된다

장미는 눈도 없이

장미가 화병에 꽂히기로 결심했으므로
화병에 장미 한 다발이 있을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면 온 집안에 썩은 내가 가득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왜 꽃을 버리지 않느냐고 묻겠지
너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한 달이 지나면 장미는 완전히 마르고
너는 이 집에 없을 것이다

꽃은 묘지에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는 법인데

화병에 장미 한 다발이 있을 것이다
목이 꺾인 채로 말라버리기로 되어 있는 장미들

나는 너에게 장미 한 다발을 준다
그것이 장미의 결심이라고 믿으면서

당신 영혼의 소실

〈당신은 지금 죽었습니다
약간의 경험치와 소지금을 잃었습니다〉

밥을 먹고 있는데
그런 메시지가 어디 떠오른 것 같다

스테이터스, 그렇게 외쳐도 무슨 창이 허공에 떠오른다거나 로그아웃, 이라고 말한다고 진정한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식탁 위에는 일인분의 양식이 있고
창밖으로는 신이 연산해낸 물리 법칙에 따라 나무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너는 분갈이를 해야 한다며
거실에 앉아 식물의 뿌리와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이미 구면인 신이 찾아와 내게 말을 건다

〈이것이 당신의 영혼입니다〉
—작군요

〈이것이 당신의 슬픔입니다〉
—없는데요

〈그것이 당신의 슬픔이군요〉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나무들의 흔들림이 멈춘다)

회상이 끝나면 어느새 너는 없고 너무 커서 부담스러운 고무나무 한 그루가 거실 창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이 나무에는 너의 영혼이 깃들었고
이것을 잘 가꾸면 언젠가 네가 열매 맺힐 것이라 믿으며

나는 잘살고 있다
딱히 네가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신은 지금 죽었습니다〉

다시 내 머리 위 어디쯤
메시지가 떠오른 것만 같았고

—부활은 안 할게요
그렇게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잃어버린 정신을 찾아서

비 내리는 숲입니다
1.들짐승 2.살인자 3.귀신 4.아는 사람
어둠 속에서 고개를 내민 것이 당신을 설명합니다

너는 대뜸 그렇게 말했지
우리가 함께 비 내리는 숲을 걷고 있던 때였다

진짜로 뭐가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나의 말에
그럼 그게 너를 설명하는 거지 뭐
너는 또 그렇게 말하고

밤은 깊어가고 비는 자꾸 내렸다 우리는 작은 빛에 의지하여 어둠 속을 걷고 또 걸었고

이곳이 추락 직전의 비행기라면 버려야 할 것은 1.몸 2.마음 3.영혼 4.과거 가운데 하나이고, 또 우리는 뱀과 새와 원숭이를 데리고 사막을 건너야만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누며

아무것도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저 웃으며

어둠 속을 걷던 그런 날도 있었지

아직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때 어둠 속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보았으며

그것이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이고,

그 비밀이 영원히 비 내리는 숲의 가장 어두운 곳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나

미행이 붙었으므로 집에 돌아가선 안 된다
오늘은 그런 설정으로 밖을 헤맨다

정글짐은 나의 기지인데 기밀성이 부족한 것이 흠이다 동료 요원 K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그도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리라

통행 차량 적음 날씨 흐림 비상식량 고갈
모든 상황은 최악이다

그러나 우리는 임무에 목숨을 거는 요원들이라는 설정이다 지나가는 이들 가운데 누가 조직의 동료고 누가 기관의 말단인지 확인한다 어느 누구도 상호작용 가능한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진다 흘러가는 저녁에 마음을 기대고 그저 눈감고 싶은 고독은 없다

K는 이미 조직의 부름에 끌려갔다
인이어와 상태창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나의 상황이 한계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서는 안 된다

갈 곳 없는 새들이 저 하늘 위를 오가고 있다

그런 설정으로 새들은 내 머리 위에 떠 있고
이 고독 또한 설정에 불과하다 

잃어버린 천사를 찾아서

이것이 드라마나 영화라면 지금이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영대의 얼굴에 드리운 거리의 빛을 보며 형식은 생각한다

겨울밤
사람들의 입에서는 조금씩 영혼이 흘러나오고 있다

조명이 꺼진 실내로 크리스마스캐럴이 흘러들어오고 있었고, 형식과 영대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어떻게 이 작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까

형식은 사랑을 시작하려다 말고 밖을 보며 생각한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온 침묵을 견디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때를 천사가 찾아온 것이라 한다고, 형식은 영화에서 들은 말을 떠올린다 그 또한 영화의 마지막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밤은 고요하고 거룩한데
사람들은 아직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밖을 헤매고

말 없는 영대의 입에서 영혼의 흐린 빛이 흘러나왔다

침묵의 천사가 이 자리에서 우리를 찾아와 다시 떠나고 있다
형식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이 장면을 구성하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믿음으로 하나 되어

고지서가 날아와서 관청에 찾아갔어요 어떻게 된 일이죠 저에게는 가족이 없고 재산이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쓰러져가는 집과 늙은 개 한 마리뿐입니다 그러나 관리는 정말 가진 것이 그것뿐인지 잘 생각해보라 말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늙은 개를 위해 만든 개집을 빼면 정말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어요 일은 모두 끊겼고 날은 몹시 추웠어요 집은 외풍이 끊이질 않아 개집에 들어간 개를 불러 끌어안고 함께 잠들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는 폭설의 대법관이 나타나 영원히 그치지 않는 눈보라 형을 선고했어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니 다시 어두운 실내였고 개는 품속에서 숨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엇을 죽여야만 하는지 깨달았어요

내가 아는 모든 것

책을 펼치면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 그게 참 재미있다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개를 끌고 나오기도 한다 때로는 세상을 구하거나 끝낼 때도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게 진짜는 아니라는 것

이것은 네가 쓴 책의 부분이다

하늘이 푸른데 하늘이 푸르다고 책에 쓰여 있다 마음이 무너졌는데 슬픔에 빠져 매일 술에 취해 있다고 쓰여 있다 내 영혼의 불꽃, 그렇게 쓰여 있다 눈밭 위의 고독이라고도 쓰여 있다 너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책에 있는 것

멀리 지나가는 새들의 이름이 책에 있다 새의 모양과 생활사도 있다 책을 덮으면 새를 무서워하는 네가 있고 흘러가는 시간이 있고 새가 지나갔으나 보이지 않는 궤적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모르는 것

너는 사람들이 잠들면
아주 큰 책이 나타나 모든 것을 덮기 시작한다고 썼다

책의 그림자가 모든 것에 드리워 밤이 깊어지면 모두가 이름을 갖게 되고, 모두가 하나의 책에 들어가게 되고, 아주 큰 책은 더 큰 책이 된다고도 썼다

새 한 마리가 우리 머리 위를 맴돌다 떠나간다
내가 아는 것은 그 새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새가 울면 아침이 온다 아침이 오면 책이 펼쳐진다 책을 펼치면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겠지 더 큰 책 안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내가 알고 있었다 그게 참 이상했다 

자율주행의 시

서울에 새로 생긴 미국식 중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지

대단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게 함께하는 첫 식사였지

(같이 밥을 먹으면 친밀도가 높아지고 친밀도가 높아지면 그전까지는 불가능했던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결혼을 한다거나
지구를 구한다거나

숨겨진 엔딩을 발견할 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식사 이후에 나온 포춘쿠키 안에는 그렇게 적힌 쪽지가 있었다

그 순간 실내는 시시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음소거되고
사람들은 조금 느리게 움직이고

공중을 떠다니던 먼지들조차 멈춘 것만 같았다
정말 이게 영화였다면 어딘가에 타이틀이 떠오르겠지

그러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아도
오프닝 음악이 흐른다거나, 커다란 타이틀이 화면을 채운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

사람 가득한 거리에서 손을 잡고 걸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긴 하루를 보내고 같은 집에서 그와 함께 밥을 먹고 잠들어도
우리 삶에 펼쳐진 무수한 난관을 모두 이겨낸 후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함께 밥을 먹었지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눈을 뜨자 사람으로 가득한 강당이었고 사람들이 내 앞에 모여 있었다 녹음기를 들고 지금 심경이 어떠시냐고 묻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 말을 하라고 하고 그러나 나에게는 할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어요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온걸요

눈을 다시 뜨니 바람 부는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지금요 더 늦을 순 없어요 자칫하면 모두가 위험해져요

무서워서 가만히 서 있는데 누가 나를 밀었고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을 뜨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힌 사람의 꿈을 꾸고 있었고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애당초 마음도 없지만

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중계

머그잔에 얼음을 담았고
거기 커피를 내렸습니다

쩍 하고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바깥은 분홍빛 하늘
어제도 그제도 봤지만 매일 놀라는 마음입니다

요즘은 휴거가 제철입니다
창밖을 내다보면

아이와 놀던 엄마가 혼자 들려올라간다거나
산책나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나온 사람들이 늘었다거나
봄날 저녁의 풍경입니다

너는 웃으면서 이곳을 보고 있습니다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반투명 처리가 되었군요

플레이한 적도 없는 게임의 엔딩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익숙한 일입니다

작은 영혼마저 수차례의 죽음 끝에 너덜너덜해진 것이 작금의 처지

퇴근 후 봄날 저녁 커피 한 잔의 여유 같은 것만이
저의 작은 위안입니다

쩍 하고 얼음이 깨지는 소리
커피는 검고 그 맛은 물에 한없이 가깝습니다

철거비계

이야기를 들려줘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눈 내리는 겨울밤, 쏟아지는 눈을 보며 차가워진 두 손을 마주 잡았을 때,

한쪽 어깨에 머리를 기댄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때 웃으면서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다 말해줘
빠짐없이 들려줘

(무대에는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 서 있다 그 사람은 슬픔을 연기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제 끝없이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니까

어떤 이야기는 오래도록 반복되어 사실이 되니까
또 어떤 사실은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남겨질 테니까

양치 컵을 한 손에 들고 반쯤 감은 눈으로도, 좋은 날씨 속에서 함께 손을 잡고 걷다가도, 흰 쌀밥을 씹고 있다가도

계속 말해줘
남김없이 알려줘

(모노드라마는 독백과 방백, 침묵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독백과 방백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지?)

가장 미워하는 것과 가장 부끄러운 것에 대해서
갑자기 떠오르는 아무것도 아닌 생각에 대해서

지금 손에 든 물건에 대해서
살면서 먹어본 가장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

더는 말할 것이 남지 않을 때까지 말해줘
기억나지 않는 것까지 다 이야기해줘

(조명이 꺼지며 공연은 끝나지만 저녁에 다시 공연은 오른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그때에도 슬픔을 모른다)

사랑이 끝나고 삶이 다 멈추면
이제 내가 말할 차례가 온다

목련

 
뽀송한 꽃잎 구름에 걸쳐져 있는 듯
부드럽게 눈부시게
 
마그놀리아 향 품고
물오른 살결 꽃숭어리로 터지는 일
피어난 봉오리마다 탄성이라
 
여기,
등 뒤 후크로부터 풀려난 날
짓눌린 자국들 비명 지르며
심장이 두 근 박 세 근 박
스캔들 예감
 
그녀,
미슐랭 가이드 찾아 떠나고 

화식조火食鳥
 

퇴화된 날개라고 꿈까지 접을 수 있을까
 
둥근 불판 위
붉은 살점에 양념 옷을 걸친 뼈가
지글지글 살점이 오그라들고 있다
 
숯 냄새는 갈비집의 오래된 습성일 터
 
양손으로 갈비를 받쳐 들고
그녀는 뼈와 살점을 깨끗하게 구분한다
 
갈빗집 음향기기 스피커의 어둠처럼 풀린 음악이
내 옆구리로 착착 감겨올 때
 
스스럼없는 한 남자, 시린 갈비뼈로 부벼 오며
뼛속 깊이 파고들던 슬픈 몸동작에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대신한다
불면의 밤은 길어졌다
 
혼란스러웠던 밤, 빈 거죽만 남겨
아담에게 갈비뼈를 반납하고 싶었다
 
뿌연 새벽 창밖은 포슬눈이 내렸고
울컥,
저 눈처럼 뜬금없는 그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슬픔
몇 겁이 지나야 자유로울지 

용추龍湫

 
계곡에 손을 담그다가
뒤를 봤다
 
먼 일이었다
 
산길로 난 샛길은 무뎌졌고
소나무들 키는 나지막하다
 
용 비늘 흔적 깊다
 
심장에 꽂힌
물매화 꽃대처럼
뜨거웠을 그들
 
억겁의 세월은
산기슭 꽃으로 피었다
 
들물은 유죄
날물은 무죄 

짜글이

   
밀렸던 말들이 공중에서 불꽃처럼 튀고 새 소식들은 양배추처럼 감싸있어 둥글게 풀어내니 뇌리에 착착 감긴다 기름때 엉킨 환풍기는 진한 농담들을 빠르게 빼내고 중요한 말들은 접시위에 차곡차곡 올려 음식 재료로 쓰인다 끼어드는 말 때문에 대화 도중 잘린 것들 모든 말, 말, 말들이 냄비 안으로 들어가 뽁닥뽁닥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안 보는 데서는 임금님 흉도 본다‘며 각양각색의양념을 끌고 와 넣고 보니 간이 짭짜래하고 감칠맛이 난다 큰 대접에 담뿍 담아 참기름 넣고 쓱싹쓱싹 비비면 목에 걸린
가시까지 꿀꺽 넘어간다 분위기는 정수리까지 훈훈해 막바지로 갈수록 서로 골수까지 내어주겠다며 밤까지 슬기롭게 이어졌다 소원했던 사이들 까지도 서로 좋다 좋다 한다

저항감이 있으니까

 
너의 근조직을 잘라 보겠어
 
앞면 5초
뒷면 5초
눈요기 3초
 
우삼겹이 노랗게 구워진 채 밥상위에 올라왔다
 
도마 위에 떨어진 살기어린 살들이 매끄러웠고 근심들이 잘려 나간 뒤라 목 넘김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번들거리는 너를 보는 눈은 노려보는 쪽에 가까워지고 까탈스러운 입을 앞쪽으로 내밀면 미각은 혀가 읽고 후각은 코가 읽어야 한다
 
입안에서 육향을 느끼고 넘길 때는 부르르 몸을 떨고 얼굴에 웃음꽃 피워 만족감 표시할 쯤이다
 
​남의 살이 내 살이 된다는 걸 단발머리 찰랑찰랑 심야영화를 같이 보고 난 뒤 알게 되었다
 
​연기는 보이는 분위기를 감싸고 보이지 않은 몸은 수평으로 넓혀지기도 

만보기

   
오른발, 왼발은 서로 모르는 사이
하지만 박자는 맞춰야 한다
찌뿌드드한 근육들
더듬더듬 만지작거리는 아침
웃자란 안개가 걷히면 시침이 분주하다
 
숨이 차도록 계단을 오르면 덩달아 숫자도 날뛰며
오늘의 최고점 향해 올라간다
 
지친 오후, 조용하다
자전거에 걸친 발
누군가에 들키고 싶지 않은 듯
그래프는 납작 엎드린 가자미처럼 꿈쩍 않는다
 
서로를 밀고 당겨주는 빌레이가 되어
늘 곁에 두고 그 마음 읽는다 

내부 고발자

건널목은 아직 빨간불이다
건널까? 말까?
아침의 방향으로 느슨한 바퀴를 굴리려는데
달리는 사차로를 방관하고 서 있는
빨간불
 
안쪽의 한 부분이 게임기의 두더지처럼
서로 정수리를 짓누른다
나무에 꺾인 그림자가 목격자 행세를 할 요량으로
고스란히 기억하려는 태세다
 
끝내 힐끗거리며 건넌다
맞은편은 벌건 외눈으로 노려보는데
호두과자점 주인은 틀에 박힌 일상을 틀에 구워내고
벽에 붙은 팸플릿 광고는 밤낮없이 빛난다
 
표독스런 살쾡이 손톱으로
인상이 돌변한 짐승의 검은 눈동자로
식별이 어려운 겨울 안개 속처럼
머리카락은 쭈뼛쭈뼛 그들을 향해 찌르는
 
그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졸음 쉼터는 객지다

   
달리는 차는 바람개비처럼 빳빳하게 맞선다 곡선 아니면 직선, 어젯밤에 수면제 털어 넣고도 눈이 말똥말똥 하다면 위험하다 산소는 계기판에 납작 엎드려 기어 다니고, 차 안은 잠이 붐비니 눈꺼풀이 비 맞은 빗자루처럼 축 처져 차창 밖 바람이 볼떼기를 때려 줘야 할 시간이다
 
쉼터에 멈춰 선 승용차는 활어처럼 싱싱하고 운전석 의자는 강제로 젖혀지니 남자는 짐짝처럼 얹혀 머리는 어느 쪽도 아닌 중립이다 베르베르의 잠의 6단계가 무시당하고 꿈은 흥미진진한 도입부를 개 눈 감추듯 한다 이정표는 멀뚱하게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다
 
“혹은 졸음 쉼터 자체가 자동차 묘지 같았다 찬성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잘 크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닌, 어른들의 잠을 깨우지 않는 거였다
이들은 피로에 학살당한 것처럼 쉼터는 잠으로 붐빈다”*
 
* 김애란 소설 <바깥은 여름> 중에서 

탐색전

   
이제 당신을 깐죽거려 볼게요
암호는 무시하고 비밀금고를 열어야 겠어요
입술 위에서 당신의 치부를 누설해 보아요
곪은 것은 터트려야 새살이 올라온다고 하죠
거름망이 필요 없는 놀라운 것을 원해요
 
우리 사이에 웃음꽃 피워 볼까요
 
샤워한 토막들 물기가 없어요
몸에 분칠하고 뜨거운 곳에 뛰어 들어요
노릇노릇해 지면 뒤집어 줘야 돼요
비밀이 털리니 얼굴에 반지르르 윤기가 돌죠
접시 위에 둥글게 올려놓아요
 
이제 눈 꼬리도 올라갔어요 

은행털이범

  
바람은 세단처럼 쏜살같이 달아난다
꽁무니의 배출 가스는 노지 배춧잎처럼 빳빳하다가 구석진 자리 차지한 늙은 호박같이 누렇다가
 
현장에 발견된 발자국들 막도장처럼 여기저기 찍혀 있고 구겨진 영수증들 파쇄기 옆에 널브러져 있다 은행과 마주하면 챙겨야 할 것들이 많다 검은 챙 모자와 방진 마스크, 통 큰 걸망이다 좀 썰렁한 이야기지만 어쩔 수 없다 밤새 떨궈낸 깃털이 들쑥날쑥 뒤틀린 채 자신의 보호를 위해 구린내로 위장되어 있고 머지않아 현장을 다시 찾을 범인은 멀찌감치 서성거리다 갈 것이고 그는 이제부터 묵비권을 행사 할 것이다
용의자는 둘로 좁혀진다 첫째는 인상착의도 그림자도 발자국도 형체도 가늠할 수 없고 다만 피부에 와 닿아 느껴지기만 할 뿐, 둘째는 여러 가지 색 물감을 가지고 계절별로 풍경화를 그리고는 감쪽같이
사라지는 자다. 일주일이 흘러 지금쯤이면 범인이 한 명으로 좁혀져야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잡지 못하면 증거물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세탁물은 삼십 여분의 세탁과, 적어도 다섯 번 이상 헹굼과 고농축 향기를 첨가하면 감쪽같이 오리무중 된다 

여름이 성큼 다가오자 왕립 그로메 학교의 교정에 사과꽃이 하얗게 떨어졌다. 북부 도시인 켈티카에도 더위가 오는 때였다. 네모진 뜰을 둘러싼 열주회랑列住回廊의 바닥은 무늬 없는 묵은 잿빛이었으나 이즈음만은 흰 꽃 자국들이 압화처럼 찍혀 있었다. 더 많은 꽃들이 그 위로 쓸려 다녔다. 그렇게 사과꽃이 날리고 짓이겨지다가 사라질 무렵이면 진짜 여름이 되었다.

다시 책으로 관심을 돌린 란지에가 중간쯤을 펼치더니 서너 페이지 넘기며 한 곳을 찾아냈다. 맞은편으로 돌려 밀어주자 이엔이 들여다봤다.

"음......."

언뜻 보기에는 다른 페이지나 다를 것 없이 평범해 보였다. 책은 아노마라드 여러 지방의 토속 종교들을 다룬 내용이었는데 펼친 페이지에서는 남부의 풍요신인 '양젖의 어머니'를 믿는 자들에 대해 한창 서술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줄에 식자가 잘못된 듯 거꾸로 된 '3'자가 끼어들어 있었다.

"3이군."

고개를 끄덕인 이엔이 바로 세 페이지를 넘겨 다음 글자를 찾아냈다. 이번에도 뒤집힌 글자가 있었고, 이엔은 거기서 세 줄 아래에 있는 단어를 뽑아 종이 한 장에 옮겨 적었다.

전권위임

다음 글자는 삼십 페이지 뒤에 있었다. 더이상 잘못된 식자는 없었고, '전권위임'이라는 글자가 있던 것과 같은 줄을 찾아 그 세 줄 아래에서 시작되는 문장의 모든 'ㅣ'와 'ㅇ'을 골라 숫자처럼 옮겨 적었다. 그다음 문장도 마찬가지였다.

11011

1011

다시 세 페이지를 넘겼다. 그 페이지의 같은 줄에서 마찬가지로 세 줄 내려갔다. 첫머리는 이러했다.

모퉁이에서

또다시 서른 페이지를 넘기고, 똑같이 같은 줄에서 세 줄 내려갔다. 거기에는 따옴표로 시작되는 인용문이 있었고, 이엔은 그 인용문에서 규칙에 따라 신중하게 철자 수를 세어가며 글자들을 뽑아냈다. 다 뽑아내니 꽤 긴 문장이 되었다.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됐다. "2차 제안서는 승인되었음. 단, 반드시 성립되는 것을 전제하라......."

민중의 벗은 비밀결사였지만 규모도, 조직력도 무시하지 못할 상대였다. 체첼 국왕이 괜히 눈에 불을 켜고 공화파를 검거하기 위한 직속 상비군까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비록 무너졌다 한들 공화국의 십 년 세월이 헛일만은 아니었다.

최근 켈티카와 근교에서 벌어졌던 기습적 소요가 민중의 벗의 작품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새 왕가의 측근인 이른바 '신귀족'들의 비리를 폭로한 경고장을 대문짝만하게 붙여 놓아 망신을 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들이 은밀히 찍어 유통시키는 <공화 신문>은 아무리 근절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공화 신문>을 만드는 기자들의 필치는 날카롭다 못해 짓궃고, 심지어 익살스러워서 읽으면 꽤 재미가 있었다. 체첼 국왕은 겉멋만 든 멍청이, 안리체 왕비는 탐욕스러운 여우, 대를 이을 왕자는 사고만 치는 저능아로 정형화시킨 만평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덕택에 <공화 신문>을 지녔다가 들키면 바로 위병대에 끌려가는데도 경을 칠 각오로 한 번은 펼쳐 본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도플갱어를 만난 자가 곧 죽는다고 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빼앗겨서가 아닐까. 어쩌면 모두 그를 잊어서가 아닐까.

"가나폴리에서 맨 처음 산 사람을 복제한 인형을 만들고서 그걸 도플갱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그후에 여러 가지 의미를 갖게 됐지만. 하지만 근원적 의미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인형도 너도, 만나는 순간 서로를 죽여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낄 거다. 너희는 말이야, 영원히 진짜를 다투어야 되는 존재니까. 시작을 따지자면 한쪽이 먼저 존재했겠지만, 둘이 된 이상 진짜의 의미는 없어져 버린 거다. 가짜도, 복제되는 순간 진짜를 존재하게 만든 모든 인과와 소이所以를 완벽히 복제해 갖게 되어버렸으니. 네 핏줄 속에서, 또는 더 큰 질서 속에서, 너를 존재하게 만든 인과율 속에 인형은 함께 놓여 있어. 나란히, 겹쳐진 모양을 하고서."

키가 제일 큰 조슈아가 바이올린을 높이 쳐들었기 때문에 애들처럼 뛰어오르기 싫은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췄다. 담요가 스륵 풀려 바닥에 떨어지자, 악기로서의 역사는 끝내고 장작으로나 쓰면 알맞을 것 같은 바이올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 접선 경로는 켈티카 13지구 트라메아 거리 10번지, 가구 수리공 한스 크로네의 딸 마샤입니다. 다만 한스 크로네는 회원이 아니므로 직접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접선을 원할 경우 잔포드 시에 사는 친구 안나 에프만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녀가 다음날 오후 8시에 약속 장소에 나올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접선을 거부한다면 편지를 받은 날 밤 12시에 2층에 있는 자신의 방 창문 앞에 두 개의 램프를 놓아둘 것입니다."

"편지 내용은?"

칸카가 묻자 이엔이 옆에서 말했다.

"안나와 마샤는 열아홉 살이에요. 아버지가 펼쳐볼 경우를 대비해서 그 나이에 맞는 화제들로 채우시고, 행간에 장소를 단 한 군데만 암시하시면 되죠."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테오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안나는 실제 인물입니까?"

이엔이 대꾸했다.

"아뇨."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새들이 따라붙었습니다."

'새'라는 것은 신왕국의 불만 세력, 특히 민중의 벗 회원들을 색출하는 국왕 직속의 부대 '왕국8군'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란지에는 표면적으로 왕립 그로메 학교의 평범한 학생일 뿐이지만 그쪽에 수상쩍은 핵이 있다는 것을 왕국8군에서도 슬슬 간파하고 있었다.

계단 쪽이 웅성거렸다. 2층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려오고 있었다. 그중 두 사람이 정신을 잃은 여자 하나를 부축했고, 또 다른 사람은 발악하는 어린애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기묘한 행렬은 곧 홀을 가로질러 문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잠깐 돌아보았으나 곧 잊고 자기들의 놀음에 열중했다.

그들이 나가고 닫힌 문을 바라보던 란지에가 나직이 말했다.

"도박 빚에 팔린 거다.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곳에서 평생토록 유린당하며 살게 되겠지. 아이는 소매치기로 자라고......."

2층에 올라갔을 때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그의 눈에는 슬플 정도로 자명한 상황이었다. 란지에가 어떤 어린시절을 보냈는지 대략 아는 이엔은 그 말을 낭만적 논리로 반박할 수 없었다. 밑바닥 사회의 생리에는 미사여구가 필요 없었다. 오직 근원적 욕망만이 지배하기에 끝없이 적나라한 곳이었다.

"소공작은 너나 나와 비슷한 또래지. 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라. 단 한 번의 대화조차, 인간적 예우조차 없이 나는 그의 목숨을 공깃돌처럼 다루려 한다.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고, 그렇기에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야. 남의 생명을 받으려면 내 것도 똑같이 저당잡혀야지. 저 팔려가는 아이는 누군가의 어린시절. 자란 젊은이는 분노에 사로잡혀 세상을 저주하고...... 모든 것은 되풀이된다. 당장 뛰어나가 저들을 막지 못하는 나는 존재 자체로 죄야. 왜냐하면, 나는 소공작과 같은 사람의 목숨을 받으려 하니까. 그는 천재이고, 아름답고, 자신의 청춘을 노도처럼 살아가고 있겠지. 그런 사람의 목숨값을 받고 우리가 한시라도 쉴 수 있을까? 내가 잠시라도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야, 그렇게는 못 하지. 절대로 못 해. 결코 멈출 수 없어."

이엔은 말없이 란지에를 보고 그의 결벽함을 받아들였다. 란지에는 진심으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남의 생명을 빼앗았기에, 자신의 행복도 내버린다. 목숨과 상응하는 가치란 없기에 그들이 하려는 일에는 변명도 속죄도 없다. 단지 내 손에 쥐어진 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을 뿐. 그리고 그 대가도 피하지 않을 뿐.

하지만 란지에에게도 이 순간 망각의 물은 필요했다. 인간이었기에. 그가 마신 한 모금의 포도주는 피였다. 자신을 바칠 제단에 올린 제주祭酒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이엔도 소공작에 대한 동정심을 지워버렸다.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분명 두려웠다. 또 하나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혐오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너를 죽여버리고 싶었어."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말한 일은 없었지만. '그도 나'라고 말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순된 상태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다.

"네가 나라면, 너도 아플 거야. 네가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분명히 어딘가가 아플 거야. 나처럼. 그리고 너처럼 지독한 자기애는 둘로 나눠질 수 없으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다른 누구를 사랑하려 한다면 분명히 미쳐버릴 테니까."

"난 너를 정말로 죽일지도 몰라. 하지만 널 미워해서는 아니야. 난 널 미워할 수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없어. 그렇다면 남는 것은 말이야, 사랑하는 것뿐이야."

"내가 널 사랑한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지. 네가 나이니까. 넌 가짜가 아니니까. 날 복제한 네가 가짜라면, 나도 가짜지. 너와 나 사이에 진짜와 가짜는 없어. 본질뿐이지. 너와 내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

그제야 숨을 깊이 내쉰 조슈아는 아무것도 없는 정면을 쏘아보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에게 몰입할 수 있는 그에게 눈앞에 없는 사람을 또렷이 그려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을 너,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던 내게 사랑할 상대가 되어준 너, 이제는 유리가 아닌 너. 너에게 감사한다. 그곳에서 내가 못한 몫까지 대신 해내며, 너 또한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찾고 있겠지. 너와 나는 같으니까. 데모닉이고, 거의 같은 기억을 갖고 있고, 어쩌면 토론할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뿐일 거야. 그래서 다음 순간 널 죽이게 되더라도 널 꼭 만나고 싶은 거야. 반드시 보고 싶어. 내 앞에서 나와 똑같이 움직이는 너를. 거울상처럼 걸을 너를. 이 세상에 너만큼 내 관심을 끄는 존재는 없으니."

조슈아는 일어났다. 입구 쪽으로 돌아섰다가 실제로 그곳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듯 고개를 돌리더니 어둠에 잠긴 연극 속 인물처럼 미소를 지었다. 

"악마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자신밖에 없지 않겠어?"

고작 일곱 시간이었다. 진짜 항해, 그러니까 바다 위에서의 항해 말이다. 한때 항해에 대해 그럴듯한 환상을 품고 있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젠 어느 시절 얘긴지 생각도 안 났다. 배가 바닷물에 닿은 지 일곱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누군가가 항해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정확히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항해란 뱃멀미니라.

"이제 우리 문제를 알겠지?"

"그러면 우린 지금 켈티카까지 갈 금이 필요하다는 거야? 맙소사."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금을 우리가 어디서 구하겠어."

막시민이 친구를 째려봤다.

"이제야 우리가 거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걸 네가 이해한 모양이구나. 깨달아줘서 반갑긴 한데, 그렇다고 만사를 포기하란 소린 아냐. 어떻게든 방법을......."

조슈아가 말했다.

"여기서 페리윙클에 가는 것보다 페리윙클에서 켈티카로 가는 거리가 훨씬 멀어. 우린 일단 페리윙클까지는 가야 하고, 거기에서 다시 켈티카로 간다고 치면 그동안 금이 들어가는 추이로 볼 때 적어도 400온스 이상의 금이 추가로 필요해."

"그만한 금은 재봉사로 이십 년쯤 일해도 못 모아."

옆에서 덧붙이던 리체가 말하자마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그렇지! 조슈아 폰 아르님은 거지 여행중일지 몰라도 막스 카르디라면 그 정도 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지 않을까?"

막시민이 리체를 보더니 비아냥거렸다.

"농담이겠지?"

리체는 입가를 실룩일 뿐 더 말하지 않았다. 셋은 다시 나름대로 대안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조슈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문득 든 생각인데, 그 인형 말이야......."

조슈아는 혼자 희한한 생각으로 웃기 시작했다.

"고마운 것 같기도 해."

"뭐?"

반문한 사람은 둘 모두였다.

"고맙다고. 지금 셋이서 이런 문제를 연구하고 있자니 갑자기 아,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 아니, 살아야겠다는 의지랄까. 죽음의 위협에서 도망치는 것과는 별개로, 가령 맛없는 토마토 수프 따위를 한입 먹었을 때라든지, 배가 가라앉을까 봐 잔뜩 겁먹었을 때, 다른 복잡한 문제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단 말이야. 사람이 느끼는 괴로움은 큰 문제만 주는 게 아니란 거, 알고는 있었는데 실감하긴 쉽지 않았지. 지금은 금이 필요한데, 줄 사람도 없고 생길 곳도 없지. 그런데 이 세상에 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그들 중 대부분이 리체가 말한 대로 평생토록 일해도 그런 많은 금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거잖아? 전에 막군이 말했듯 금이든 빵이든 벌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 같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겠지? 이렇게 기초적인 삶의 문제로 내려와 궁리하다 보니 어쩐지 머릿속이 시원해졌어."

막시민이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좋은데 조슈아, 그렇다고 인형이 고맙다는 말은 찬성 못 해."

"아니, 그 얘기가 핵심이야. 내가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준 건 바로 인형 아니겠어? 오래전에, 그러니까 막군 너와 함께 지내던 시절에도 난 비취반지 성에 날 대신하는 인형이 있어서 난 영영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살았으면 하고 바란 일이 있거든. 꼭...... 누가 내 소원을 몰래 엿듣고 이뤄주기로 작정한 것 같지 뭐겠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조슈아는 막시민에게 대꾸하지 않고 리체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체, 전에 내가 극장 분장실에서 했던 얘기 기억한다고 그랬지?"

"어떤 얘기?"

"막스 카르디를 없애려 하는 까닭.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돌아가야 하기에 막스 카르디를 죽인다고. 가짜의 모습으로 이 생활을 즐겼지만,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그래, 가짜."

리체는 대답 없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가짜는 이미 있었어.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만들었어. 장난삼아 이중생활을 했던 게 아냐. 놀이가 아니었어. 난 진짜로, 몇 번이나 막스 카르디로 남는다면 어떨까 생각했거든. 만일 선택권이 있었다면 내가 소공작 조슈아를 선택했을까? 하지만 그때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그런데 말이야, 지금 누군가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줬네? 나한테서 소공작 조슈아의 역할을 빼앗아 갔네? 정말 고맙잖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대신 선택해준 거겠지만......."

"그게 바로 너만이 할 수 있는 미친 생각이야."

막시민이 신랄하게 쏘아붙였지만 조슈아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누가 남자 놈이 노래 부르는 것 따위를 보러 오겠나? 우리 극장의 주력은 무희들의 쇼와 노래라고. 뱃놈들로 들끓는 항구에서 남자를 주역으로 내세우는 공연 같은 건 없어."

막시민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갑자기 장광설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오, 모르는 말씀. 남들이 다 아는 고객만 노려서는 성공할 수가 없죠. 그런 쇼를 좋아하는 선원들은 다른 극장에서도 서로 끌어가려고 난리를 치니까 한 극장에서 독점하는 것이 절대로 어렵잖습니까? 남들이 노리지 않는, 소외된 고객들 속에 진짜 성공이 있는 겁니다. 아, 물론 기본적으로 풀어놓을 주머니가 있는 고객이어야겠죠. 칼라이소가 단순한 항구가 아니란 건 다 압니다. 이 근방 소도시나 성에서도 화려하고 재미난 뭔가를 보고 싶으면 다들 칼라이소로 오지 않습니까? 선원들이 제일 많긴 해도 선원들만이 손님의 전부는 아니란 말씀이죠. 더구나 뭐든 팔 수 있는 흥행사야말로 진짜 흥행사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팔아야 할 재료가 남자 놈이면, 그걸 끝내주게 팔아먹을 생각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자, 이만하면 누구한테 팔아야 할지 알고도 남으시겠죠?"

"아니, 그게 도대체 누군데?"

이쯤 되자 내용보다는 막시민의 신기한 말재주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칼라이몬을 향해 막시민은 갑자기 두 주먹을 부르쥐며 외쳤다.

"귀족 아줌마들을 모으는 겁니다!"

정말로 공연을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조슈아의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완벽한 공연을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배우들은 얼마나 훈련이 되어 있을까? 무용수들의 춤은 괜찮을까? 의상은 제대로일까? 악사들은? 무대 배경은 간판보다 잘 그렸을까?

그때 왼쪽 대기실에서 곧 있을 낮 공연을 위해 단장을 마치고 의상을 갈아입은 무용수들이 십여 명가량 우르르 나왔다. 조슈아는 고개를 홱 돌려 그들을 쏘아봤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 무용수들의 의상이 괜찮은지 보려 했을 뿐이었다. 

무용수들도 낯선 소년 하나가 극장 문 앞에서 자기들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것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무용수들이 저들의 화려하고 노출 심한 의상에 소년이 넋을 잃었다고 판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련되기는커녕 너무 커서 부대 자루를 고쳐 만들었나 싶은 무명옷(그 옷은 막시민이 사 왔다) 차림에, 촌뜨기처럼 극장 문을 올려다보던 소년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소년을 놀릴 셈으로 키득거리며 다가왔다. 그중 맨 앞에 선 아마릴리 크라운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부채를 내밀어 조슈아의 어깨를 짚더니 말했다.

"멋있는 여행자분, 오늘 밤에 시간 있으신가요?"

조슈아는 마지막으로 여행자의 신발을 보았고,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들의 의상이 형편없다고 판단했다. 옷감도 싸구려고 바느질도 허술하고, 모조 보석뿐이고, 심지어 낡았다! 그리고 한마디하려고 고개를 쳐드는 순간 얼굴을 바싹 갖다댄 아마릴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머!"

당황한 쪽은 조슈아가 아니었다. 그 나이에 조슈아만큼 무대의상을 입은 아가씨에게 익숙할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아마릴리는 촌뜨기인 줄 알았던 소년이 상상 이상으로 잘생긴데다, 눈빛은 흡사 한바탕 야단치기 직전의 무대감독 같았으니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코끝이 닿기 직전의 상태 그대로,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모자는 너무 작고, 머리는 모조리 틀어 올리는 것이 좋겠고, 바느질이 허술해서 몸의 곡선이 살아나지 않고, 노출도 어설프군요. 치마는 좀더 짧은 게 좋겠고, 대신 은사 스타킹을 신도록 해요. 의상이 보잘것없으면 좋은 춤을 춰도 살아나지 않죠. 아니, 반대로 그런 의상으로 무대에 서려면 보통 잘 추어선 안 될 텐데? 어디 다들 실력 좀 봅시다. 전부 극장 안으로 들어가요! 지금 당장!"

기찻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리 산자락 아래 평대가 눈에 들어왔다. 한때 융성했으나 몰락하고 만 고대도시처럼 평대는 아침안개에 휩싸여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냈다. 멀리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건물들 사이로 우뚝 솟은 극장이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고래가 깊은 바닷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막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고래 모양을 본떠 지은 그 극장은 춘희의 엄마인 금복이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춘희의 머릿속엔 요란한 극장 간판과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그 앞에서 북적거리던 사람들, 군것질거리를 파는 행상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흥성한 풍경은 오래전 극장에 불이 났을 때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극장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거대한 화염이 무서운 기세로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도시에 있는 소방차란 소방차는 모두 동원이 됐지만 한껏 기세를 올리고 있는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멀찌감치 물러서서 온전히 여자 혼자의 힘으로 이룩한 거대한 영화가 불길 속에 스러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콩닥거리던 가슴이 어느 정도 잦아들 무렵 그녀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살던 집보다 족히 서너 배는 됨직한 거대한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올라 등에서 힘차게 물을 뿜어올렸다. 주변에 있던 어부들도 물고기를 보고 놀라 탄성을 질렀다. 금복은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생명체의 출현에 압도되어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물고기는 거대한 꼬리로 철썩 바닷물을 한번 내리치고는 곧 물속으로 사라졌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고기가 사라진 뒤에도 금복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넋을 잃고 있던 금복이 옆에서 구경하던 한 어부에게 그 거대한 물고기의 이름을 묻자, 그는 이상하다는 듯 금복을 쳐다보며 말했다.

ㅡ넌 고래가 뭔지도 모르는 걸 보니까 이곳에 사는 계집이 아닌가보구나. 아까 그건 고래 중에서도 제일 큰 대왕고래란다.

금복은 바위 위에 주저앉아 다시 그 큰 물고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물고기는 나타나지 않고, 바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끝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그녀는 언젠가 다시 고향에 돌아간다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물고기와 마을의 저수지보다 수십 배 더 넓고 거대한 바다에 대해 얘기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소망을 이루기란 어려운 법. 그녀의 인생에서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았다.

이때 금복은 이미 원재료를 사서 약간의 손질을 거친 후 더 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만들어 되파는 가공업의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린 건어물이 시장에서 절대적인 경쟁력을 갖게 되자 금복은 출하시기를 적당히 조절해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예컨대, 차례에 쓸 북어를 명절 전까지 창고에 쌓아두고 있다가 가격이 한껏 올랐을 때 일제히 출하하는 식이었다. 다른 덕장을 운영하는 경쟁자들도 금복의 방법을 따라 하려 했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생선을 사들일 때부터 금복은 방법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선주들을 찾아가 출어를 하기 전에 미리 돈을 줘서 물 좋은 생선들을 싼 가격에 확보했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선물거래였던 셈이었다. 어린 금복에게 그런 놀라운 수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생선장수 한 사람뿐이었다. 그 덕에 그는 머지않아 생전 본 적도 없는 큰 돈을 만지게 되었다.

어느 날, 금복이 여느때처럼 시장에 나가 물고기의 배를 따고 있을 때였다. 시장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한꺼번에 부두로 몰려가고 있었다. 금복도 호기심에 따라가보니 구경꾼들로 잔뜩 둘러싸인 부두 한가운데에서 뭔가 작업이 진행중이었다. 구경꾼을 헤치고 안을 들여다보던 금복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안에선 사내들이 칼을 들고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 물고기는 언젠가 그녀가 바닷가에서 보았던 바로 그 대왕고래였다. 사내들이 작두만한 칼로 거침없이 고래의 배를 썩썩 가르자 피와 내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구경꾼들은 이리저리 몸을 피해야 했다. 뒤이어 볏가마니보다 더 큰 밥통 안에서 닻과 돛, 낡은 그물과 뒤엉킨 낚싯줄 같은 어구들과 배에서 떨어져나온 것이 분명한 나뭇조각, 여러 종류의 해초들과 작은 물고기들이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은 물건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탄성을 질러댔지만 금복은 왠지 자신의 살을 베어내는 것처럼 마음이 쓰라렸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생명체가 그렇게 덧없이 고깃덩어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내장을 다 드러낸 채 해체되어가는 고래의 처지가 마치 걱정과 자신의 처지처럼 여겨져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올랐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삼키느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구경꾼들 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주저앉아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칼자국의 말대로 세상에는 수천수만 가지의 영화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금복이 가장 좋아한 것은 카우보이가 등장하는 서부영화였다. 도저히 이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드넓은 사막과 그 위를 사납게 질주하는 역마차, 주먹만한 크기의 총에서 뿜어져나오는 단호한 결말, 그리고 말처럼 거친 사내들과 그들을 부드러운 식빵처럼 다룰 줄 아는 금발의 여자들......

금복은 특히 보안관으로 자주 등장하는 남자를 좋아했는데 커다란 덩치에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와 두툼한 손을 가진 그는 특히나 말을 탄 뒷모습이 그럴싸해 보였다.

존 웨인.

그것이 칼자국이 가르쳐준 그 보안관의 이름이었다.

도시 어느 구석이든 돈이 오가는 자리엔 반드시 칼자국의 몫이 따로 있었다. 예컨대, 한 소매치기가 어리둥절한 촌놈의 봇짐을 털었다면 그 가운데 일부는 칼자국의 몫이었다. 어느 창녀가 외로운 홀아비에게 화대를 받았다? 역시 그 가운데 일부도 칼자국의 몫이었다. 술장수가 술을 팔아도 밤장사가 밤을 팔아도 심지어는 물장수가 물을 팔아도 칼자국의 몫은 따로 떼어놓아야 했고, 어디선가 시비가 일어 누군가에게 배상이 이루어져도 그 가운데 일부는 반드시 칼자국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세금이라고 불렀다.

왜 칼자국에게 세금을 내냐고? 그건 그냥 그랬다. 처음부터,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몇 해 전, 외지에서 떠들어와 술집을 차린 한 사내가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왜?

대답은 그날 밤 즉각 이루어졌다. 술집 주인의 허리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깊은 바닷속에 던져넣는 것으로. 그것은 칼자국의 법칙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몇 년 뒤, 부둣가 도시에서 처음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한 전도사에 의해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칼자국의 것은 칼자국에게.

금복이 세상을 떠돈 지 이태가 되던 해 여름, 나라엔 큰 전쟁이 있었다.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 싸우게 된 그 전쟁은 이후 삼 년이나 지속되었다. 당시만 해도 산 것이나 죽은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으며 죽음은 너무나 흔해서 귀하게 취급받지 못했다. 남쪽 사람들과 북쪽 사람들은 미칠 듯한 증오에 휩싸여 서로 수백, 수천 명씩 한꺼번에 학살했다. 그들은 상대를 한군데 몰아넣고 죽창으로 찌르거나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했다. 건물에 가둬놓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자들 가운데는 여자와 어린아이도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감춘 채 아무나 붙잡고 상대방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둘 중의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언제나 반반이었다. 그것은 이념의 법칙이었다.

금복이 북쪽을 향해 이동하는 동안 사람들은 거꾸로 남쪽을 향해 피난을 내려오고 있었다. 시체는 길거리에 방치된 채 썩어가고 사람들은 그 옆에서 밥을 해먹었다. 사람들은 단지 살아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들에 비하면 칼자국이나 걱정의 죽음은 비교적 이유가 있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꿈속에 나타나 금복을 괴롭혔다.

이후 금복은 삼 년간이나 전쟁통을 떠돌며 기적처럼 목숨을 이어가지만, 당시에 있었던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훗날 다른 자리를 기약하기로 하자. 독자여, 부디 이해해주시길! 그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며 더 많은 지면과 오랜 시간, 그리고 고통을 감당할 용기와 눈물이 필요한 일이므로.

다방은 날로 번창했다. 사람들은 으레 다방에서 약속을 했고 다방에서 맞선을 봤으며 다방에서 바람을 맞았다. 평대다방은 그들의 고단한 삶의 휴식처였으며 은밀한 거래가 오가는 접선장소이자 하릴없는 건달들의 아지트였다. 다방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평대 사람들에게 많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마약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으며 오랫동안 그들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그들이 평생 맛보지 못한 우아한 정취와 로맨틱한 감정, '바람을 맞다'는 새로운 표현, 미스 김, 혹은 미스 박, 또는 유 마담, 펄 시스터즈가 부른 <커피 한잔>의 전국적 히트, 껌, 축구경기, 아메리칸 스타일, 혹은 블랙이란 이름의 만용과 쓰디쓴 후회, 죽돌이 또는 죽순이란 신조어, 쌍화차, 미팅, 담배 소비의 증가, 성냥을 쌓거나 부러뜨리는 나쁜 습관, 퀴즈의 발달, 참새 시리즈, 구석자리에서의 키스, 벽돌 깨기, 킹 크림슨의 <Epitaph>와 신청곡을 적을 수 있는 작은 메모지, 디제이라는 새로운 직업의 등장, 오늘은 왠쥐, 라는 느끼한 발음, 배달과 티켓, 그리고 '여기 리필 좀 더 주세요'라는 잘못된 영어의 남용 등등......

평대벽돌은 건축업계에 일대 돌풍을 일으켰다. 건축업자들은 평대벽와의 인장이 찍힌 벽돌을 얻기 위해 공장 입구에 줄을 섰고 벽돌은 가마에서 구워져나오는 즉시 기차에 실려 도회지로 팔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文은 가마를 두 기 더 건설해야 했고 일꾼들은 갑절로 늘어났다. 이번엔 일할 사람이 모자라 가려뽑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었다. 금복도 밤낮없이 밥을 해대느라 일하는 여자를 몇 명 더 고용해야 했다. 그들은 금복처럼 치마 대신 몸뻬바지를 해입고 일을 했는데 그것은 곧 유행처럼 마을로 퍼져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동리의 여자들까지 모두 몸뻬바지를 입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진흙을 이겨대는 벽돌공들의 노동요와 벽돌을 실어나르기 위해 줄을 선 트럭의 거친 엔진 소리, 그리고 서로 먼저 벽돌을 받아가겠다는 업자들의 악다구니로 남발안이 가으내 시끄러웠다.

그런데, 그날 금복은 엉뚱하게도 사람의 몸을 투과하는 엑스레이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엑스레이의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람의 몸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엑스레이로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文이 기분 나쁘게 뼈다귀만 나오는 사진을 찍어서 뭐에 쓸 거냐며 퉁을 주었지만 금복의 맹렬한 호기심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기어코 몸뻬까지 모두 벗고 커다란 기계 앞에 서고 말았다. 그녀는 마치 진기한 보물지도를 들여다보듯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풍만한 엉덩이, 뜨거운 눈빛과 발그레한 뺨은 모두 사라지고 죽은 나무 삭정이 같은 앙상한 뼈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금복은 사진을 가져와 전등불에 비춰보며 홀린 듯 며칠 동안 관찰하다,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ㅡ그러니까 다 껍데기뿐이란 말이군. 육신이란 게 결국은 이렇게 하얗게 뼈만 남는 거야.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그리고 곧 내키는 대로 아무 사내하고나 살을 섞는 자유분방한 바람기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평생을 죽음과 벗하며 살아온 그녀가 곧 스러질 육신의 한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덧없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벽돌공장으로 한 젊은 목사가 금복을 찾아왔다. 그는 하느님의 복음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오지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자청해서 평대에까지 들어와 전도를 하는 중이었다.

그가 찾아온 것은 금복에게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벽돌을 기부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ㅡ도대체 누굴 위해서 기부를 하라는 거죠?

파이프에 담배를 끼워문 금복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목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언제부턴가 금복은 늘 파이프를 입에 물고 살았는데, 그녀가 담배를 배운 건 업자들을 만나느라 대처에 나다닐 때부터였다.

ㅡ세상의 시작과 끝, 세상만물의 생멸과 이루어짐의 주관자, 우리들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죠.

목사가 대답했다.

ㅡ그렇다면 나도 그게 누군지 대충 알 것 같군요. 언젠가 나도 그 귀신한테 기도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자는 내 기도를 비웃더군요.

금복이 말한 이때의 기도라 함은 아마도 오래전 걱정이 다쳤을 때의 일을 가리킨 듯싶다.

ㅡ기도가 부족했겠지요.

목사가 대답했다.

ㅡ그래요? 그것도 부족했다면 그자는 욕심이 꽤나 많은가보군요. 그런데, 성전을 지어서 뭘 하겠다는 거죠?

ㅡ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죠.

ㅡ아무데고 십자가만 걸어놓으면 되지 예배를 드리는 데 따로 공간이 필요한가요? 당신네들이 믿는 그 귀신은 아마도 예배당 안에만 숨어 있는 모양이군요.

ㅡ하느님은 이 벽돌공장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저희 하느님에게 헌금을 하시면 그 몇 배로 갚아주실 겁니다.

ㅡ나는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더 많은 돈은 필요 없어요.

ㅡ지상에 쌓아놓는 재물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누각처럼 곧 사라질 것입니다.

ㅡ그럼, 어디에다 쌓아둬야 안전한가요?

ㅡ바로 하느님이 계신 곳, 그리고 당신이 이다음에 죽어서 갈 하늘나라에 쌓아두어야죠.

ㅡ이 무거운 벽돌을 그렇게 높은 데다 쌓아두려면 힘깨나 들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솜사탕 장사나 할걸 그랬군요. 그건 그렇고 결혼은 했나요?

금복이 눈웃음을 흘리며 그의 얼굴에 담배연기를 살짝 내뿜었다. 그러자 총각이었던 순진한 목사는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ㅡ당신네 하느님은 참 매정한 분이군요. 이렇게 잘생긴 총각을 아직 짝도 안 지어주시는 걸 보니.

금복은 총각의 발개진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다 그의 사타구니에 슬며시 손을 얹으며 말했다.

ㅡ좋아요. 우선 당신이 믿는다는 그 하느님의 능력이 어떤지 나에게 보여주세요. 벽돌 얘기는 그다음에 하기로 하죠.

이후. 젊은 목사는 수시로 벽돌공장을 드나들었고 그가 다녀갈 때마다 마을로 벽돌이 한 트럭씩 실려나갔다. 목사는 금복과 정사를 나눌 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하느님에게 기도를 했다.

ㅡ주여,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무조건 당신 뜻대로만 하소서, 뭐가 됐든.

금복의 바람기는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목사와의 관계로 시작되었고, 그 이듬해 목사는 소원대로 평대 한복판에 번듯한 예배당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헌금의 법칙이었다.

이날, 금복은 포주와 마주앉아 달아난 창부의 몸값을 흥정했는데, 그 기준이 인명 피해에 대한 배상액을 산정하는 데에 기준이 되는 호프만식 계산법에 의거하다보니 계산이 매우 복잡했다. 그것은 달아난 창녀가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금액을 한꺼번에 지급하되 중간 이식利息을 공제하는 방식이어서, 창녀가 과연 몇 살이 될 때까지 손님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정년에 대한 쟁점에서부터 창녀의 생활비를 제하되 그네들이 자주 사먹는 떡볶이 값이나 생리대 값 같은 사소한 비용까지를 생활비에 포함할 것인지의 여부, 결국 군것질 값은 제외하고 생리대 값은 포함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지만, 또한 그네들을 정규직으로 볼 것이냐 하는 논란과 이에 따라 한 달 근무일 수를 며칠로 계산할 것이냐에 대한 공방, 또한 공정이율을 어떤 기준에 따라 적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토론하느라 금복과 포주는 거의 한나절이나 실랑이를 계속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금복은 거의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달아난 창녀에 대한 포기각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쌍둥이 언니는 한동안 달아난 창녀의 원래 이름인 수련 대신에 '비싼 년'이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했다.

그날 이후, 소녀를 지배한 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인생의 절대 목표는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였다. 그녀가 좁은 산골마을을 떠난 것도, 부둣가 도시를 떠나 낙엽처럼 전국을 유랑했던 것도, 그리고 마침내 고래를 닮은 거대한 극장을 지은 것도, 모두가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에 그들이 본 영화는 대부분 미국이란 나라에서 건너온 것이었는데 관객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인생이 너무나 멋져 보여 언제부턴가 그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는가 하면 아예 그들이 사는 나라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람들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명제만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강렬하고 매혹적이어서 모든 것을 건너뛰는 동시에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한편, 모든 것에 우선하고 모든 것을 포섭해서 기어이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의 모든 삶의 양식을 결정짓게 만든 그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미국적인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쌍둥이자매가 간직하고 있던 비밀은 그뿐이 아니었다. 쌍둥이언니가 혼자 나누는 대화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전기 기술자를 따라갔다 죽은 사람은 동생이 아니라 바로 언니라는 사실이었다. 즉, 동생은 허리를 다쳐 평생 여자 구실을 못하고 살았던 언니를 위해 젊은 남자를 양보했던 거였다. 결국 전기 기술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아닌 엉뚱한 사람과 결혼을 했던 셈인데, 얼마 뒤엔 그런 사실마저 다시 뒤바뀌고 말았다. 왜냐하면 오래전 허리를 다친 사람은 언니가 아니라 동생이었으며, 목재상의 첩으로 들어간 사람은 동생이 아니라 언니였지만 막상 그와 잠자리를 함께한 사람은 다시 언니가 아니라 동생인 식으로, 어릴 때부터 그네들은 그때그때의 편의에 따라 역할을 달리했고 그러다보니 정작 본인들조차도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를 잊어버려 결국 전기 기술자를 따라갔다가 죽은 사람이 언니인지, 아니면 남은 사람이 언니인지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어느 날 생선장수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나타나자, 금복은 비로소 그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낡은 사륜차를 본성은 삼륜차, 타고 도망치듯 평대를 떠났던 그는 이웃마을로 넘어가는 경계를 끝내 넘지 못했다.고개를 내려가던 중 브레이크가 파열되고 만 것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여전히 비린내를 풍겼다. 그는 생선장수를 향해 말했다.

ㅡ당신은 죽어서도 냄새가 나는군요.

ㅡ그러게 말이야. 이놈의 비린내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이건 아마도 내 본성인가봐.

생선장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생선장수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한 손으로 막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휘영청 보름달이 떠 있던 그날 밤, 생선장수의 용달차를 얻어타고 고향을 떠나던 그 순간부터 시작된 건지도 몰랐다. 그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간들이 한없이 그리웠다.

금복은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취한 눈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서도 영사기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 스크린에선 계속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평생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던 금복은 마침내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자들의 모습이 스크린 위에 겹쳐져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본능처럼 문득 자신의 딸, 춘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춘희가 아직도 공장에서 벽돌을 만들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한 번도 제대로 보듬어주지 않았던 딸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회한이 몰려왔다. 하지만 곧 모든 게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침내 스크린에까지 불길이 옮겨붙었다. 한때 보잘것없던 산골의 한 소녀였던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 거대한 영화가 눈앞에서 모두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이 점점 따뜻해졌다. 그의 눈앞엔 오래전 그가 고향의 언덕에서 맞이하던 적막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낙조 속에서 마을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언덕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으며 세상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날씨를 보아하니 켈티카에서부터 걸치고 온 낡아빠진 코트는 곧 용도를 다할 성싶었다. 분수대 속에서는 초여름 태양이 소원을 비는 금화처럼 빛나고, 푸르고 흰 조각들은 하늘을 흉내내며 흘렀다.

이윽고 막시민은 안경을 물에 첨벙 담갔다가 코트 자락을 활용해 닦는 것으로 올 계절 코트의 마지막 임무를 마무리했다. 벗은 코트는 둘둘 말아 배낭끈에 달아맸지만 어디든 헐값에 팔 수 있다면 좋겠다는 희망을 뇌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물을 마실 사람은 아랑곳 않고 분수대에서 세수까지 해버린 막시민은 덕택에 나름대로 멀끔한 얼굴이 되어서 조슈아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첫 번째 장소를 쑤셔보러 떠났다. 한 손에는 아궁이 쑤시는 막대기 대신 낡아빠진 바이올린 한 개를 쥐고서.

"어서 아궁이 재 속에서 나와라, 이 빌어먹을 회색 고양이야."

그렇게 해서 불지르고 혼자 달아나려 한 남자, 무대 밑에 누가 깔려 있든 친구만 구해 나가려 한 소년, 쓰러진 사람이 시체든 아니든 자기 나갈 길만 생각한 소녀, 그리고 모두가 자길 구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는 순식간에 '자기밖에 모르는 4인조'를 결성하여 쪽문을 통해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그들 중 불길로 가로막힌 맞은편 입구를 자기가 나서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대한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만 더 설명 없이 저런 데로 데려가면 그땐 끝장이야."

다른 생각에 잠긴 듯한 막시민의 대답은 이랬다.

"끝장이라니, 우리가 언제 뭘 시작했냐?"

이러니 발을 한번 밟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끝장나게 때려주겠단 말이야!"

"........"

꽤 아프게 밟았는데도 별반 반응이 없어서 리체는 가다 말고 물어보았다.

"안 아파?"

"아니, 아파."

"그런데 왜 안 아픈 척해?"

"술 사줬으니 술기운에 참는 거지."

"참다니, 아픈 걸?"

"아니, 널."

"말끝마다 미녀 조수라고 해야만 되는 거냐?"

"사람들한테 '소년 탐정과 미녀 조수라고 불러주세요'라고 하지만 않으면 되지, 왜 따지고 그러니?"

막시민은 대꾸 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군."

"뭐가 어쩔 수 없어?"

그러자 막시민이 리체를 돌아보더니 '의지 굳은', '심각한', '사명감을 불어넣는' 눈빛으로 말했다.

"의뢰인의 안전을 위해 우리의 안전을 희생하자."

"뭐야! 의뢰 따위 받은 일 없잖아!"

"이 경우엔 '미녀 조수'가 채용되기 전에 받은 거겠지."

"만일 내가 찬성하지 않으면?"

"그러면 나 혼자 가겠지.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 '미녀 조수'는 탐정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결국 뒤따라온다고 되어 있던데."

"내가 읽은 책에는 그런 얘기 없었어!"

그러나 막시민은 이미 성큼성큼 정문 앞으로 가는 중이었다. 병사 한 사람과 마주치자 품속에서 꺼낸 편지를 내보였다. 예의 아르님 가문 문장이 찍힌 편지였지만 용도는 좀 바뀌었다.

"급전입니다. 켈티카에 계신 아르님 공작부인께서 이 댁에 계신 분께 편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섬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막시민이 소화한 일정의 특성상 그의 몰골은 방금 먼지를 쓰고 도착한 심부름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사실이 일말의 신빙성을 더하여 막시민, 그리고 결국 뒤쫓아오고 만 '미녀 조수'는 정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비극적 낭만주의자, 연산은 끝났어?"

사실 배를 타는 것은 막시민도 처음이었다. 배가 너무 작아서 별일 없을까 조금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저 비현실적인 천재가 걱정스러웠다. 

막시민은 선 채로 앉아 있는 조슈아를 내려다봤다. 잠시 후 몸을 돌렸지만 결국 하고 싶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네가 만일 뻔히 보이는 백 개의 멀쩡한 길을 무시하고 딱 하나뿐인 늪길로 들어가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넌...... 엔젤릭이다."

조슈아가 움찔하며 올려다봤다.

"엔젤릭...... 이라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이 들려왔다.

"너희 집에선 데모닉이 천재라는 뜻이라며, 그럼 엔젤릭은 돌대가리란 뜻일게 뻔하지."

막시민이 한 말치고는 꽤 우아하게 돌려 말한 셈이었다.

램프의 불빛이 흔들렸다. 기름이 다한 모양이었다. 얼마간 흔들리다가 사그라지자 회랑 전체에 어둠이 깔렸다.

테오는 약간 발돋움을 했다. 그림 속 아내에게 짧은 입맞춤을 하기 위해서였다. 둘 다 싸늘한 입술이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줄게. 걱정 마. 난 아주 근사한 칼을 쥐었거든."

그런 다음 한 발짝 물러나 아내를 올려다봤다. 미간을 찡그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강한 시선으로 억눌렀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아니야. 내가 그러지 않았어.

아르님 성을 가진 자들은 널 사랑하지 않았어. 네 사랑을 받은 주제에, 너의 찬란한 사랑을 받은 주제에 제 고통밖에 돌아볼 줄 몰랐지. 최후까지도 네 대신 살아남다니. 정말이지, 너무 기울어 저울의 팔이 부러질 지경 아니야?

그런 건 바로잡아야지. 아주 묵직한, 납덩이 같은 악몽을 얹어주어야지.

돌아선 테오는 회랑의 어둠 속으로 두 발짝 걷다가 몸을 돌렸다. 손끝을 눈썹에 대고, 그만이 부르는 이름으로 인사했다.

"잘 있어, 데모닉 이브노아."

주연이 가장 화려하게 치장하는 북부 가면극과 달리, 남부에서 주연배우는 화려한 가면을 쓰지 않지. 모두들 공작 깃털이니 비단 터번이니, 화려한 안료와 색실과 황금빛 술로 장식한 가면을 쓰고 있을 때, 무늬 없이 단순한 흰 가면을 쓴 자가 주연이야. 그러면 주연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있어선 주목을 받을 수 없지. 그는 춤추고, 노래하고, 달려야 돼. 누구도 그가 주연이라는 것을 잊지 못하도록 가진 재능을 다해 불타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로써 오늘 당신의 시도는 조화의 우미를 잃게 됐군요. 이건 후렴구가 길어지다 못해 압운이 흐트러진 시와 마찬가지죠. 다시 말해 피날레가 없는 악극이랄까요.내가 당신이라면 여기저기 기운 누더기에 만족하느니 새 무대를 마련해 다시 시도할 겁니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 같은 말을 들으며 막시민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뜻밖의 결과가 벌어졌다. 남자가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당신은 이 시점에서 내가 놓친 압운이 뭐라고 생각하지?"

조슈아는 손을 들어 자기 목을 천천히 매만지며 대답했다.

"당신의 특별한 오른손으로 내 목을 부러뜨려 죽였어야 했죠.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지루한 왼손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선 납득할 수 없을 대화였으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다음엔?"

조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손을 들어 식당 창밖의 처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쯤 매달면 어떨까요."

막시민은 '무엇을?'이라고 물으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몰라서 물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정신 나간 대화를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나쁘지 않아. 아니, 좋군. 당신은 과연 예술가다워."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아쉬운 듯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느껴져서 막시민은 다시 한번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입술을 조금 떨었다.

"당신이 말한 압운은 강하고 멋이 있군. 그런데 끝 소절 변형은 없는 건가? 정통 루그란식은 아니지만, 훨씬 역동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좋아하는데."

조슈아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쯤에서 변조도 나쁠 것 없죠. 대단원을 밀어 올리는 느낌을 주려면 이 방에 불을 지르거나, 당신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어떨지. 아니면 밖의 풀밭을 피로 적셔서 까마귀들을 부르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피가 좀 많이 필요하겠지만."

농담의 선은 이미 넘었다. 일부러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며 즐기는 사람들은 종종 있다. 그러나 명백한 살의를 가진 자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방법, 그리고 죽인 뒤의 연출에 대해 논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넌 내 상태가 어떤지 몰라."

드디어 조슈아의 얼굴에도 분개한 표정이 서렸다.

"데모닉이란 게 어느 정도로 끔찍한 상태인지 다른 사람이 이해한다고? 누워 잠을 청하는 동안 낮 동안 했던 모든 대화가 저절로 재생되는 기분을 알아? 펜을 들고 낙서하다 보면 어느새 예전에 본 것 중 가장 복잡한 아라베스크를 똑같이 그리고 있는 상태가 이해돼? 숫자 몇 개를 떠올렸는데 무심코 그걸 곱하고 더해서 수십 자리의 괴물 같은 숫자를 만들고도 멈춰지지 않아 머리를 벽에 부딪쳐가며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애쓰는 부분을 아느냐고!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비취반지 성의 계단 난간에 새겨진 무늬를 전부 기억할 수 있어. 그와 마찬가지로, 내게 일어났던 수만 가지의 일들이 항상 엊그제 겪은 듯 머릿속을 어지럽히지. 고통도, 절망도, 부끄러움도 모조리 방금 당한 것처럼 또렷하게. 너라면 어떨 것 같아? 이런 상태로 말끔한 제정신일 수가 있겠는지 말해보란 말이야!"

그 말에 입을 연 사람은 막시민이 아닌 리체였다. 그것도 몹시 당황한 말투였다.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그게 전부 사실이야? 천재란...... 본래 그런 건가?"

(...) 생각을 뚫고 조슈아의 조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소는 리체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너도 이런 내가 끔찍한가 보지?"

"이것 봐, 조슈아."

리체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막시민이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응석 부리는 건 그만둬라. 흉터 자랑하는 어린애 같은 꼴이야. 너에게 데모닉으로서의 고통이 있다 치자. 그러면 난 아무 어려움 없이 편안한 인생을 산 것 같으냐?"

막시민의 목소리도 미세한 열에 들뜬 듯했다.

"어머니는 기억조차 희미하고, 아버지는 집을 떠난 뒤 동전 한푼 갖다준 일이 없지. 동생은 여섯 명에, 동냥젖이 필요한 어린 아기도 키워봤어. 내가 우리집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한 나이는 여덟 살이다. 난 그나마 여덟 살이기라도 했지만 너무 어렸던 내 동생들은 그후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여덟 살짜리가 돌보는데 오죽하겠냐? 바람처럼 돌아다니는 네 작은 할아버지가 도와준 시기는 그런 내 인생 가운데 특집편 같은 거였어.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을 것 같아? 난 코츠볼트에서 자라는 모든 잡초와 나무껍질의 맛을 알고 있어."

조슈아가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막시민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 데모닉. 고통스럽겠지. 네게도 힘든 일은 많았지. 하지만 넌 저 여행 식량이 입에 맞지 않아 먹기 힘들 정도의 생활을 유지해왔어. 네겐 당연한 것이겠지만, 당연하지 않은 사람에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혜택이란 말이다. 또, 만일 노래를 잘하고 싶어서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실패한 사람이 있다면 네 재능은 혼을 팔아서라도 갖고 싶은 것일 거다. 이래도 네가 저주받은 것 같냐? 미쳐도 용서될 정도로 운이 없는 것 같아?"

"그만."

조슈아가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막시민은 홱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바라봤다.

잠시 후 리체가 말했다.

"난...... 오늘은 이걸로 충분한 것 같다. 내가 너희를 이해하려면 알아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는 것만은 알겟어. 지금의 난 단지 신기한 이야기책을 읽은 것처럼 당혹스러울 뿐이야. 그건 너희의 이야기가 내 문제로 느껴지지 않아서겠지.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마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으로는 모르겠다는 것만은 말해둘게. 난 너희를 이해하지 못했어. 이 말은 우리가 아직 친구가 아니란 뜻일 거야."

리체는 그들 사이로 걸어가 모닥불을 완전히 밟아 껐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선 채로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리체의 시선이 막시민을 향했기에 막시민도 고개를 들었다.

"어제 그 남자와 식당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대강 알 것 같아. 그래, 난 그런 얘기가 미친 짓이라는 데도 동의해. 그런데 말이야, 그때 조슈아가 너나 나에 대해서도 얘기했니?"

(...) 막시민의 얼굴에 표정이 떠오르기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여러 명을 죽이면 된다'고 말하는 그 남자에게 '학살자가 되지 말라'고 말하던 조슈아를 기억해냈을 때, 그제야 맺힌 매듭 하나가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아니었어."

"나라면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래, 미친 짓은 맞지만, 솔직하게 생각해봐. 그런 상태로는 미칠 수밖에 없다는 말도 일리가 없진 않잖아? 난 그 데모닉......이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조금 전 얘기는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어. 넌 친구라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조슈아의 얘기가 납득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해선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그들은 말없이 새벽이 밝는 것을 지켜봤다. 푹 잔 덕택에 몸은 어느 정도 회복세였다. 드디어 목적지도 멀지 않았다. 꺼진 모닥불에서 엷은 연기가 올랐다. 오해인지 이해인지 모를 이야기가 한바탕 오가고, 남은 것이 재일지 불씨일지는 아직 몰랐다.

리체가 말했다.

"난 몽플레이네 씨나 깨우러 가야겠다."

조슈아는 세자르가 있는 쪽으로 가는 리체의 뒷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곳에도, 자기한테 없는 것이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넌...... 너무나 명쾌하군."

조슈아의 눈은 우울하다 못해 비현실적인 빛을 띄었다.

"데모닉이 왜 데모닉인 줄 알아? 난, 데모닉이라는 별명을 제일 먼저 붙인 사람이 데모닉 이카본 본인이 아닐까 생각해. 너무나 진실에 가까운 이름이니까. 타인이 대신 꿰뚫어 볼 수 없는 본질이 거기 있어. 악마가 줬다는 능력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 관용도 너그러움도 없는 것."

마지막 목소리는 평소 알던 조슈아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서늘했다. 막시민은 대답 없이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사슴처럼 빨리 달린다면, 다른 사람이 모두 느릿느릿 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죽도록 답답해도,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니 별수없이 발뒤꿈치에 덫을 단 것처럼 걸음을 맞춰야 해. 그러다가 종종 미칠 지경에 몰리는 게 이상한 일일까? 어떨 때는 최소한의 기능만 가진 나무 인형들로 둘러싸여 사는 것처럼 느껴져. 아, 죄받을 악한 생각....... 하지만 이 모든 걸 참는 것이 정말, 이렇게 태어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일까? 의심스러워. 모든 것이 느린 이곳에서, 미쳐버리면 차라리 편안해질 것 같아. 내 죄를 대신 짊어진 것 같은 누나, 결국 삶을 그렇게 마친 누나, 그래서 난 누나를 생각하는 게 싫어. 나의 원죄를 땅에, 무덤 속에 파묻어버린 것처럼. 난 나보다 느린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없어. 너그러워질수도 없어. 그냥 참을 뿐이야. 내가 누나를 사랑했을까?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그곳에서는 진짜로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졌다. 주문을 시전하기도 전에 '그것'은 완성되어버렸다. 단지 도착하는 것만으로. 그리고 금지된 물건을 갖고 있던 아넬리는 사라졌다. 흔적 하나 없이, 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 간신히 도망쳐 나왔을 때,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만든, 이 세상 어떤 마법사도 성공시킨 적이 없는 굉장하고 끔찍한 피조물이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막 태어난 밤하늘 같은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떠오르던 순간을 그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몰라서. 고대의 마법사들이여, 그대들의 불꽃을 훔쳐 무한히 뛰어난 존재를 만든 저는 백지장처럼 어리석어 이 아이에게 줄 어떤 대답도 갖지 못했나이다.

"오늘 밤에 배를 띄우자고? 차라리 아까 나온 수프에 코를 박고 죽으라고 하지. 그러면 적어도 코만 적신 채로 죽을 수가 있잖아?"

근방에서 다섯 대째 뱃일을 해왔다는 사내를 찾아낶지만, 역시 단칼에 거절당했다. 벌써 네 명째였다. 그리고 그자의 말은 옳았다. 따뜻하다 못해 더운 주점에서, 노릇한 넙치구이를 곁들인 밀맥주가 근사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데 손님들이 하나같이 제정신인 이유가 뭘까? 배경음악 때문이다. 싸구려 악단처럼 엉덩이를 차서 쫓아버릴 수도 없는, 사나운 장대비 소리.

"이래서 데모닉이 아닌 놈들하고 얘기할 때 골치가 아파.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 절대로 모르거든. 언젠가 한 명쯤은 만날 줄 알았는데 한 명도 없었고, 다 늙고 나니 갓난아이 하나가 나타났군. 좋다, 프란츠. 아이의 이름은 뭐냐?"

"조슈아입니다."

"조슈아."

히스파니에는 입속으로 이름을 한번 굴려보더니 희미하게 입가를 실룩였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남부의 전통을 따른 이름이었다. 가문이 북부로 오기 전, 근원의 바다가 있는 곳. 아르님 가문은 오랫동안 자손에게 그런 이름을 주지 못했다. 프란츠가 무슨 생각을 하며 아이의 이름을 지었을지 알 듯했다.

"야! 이게 누구 탓인지 모르진 않겠지? 조슈아 너, 내 것도 지어 와라? 응? 듣고 있냐?"

조슈아가 대답하지 않자 다른 학생이 소리쳤다.

"야, 누구 약강 5보격 루그란 송시 하나 지어봐라. 제목은 '재수없는 아르님'."

그러자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 읊기 시작했다.

"외우라면, 외우지, 무슨 놈의, 잔말이, 많을까? 알면서, 모르는, 척하면, 기분이, 좋을까? 시 짓기는, 좋아도, 외우기는, 싫다, 이건가? 거참, 까다로워, 비위도, 맞추기, 어렵네."

약강 5보격에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였지만 친구들을 웃기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어떻게 놀려대든 아홉 살 꼬마가 눈이라도 빨개지기는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점만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쨌든 한바탕 웃고 신이 난 학생들은 릭과 어깨동무를 한 채 낄낄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다음 시간은 음악이지? 오늘 그룬트 선생은 누구한테 노래를 시킨 다음에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낼까요?"

"글쎄다? 난 저언혀 모르겠네?"

"그럼 박자를 셀 때 누구한테 대신 피아노를 치라고 할까요?"

"이야, 그거 엄청 어려운 문제네......"

"테오, 조슈아에게 가보자! 얼른!"

테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체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브노아가 몇 번이나 재촉했지만 "잠깐만" 하고 말할 뿐이었다.

지금쯤 분장실에는 꽃다발이며 선물들이 밀려들고 있을 것이다. 아르님 부부는 오지 않았지만 그들 가족을 잘 아는 사람들이 몰려와 한바탕 북새통을 이룰 것이 뻔했다. 그 틈바구니에 서 있어봤자 자신의 가치만 떨어질 뿐이다.

테오는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고를 줄 알았다. 그는 이브노아에게 공연 전에 주머니에 넣은 것이 뭔지 확인해보자고 말했다. 이브노아가 종이 꾸러미를 꺼내 펴보자 새끼손가락에 끼는 조그마한 반지가 나왔다. 반지 안쪽에는 무어라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 글자를 잘 읽지 못하는 이브노아는 내용을 궁금해하며 읽어달라고 졸라댔다. 그것이 기껏해야 반지를 만든 장인이 남긴 표식에 불과할지라도, 테오는 일부러 말을 빙빙 돌리며 이브노아를 안달나게 만들었다. 테오가 내용을 읽어주었을 즈음엔 휴식 시간이 끝나 있었다.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는데......"

"뭔데?"

조슈아가 돌아보자 토미손이 계면쩍은 표적을 지었다.

"네 이름 말이야......, 어째서 요슈아가 아니고 조슈아인 거야?"

조슈아가 갑자기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려서 토미손은 더욱 놀랐다. 그런 식으로 웃는 조슈아를 처음 보았다. '조슈아'와 '요슈아'는 철자가 같았지만 지역에 따라 발음 차이가 났다. '폰 아르님'과 같은 중부식 성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요슈아라고 발음했다. 조슈아는 오래 웃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우리 집안은 남부 출신이야. '폰 아르님'보다 먼저 존재한 집안이라고 해야겠지. 내 이름은 남부식 전통을 따른 거라서 조슈아가 됐어."

"그럼 본래는 다른 성이었단 말이야?"

"아니, 본래는 성이 없었어."

"잠깐, 성이 없다면......."

말하다 말고 토미손은 멈칫했다. 성이 없는 것은 평민 중에서도 최하층민인 빈민이나 노예들뿐이었다. 아니라면 루그란이나 레코르다블 같은 외국의 경우나 그랬다. 하지만 아르님 가문은 공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 조슈아가 끝말을 대신했다.

"맞아. 처음엔 귀족이 아니었어."

"놀랐어. 그럴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굉장히 옛날이겠지?"

"굉장히 옛날엔, 누구도 귀족이 아니었을 거야."

조슈아의 작은 입술에 체스에서 이겼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미소가 떠올랐다.

"폰티나 공작이 이 미끼를 물지 않는다면 모르긴 해도 지략이 뛰어나다는 평가는 수정되어야 할걸요. 그러니 폰티나 공작에게 그쪽의 속내를 알고 있음을 보이고, 함께 킹메이커kingmaker가 되자고 제안하세요."

(...) 그때 조슈아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창을 열었다. 찬바람이 들어오자 서재 안에 감돌던 열기가 그제야 느껴졌다. 발그레해진 얼굴을 식히던 조슈아가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말로 하는 건 쉽죠. 의자에 앉아 세운 계획을 진짜로 성공시키는 것이야말로 어렵잖아요. 그럼 퀴닝Queening(체스에서 졸을 퀸으로 승진시키는 것)은 준비되셨나요?"

막시민은 생선을 다 먹고 작대기를 멀찍이 팽개치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 들어봐. 세상에는 사람이 있고 물고기가 있어. 물고기는 강에 살고 사람은 강변에 살지. 둘 다 강한테 도움을 받고 있다고. 그러니까 둘은 공동 운명체지. 서로 돕고 사는 관계라고 할 수 있어. 그러므로 사람은 물고기를 먹을 수 있어. 물고기는 강물을 먹어도 돼."

막시민이 말을 멈추자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직 이해가 안 되냐? 다시 잘 들어봐. 사람이 물고기를 먹는 것이 당연하다면 누가 그걸 막을 수가 있어? 같은 사람끼리 남이 먹는 물고기를 못 먹게 할 수가 있냐고. 당연히 아니지! 내가 물고기를 다 먹었다고 네 녀석이 먹고 있는 물고기를 뺏어 먹어도 될까?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먹고 있던 물고기도 누가 빼앗을 순 없어! 이제 알겠어?"

실로 엄청난 논리였다. 즉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내 생각엔 무슨 말인지 잘......."

막시민은 신경질을 냈다.

"멍청하다고 했더니 정말로 이해력이 떨어지네. 한 번만 더 잘 들어보라고! 물고기는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거야. 물고기의 수는 엄청나지. 매년 새로 생기고, 바다에 갔던 놈들도 돌아온다고. 물고기의 수는 누구도 셀 수 없어. 내가 저 그물에 있던 물고기를 꺼냈지. 그러면 거기에는 새로운 물고기가 와서 자릴 채우겠지. 물고기는 아무도 셀 수 없기 때문에 두 물고기에게 차이는 없어. 내가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그물의 물고기를 내버려두든, 그물의 물고기를 꺼내고 새 물고기가 거기 들어가든, 결과는 같단 말이야! 그건 맨 처음에 내가 말했듯 모든 물고기는 사람이 먹어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야. 물고기와 사람은 돕는 관계야! 사람은 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농작물에 주고 자기들도 먹지. 사람이 물을 다 가져가면 물고기는 살 수가 없지. 그러니까 사람도 물고기와 협상을 한 셈이야. 그게 물고기 일족의 생활 방식이야. 이해가 가? 그러니까 내게도 권리가 있어. 나도 사람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물 속의 물고기나 강물 속의 물고기나 모두 물고기야. 그건 서랍 속에 있는 책이나 침대 위에 있는 책이나 모두 집안에 있는 책인 것과 똑같아. 그래서 나는......."

저런 설명 대신 그냥 '물고기, 물고기, 물고기, 물고기, 사람, 사람, 사람, 사람'을 계속 되풀이했어도 별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조금 후엔 그렇게 들리기까지 했다. 적당히 수긍하지 않으면 끝없이 계속할 기세였으므로 조슈아는 킥킥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고기는 아무나 먹어도 되는 거야. 네 의견을 존중해."

"어, 형 왔네? 형, 여기 봐. 리하르트가 말린 과일을 잔뜩 구해 왔어. 어느 맘 좋은 여행자에게 꾸어 왔대."

꾸어 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는 이 동네 사람들이 그해 날씨에 따라 믿었다 안 믿었다 한다는 목축신만이 아실 게 틀림없었다. 막시민은 동생에게 양젖 주머니를 건네줬다.

"야, 이거랑 나눠 먹자."

이 집 형제들 사이엔 거래가 기본이었다.

"일마 누나! 아까 생강빵 갖고 왔댔지? 막시민 형이 양젖 갖고 왔어. 우리 지금 식사할까?"

이 집안은 늘 아무때나 식사했다.

"잘됐다. 마침 루돌프가 나가고 없잖아. 빵 한 개 더 먹겠네."

식사 때 빠진 녀석이 있으면 기다려주거나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듯 다 먹어버렸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예전부터 그래왔으므로 빠진 사람도 '앗, 재수가 없었어' 정도로 끝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우애 없는 형제는 아니었다. 서로 도울 것은 철저히 돕고 있었다. 얼마간 지켜본 조슈아는 이 형제들이 이기적이라기보다 단지 성격이 이럴 뿐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게다가 이들은 낯선 사람인 조슈아를 막시민이 데려왔다는 이유만으로 쉽사리 식사 자리에 끼워줄 정도로, 인심이 좋았다.

아넬리가 봉투에서 마력식을 적은 종이를 꺼내 펼쳤다. 인간의 평균적 의식이 가진 저항력과, 그걸 잠재우는 데 드는 힘과, 그 위에 새로운 인격을 덮는 데 드는 힘과, 그 인격의 완성도와, 깨어날 때 드는 부작용을 계산해 해당 마법을 시전하려는 자가 필요로 하는 힘을 구한 수식이 세 가지 색 잉크를 써서 날아갈 만한 필치로 펼쳐져 있었다. 시전 시간을 무한으로 늘리지 않아도, 단지 한두 달 정도만 하려 해도 필요한 마력의 수치가 천문학적이었다. 아넬리가 손가락으로 한 군데를 짚으며 말했다.

"여길 봐. 보통 쓸 만한 마법이면 이 부분에 드는 마력을 압축할 방법을 누군가가 찾아내거든. 그런데 인간이란 게 참, 별거 아닌 듯해도 한없이 에너지가 드는 존재야. 무엇보다 인간은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의지력이 전혀 달라지거든? 그래서 오차 없이 평균적인 결과를 얻으려면 쓸데없이 큰 힘으로 지속적으로 누르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숫자가 나오지. 한마디로 이건, 전혀 효율이 없는 짓이야. 그러니 부분 압축을 연구한 사람도 없지 않았겠니?"

파랑이 붉어지더니 곧 서녘을 뒤덮었다. 지평선 언저리에 저녁별이 두 개 떠서 깜빡거렸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고요하고 장려한 저녁이 왔다.

"파란 셔츠를 입고 빨간 바지를 입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울 텐데."

언덕에 팔베개를 하고 누운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하늘은 그렇지가 않잖아."

"그런가."

"할아버지, 성에 걸린 초상화 말이에요."

"초상화?"

히스파니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내가 집에서 나올 때 다 태워버렸을 텐데."

"한 장은 남았나 봐요. 지금도 비취반지 성에 걸려 있는데, 그게 어린시절의 모습이거든요. 지금의 저보다 더 어릴 때."

막시민이 끼어들었다.

"잠깐, 방금 궁금한 게 생겼는데. 초상화 밑에는 뭐라고 적혀 있냐?"

"이름이 적혀 있지, 뭐."

"그래, 그거 말이야. 본명이 뭐냐 이거지. 나뿐 아니라 이 동네에서 아무도 모르거든?"

생각해보면 코츠볼트 사람들도 '파란 지붕 댁 어르신' 정도로 부를 뿐, 이름도 가문명도 몰랐다. 가문명은 일부러 숨겼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막시민에게는 예전에 자신이 말해버린 터였다. 조슈아는 할아버지를 흘끗 쳐다본 뒤 대답했다.

"히스파니에 노엘탄트 폰 아르님."

막시민은 즉각 웃기 시작했다.

"우와, 엄청 우아하시네. 물론 전혀 안 어울려. 사람 이름 같지도 않고. 어, 거, 뭐냐, 왕실 파티에서 특별 주문한 삼단 케이크 이름 같지 않냐?"

이브노아는 때로 묘하게 정확한 기억력을 발휘했다. 다섯 살에서 지능의 성장이 멈춰버린 그녀가 다른 사람은 다 잊어버린 어느 날 밤의 대화를 시를 외우듯 되플이해 보이고, 자기 방의 물건 배치가 조금만 바뀌어도 알아챘다. 언뜻 지나친 사람을 몇 년 뒤 단번에 알아본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책 읽기나 편지 쓰기 등은 고사하고 '이브노아 아일첸브리스 폰 아르님'이라는 자신의 이름조차 단 한 번도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누나다. 조슈아는 이브노아가 그림 한 폭을 보듯 상황을 기억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글자나 숫자처럼 추상 능력이 필요한 것은 전혀 배우지 못하니까.

이브노아가 그런 기억력을 보일 때면 사람들은 놀랐지만, 가족들은 얼굴이 굳어졌다. 차라리 그런 것도 없었더라면 지금의 모습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겠거니 할 터인데, 어둠 속 불빛처럼 한 번씩 반짝이는 재능이 오히려 부족함을 더욱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될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무슨 노래 할까?"

"뭐든 해. 전부 다."

"전부 다 했다간 생일 파티는 구경도 못 하게 될걸."

"그래? 그럼 조금만 해. 열 개만."

이브노아는 아이처럼 손가락을 쫙 펼쳐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조슈아는 명치를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브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아파?"

"아냐."

"아프면 노래하지 마. 어디가 아픈데?"

"안 아프다니까."

조슈아는 마음속 무방비하던 곳이 찔렸다고 생각했다. 이브노아가 다섯 살답게 천진하게 펼친 손가락, 그걸 보는 순간 자신이 오래전에 누나를 잃었다는 것, 아니면 처음부터 가진 적도 없었다는 것, 또한 그런 누나를 이 년 동안 잊으려 애써서 거의 성공할 뻔했다는 것까지 한꺼번에 명백해졌다. 심장 밑바닥에서 잠자던 마음이 갑자기 햇빛 아래로 끌어내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노래하지 마. 또 아프면 어떡해."

조슈아는 순순히 이브노아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어려서 자신이 누나의 분별없는 애정 때문에 질식할 지경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어쩌면 이브노아가 본 조슈아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인형이었는지도 몰랐다. 어린시절의 조슈아는 정말로 천사같은 꼬마였으니까.

"내려가자. 아침을 먹으면 좋아질 거야. 꼭."

하지만 인형을 두고 저렇게 끈질기게 걱정하는 다섯 살 꼬마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조슈아는 누나가 원하는 대로 연습실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누나가 보이는 애정에 일말의 의문을 가졌다. 지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능력마저 의심했던 것이다. 진심의 존재마저도.

이후 이날 아침을 기억할 때마다 조슈아는 가슴 한쪽에 지금과 똑같은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건 누나가 가져가버린 그의 마음속 동그란 빈자리였다. 그곳은 작았지만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안 해! 그 빌어먹을 카르디인지 뭔지가 직접 와서 해보라지! 바느질 한 땀 못 뜨는 주제에 이딴 스케치가 다 뭐야!"

스케치를 바닥으로 밀쳐버린 리체는 화난 걸음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막 1층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가니, 리체 아브릴?"

자클린느 미랭게트 선생이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2층에서 귀를 기울이던 직원들이 일제히 키득거렸다.

"아, 그건...... 저......."

대답이 궁해 말을 더듬으면서도 화를 누르지 못한 숨소리가 위층까지 잘 들려왔다. 미랭게트 선생이라고 리체가 화난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어디 아픈 데라도?"

"...... 없습니다, 물론."

"응, 건강하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그만 올라가서 오늘 주문을 마저 살펴보겠니?"

오늘따라 고양이가 가르릉거리듯 우아하게 말하고 있는 미랭게트 선생의 의도가 뻔해서, 2층에서는 웃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끅끅대며 입을 막았다. 미랭게트 선생은 리체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이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것처럼 상냥하게 물으면, 다혈질 소녀 리체도 성질을 터뜨리지 못했다.

"주문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도저히......."

"아아, 어렵니? 그러면 기간을 더 늘려달라고 손님한테 부탁해야겠구나?"

은근슬쩍 당근도 던져준다. 리체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데브랭 은사 같은 건 재고가 없고......."

"그래? 특별편으로 주문하지, 뭐. 알다시피 사흘 하고 반나절이면 온단다."

"......네."

리체가 터덜터덜 2층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웃던 사람들은 재빨리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작업 테이블 앞으로 돌아온 리체는 입을 꾹 다문 채 바닥에 내던진 스케치를 주워 들었다. 테이블에 얹어놓고, 의자를 당겨 앉더니 엎드려 얼굴을 묻었다. 허리까지 오는 장밋빛 머리가 풀썩 날아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리체가 저럴 때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흘끔흘끔 곁눈질하면서도 다들 자기 일로 돌아갔다. 리체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열다섯 살 먹은 리체는 미랭게트 의상실의 막내였다. 막내이면서도 가장 까다로운 재봉은 도맡다시피 했다. 처음이라 잘하고 싶은 마음에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던 탓이다. 결과물도 좋은데다 연달아 어떻게든 해내니까 무리한 주문이 계속됐다. 리체가 없었던 작년에는 일정이 촉박하다 싶으면 처음부터 거절했던 것을 다들 기억하고 있었다. 다들 이 의상실에 목줄이 매인 처지라 함부로 말은 못 하지만 미랭게트 선생이 어린 리체를 무리하게 쥐어짠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우시카와는 짧아진 담배를 끄고 잠시 생각에 잠겼고, 그것이 일단락되자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참 전부터, 폐암에 걸릴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생각을 집중하는 데는 니코틴의 도움이 필요하다. 바로 이삼 일 뒤의 운명도 모르는 것이다. 십오 년 뒤의 건강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결국 그녀는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오른손 검지에 넣었던 힘을 풀고, 입에서 총구를 꺼냈다. 그리고 깊은 바다 밑에서 마침내 떠오른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온몸의 공기를 통째로 갈아치우듯이.





“그밖에 뭔가 필요한 게 생각나면 종이에 적어서 키친 카운터에 올려놔. 다음 보급 때까지 준비할 테니까.”

“고마워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부족한 건 별로 없어요.”

“책이나 비디오 같은 건?”

“딱히 원하는 게 생각나지 않는군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때?” 다마루는 말한다. “만일 아직 읽지 않았다면 완독할 좋은 기회일지도.”

“당신은 읽었어요?”

“아니. 나는 교도소에도 간 적이 없고, 어딘가에 오래 은신할 일도 없었어. 그런 기회라도 갖지 않는 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더군.”

“주위에 누군가 다 읽은 사람이 있었어요?”

“교도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 내 주위에 없는 건 아닌데, 다들 프루스트에 흥미를 가질 만한 타입이 아니었어.”

아오마메는 말한다. “한번 해보죠. 책이 입수되면 다음 보급 때 함께 보내주세요.”

“사실은 벌써 준비해뒀어.” 다마루는 말한다.





“여기는 터프한 세계야.”

“희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는 법이니까.” 아오마메는 말한다.

다마루는 다시 잠깐 침묵한다. 그러고는 말한다. “스탈린 시대에 비밀경찰 심문관이 치르는 최종 테스트 이야기 들은 적 있나?”

“없을걸요.”

“그는 네모난 방에 들어가게 돼. 그 방에는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작은 나무의자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야. 그리고 상관에게서 이런 명령이 떨어져. ‘그 의자에게서 자백을 끌어내 조서를 꾸며라. 그때까지는 이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마라’고.”

“꽤 쉬르리얼리스틱한 이야기군요.”

“아니, 그게 아냐. 이건 쉬르리얼리스틱한 이야기가 아니야. 꽁지 끝까지 철저히 리얼한 이야기지. 스탈린은 그런 편집광적인 시스템을 실제로 만들어서 재임중에 대략 천만 명의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어. 그 대부분이 그의 동포였지. 우리는 실제로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어. 그걸 반드시 머릿속에 새겨두는 게 좋아.”

“당신은 마음이 따스해지는 이야기를 아주 많이 알고 있군요.”

“그 정도는 아니야. 필요에 따라 비축해두는 것뿐이지. 나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까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그 자리에서 배워두는 수밖에 없어. 희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다. 네 말이 맞아. 그건 확실해. 단지 희망은 수가 적고 대부분 추상적이지만, 시련은 지긋지긋할 만큼 많고 대부분 구체적이지. 그것도 내가 내 돈 들여가며 배운 것 중 하나야.”

“그래서 심문관 지망자들은 결국 나무의자에게서 어떤 자백을 받아냈죠?”

“그건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의문이야.” 다마루는 말한다. “선禪의 화두처럼 말이지.”

“스탈린 선.” 아오마메는 말한다.

다마루는 잠시 틈을 둔 뒤에 전화를 끊는다.





아버지는 끊임없는 혼수昏睡 속에 있었다. 마비가 자비심 깊은 옷처럼 그의 온몸을 감쌌다.





책을 낭독하는 데 싫증이 나면 덴고는 그저 침묵 속에 앉아 계속해서 잠을 자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뇌 속에서 대체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을지 추측했다. 그곳에는—오래된 모루처럼 완고한 그 두개골 안쪽에는—대체 어떤 모양의 의식이 몸을 숨기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곳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은 걸까.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내버려진 집처럼 가재도구는 남김없이 실려나가고, 예전에 살던 사람들은 기척도 없이 사라져버렸을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벽이나 천장에는 순간순간의 기억이나 광경이 낙인으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기나긴 시간을 들여 키워진 것은 그렇게 맥없이 무無 속으로 빨려들지 않는다. 





“음, 까마귀는 시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시간관념은 아마 인간에게만 있을 테니까.”

“왜요.”

“인간은 시간을 직선으로 인식해. 길고 반듯한 막대에 눈금을 새기는 것처럼. 이쪽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 이 뒤는 과거, 그리고 지금은 이 포인트에 있다, 라는 식으로. 알겠니?”

“아마도.”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은 직선이 아니야. 어떤 모양도 갖고 있지 않아. 그건 모든 의미에서 형태를 갖지 않는 것이야. 하지만 우리는 형태 없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으니까 편의상 그걸 직선으로 인식하지. 그런 관념적인 치환이 가능한 건 현재로서는 인간뿐이야.”

“하지만 우리가 잘못되어 있는지도.”

덴고는 거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시간을 직선으로 인식하는 것이 잘못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대답은 없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어. 우리가 잘못되었고 까마귀가 옳은지도 모르지. 시간은 전혀 직선 같은 게 아닐 수도 있어. 그건 꽈배기 도넛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덴고는 말했다. “하지만 인간은 아마 몇만 년 전부터 그렇게 살아왔을 거야. 즉 시간을 영원히 지속되는 일직선으로 인식하고 그런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행동해왔어.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에 딱히 불합리한 점이나 모순점을 찾아낼 수 없었어. 그러니까 경험칙으로서 그건 아마 옳을 거야.”

“경험칙.” 후카에리는 말했다.

“수많은 샘플을 거치게 해서 하나의 추론을 올바른 사실로 간주하는 거야.”

후카에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것을 이해했는지 아닌지, 덴고는 알지 못했다.





덴고는 다시 아버지가 남기고 간 침대의 우묵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닳도록 신은 수많은 구두를 생각했다. 날마다 수금 루트를 답파하면서 아버지는 오랜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두를 매장해왔다. 모두 비슷한 모양의 구두. 검고 바닥이 두툼하고 지극히 실용적인 값싼 가죽구두. 그것들은 너덜너덜 닳고 해지고, 뒤꿈치가 비뚤어질 때까지 혹사당했다. 거칠게 변형된 그런 구두를 볼 때마다 소년시절의 덴고는 가슴이 몹시 아팠다. 그가 가엾게 생각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구두였다. 그 구두들은 이용당할 만큼 이용당하고 이제는 죽음이 임박한 가엾은 사역동물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의 아버지는 죽어가는 사역동물 같은 게 아닐까. 닳아버린 가죽구두와 마찬가지로.





전화번호부에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와 직접 통화할 수 있는 상대는 한정되어 있고, 그밖의 사람들은 설탕통에 슬슬 기어들려는 개미처럼 답삭 집혀나온다.





가정을 해보자, 하고 우시카와는 생각했다. 여기서는 잠시 고명하신 ‘오컴의 면도날’의 법칙에 따라 되도록 심플하게 가설을 쌓아나가는 게 좋다. 쓸데없는 요인은 배제하고 논리의 라인을 하나로 줄여서 상황을 바라보자.





거기까지는 아슬아슬하게나마 가설의 실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선구’의 리더와 ‘가정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한 상담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느냐는 지점에 이르러 우시카와는 그만 두 손을 들고 만다. 그의 사고는 거기에서 딱 막히고, 이어온 가설의 실은 예리한 면도날에 어이없이 끊겨버린다.





이것이 계속 산다는 것의 의미다, 아오마메는 그것을 깨닫는다. 인간은 희망을 부여받고, 그것을 연료로, 목적으로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 희망 없이 인간이 계속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동전 던지기와도 같다.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는 동전이 떨어질 때까지 알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옥죄어온다. 온몸의 뼈라는 뼈가 모두 삐걱거리며 비명을 울릴 만큼 강하게.





“뭐든 좋으니 책을 읽어달라고 아버지가 부탁했었어요. 한참 전에, 아직 의식이 약간 남아 있을 때. 게다가 여기서는 달리 할 일도 없어서.”

“무슨 책을 읽고 있지?”

“여러 가지예요. 그냥 내가 읽는 책, 지금 내가 읽는 부분을 소리 내어 읽는 것뿐이에요.”

“지금은 뭘 읽고 있는데?”

“이자크 디네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본 적이 없네.”

“디네센은 덴마크 여성인데, 1937년에 이 책을 썼어요. 스웨덴 귀족과 결혼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아프리카로 건너갔고, 거기서 농장을 경영하게 됐죠. 나중에 이혼하고 혼자서 그 농장을 꾸려갔어요. 그때의 경험을 쓴 책이에요.”

그녀는 아버지의 체온을 재고, 기록표에 수치를 적어넣고는 볼펜을 다시 머리에 꽂았다. 그리고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책 읽는 거, 나도 잠깐 들어봐도 될까?”

“네,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덴고는 말했다.

“한번 읽어봐.” 그녀는 스툴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꼬고 앉았다. 골격이 반듯한, 아름다운 다리였다. 얼마간 군살이 붙기 시작하고 있었다.

덴고는 펼쳐진 부분을 천천히 읽었다. 그것은 천천히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종류의 글이었다. 아프리카의 대지를 흐르는 시간처럼.





그렇게 말하더니 후카에리는 틈을 두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대화는 한순간에 소멸되었다. 누군가 잘 벼린 손도끼를 내리쳐 전화선을 끊어버린 것처럼.





언젠가 머지않아, 라고 덴고는 생각했다. 고마쓰의 말투에서는 어떤 기묘한 여운이 감지되었다. 거기에는 적절한 거리감 같은 것이 누락되어 있었다. 입에 올리는 말들이 어딘지 모르게 밋밋하고 깊이가 없다.

대학교 때 영어수업에서 <맥베스>를 읽었을 때, 묘하게 마음에 남는 한 구절이 있었다.

By the pricking of my thumbs,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
Open, locks,
Whoever knocks.

엄지의 욱신거림이 알려주는구나,
불길한 것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노크를 하거든 그게 누구이든, 자물쇠여, 열려라

어째서 그 한 구절만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걸까. 희곡 속에서 누가 그 대사를 말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하지만 그 구절은 덴고에게 고엔지 아파트의 문을 집요하게 노크하는 NHK 수금원을 떠올리게 했다. 덴고는 자신의 엄지를 바라보았다. 욱신거림은 없다. 그래도 셰익스피어가 맞춰놓은 교묘한 압운에는 과연 불길한 울림이 감돌았다.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

후카에리가 문을 열지 말아야 할 텐데, 덴고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으면 입 주위의 근육이 퇴화한다. 의식적으로 입을 크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그럴 때는 외국어 회화 연습이 도움이 된다. 게다가 아오마메는 오래전부터 남미에 대해 얼마간 로맨틱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만일 행선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남미 어딘가의 작고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고 싶다. 이를테면 코스타리카. 바닷가에 조그만 빌라를 빌려 수영도 하고 책도 읽으며 살아간다. 그녀의 가방에 가득 채워진 현금으로, 사치만 하지 않는다면 십 년쯤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도 코스타리카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스페인어 일상회화를 연습하면서 코스타리카 바닷가에서의 조용하고 평온한 생활을 아오마메는 상상한다. 그 생활에 덴고도 포함되어 있을까. 눈을 감고, 카리브해 비치에서 덴고와 나란히 일광욕하는 광경을 떠올린다. 그녀는 조그만 검은색 비키니를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옆에 있는 덴고의 손을 잡고 있다. 하지만 그 장면에는 가슴 떨리는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다. 흔해빠진 관광홍보 사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다치 구미는 냉장고에서 새 캔맥주를 꺼내와 큰 소리가 나게 마개를 따고 자신의 잔에 따라서 삼분의 일쯤을 단번에 마셨다. 그리고 만족한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돌이켜보면 우시카와의 상황도 비슷했다. 그의 경우에는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에 애써 장학금을 손에 넣을 필요도 없었고 용돈이 부족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덴고나 아오마메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다른 친구들처럼 설렁설렁 놀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런저런 세속적인 재미를 다 버리고ㅡ그건 원한다고 해서 간단히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ㅡ아무튼 공부에만 전념했다. 열등감과 우월감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정신은 거칠게 뒤흔들렸다. 나는 말하자면 소냐를 만나지 못한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인간이다, 라고 곧잘 생각하곤 했다.





당분간은 덴고 쪽에 매달려보는 수밖에 없어, 우시카와는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소거법의 근사한 샘플이다. 깔끔하게 팸플릿을 만들어 길 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을 정도다. 보세요, 여러분, 이게 바로 소거법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일단 자아가 이 세계에 태어난다면, 윤리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 잘 기억해두는 게 좋아."

"누가 그런 말을 했죠?"

"비트겐슈타인."

"기억해두죠." 아오마메는 말한다. "만약 당신 아이가 태어났다면, 지금 몇 살일까요?"

다마루는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열일곱 살이야."

"열일곱 살." 아오마메는 윤리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열일곱 살의 소년 혹은 소녀를 상상한다.





가족이 다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그 혼자만 명백히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실수로 그곳에 들어 왔다가 사진에 찍혀버린 무신경한 외부인처럼 보였다.





손에 닿는 것 모두가 황금으로 변해버리는 전설의 왕처럼, 그가 입에 담는 말은 모조리 무미건조한 모래알이 되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우시카와는 항상 미지근한 물로 오래도록 목욕을 한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목욕물부터 받았다. 플라스틱 욕조에 몸을 담그고 라디오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다. 꼭 시벨리우스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니다. 또한 시벨리우스의 협주곡이 하루의 끝자락에 목욕을 하면서 적합한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혹시 핀란드 사람이라면 기나긴 밤에 사우나를 하면서 시벨리우스를 듣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쿄 구 고히나타에 있는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의 좁은 욕실에서 듣기에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약간 지나치게 정념적이고 그 울림은 지나치게 긴박감을 품고 있다. 하지만 우시카와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배경에 뭔가 음악이 흐르고 있으면 그냥 그걸로 좋았던 것이다. 라모의 <콩세르>가 흐르고 있다면 아무 불평 없이 그걸 들었을 것이고, 슈만의 <사육제>가 흐르고 있다면 그것도 아무 불평 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 우연히 FM 방송국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내보냈다. 그저 그뿐이다.





"거, 고맙군요." 우시카와는 말했다. 그리고 그 명함의 직책과 똑같이 알맹이 없는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어요. 하지만 세월은 모든 인간에게서 조금씩 생명을 앗아갑니다. 사람은 때가 되어서 죽는 게 아니에요. 안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가다가 이윽고 최종 결제 기일을 맞는 것이지요. 아무도 거기에서 도망칠 수 없답니다. 인간은 받은 것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야 그 진실을 배우고 있을 뿐이에요."





차가운 바람이 구름 떼를 도쿄 만 쪽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구름은 퍼티putty로 만든 것처럼 제각기 일정치 않은 모양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그 구름에 이따금 가려지면서 두 개의 달이 모습을 보였다. 눈에 익은 노란색 달과 새로 생긴 조그만 초록색 달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까마귀가 오지 않았구나, 하고 덴고는 생각했다. 까마귀가 오면 소리로 금세 알 수 있다. 커다란 날개를 창에 비벼대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리 여기저기에 희미한 기름 흔적이 생겼다. 해독을 요구하는 암호처럼.





우시카와는 벌레가 된 '잠자'처럼, 퉁퉁하고 비틀어진 몸을 방바닥에서 재주껏 움직여 근육을 최대한 풀었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구름들이 재빠르게 흘러간다. 구름은 하얗고 촘촘하고 윤곽이 또렷해서, 눈 녹은 강을 타고 바다를 향해 가는 단단한 얼음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디선가 나타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런 한밤의 구름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세계의 끝 가까운 곳까지 실려온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이성의 극북이다. 아오마메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보다 더 북쪽으로는 더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앞에는 그저 허무의 혼돈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스킨헤드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우스움과 동정의 중간쯤에 자리하는, 극히 옅은 감정이 엿보였다.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아오마메는 생각한다. 추적하는 자의 사각은 추적당하는 것이다.





"여보세요." 덴고는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말했다. 머리에 뇌수 대신 냉동된 양상추가 채워져 있는 것 같다. 양상추는 냉동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는 것이다. 일단 냉동되었다 해동된 양상추는 아삭아삭한 식감을 잃고 만다. 그게 아마도 양상추에게는 최상의 자질일 텐데.





NHK 수금원 제복을 입고 그 검소한 관 안에 누운 아버지는 죽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일하다가 잠깐 선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눈을 뜨고 일어나 모자를 쓰고, 남은 수금을 위해 일하러 나갈 것 같았다. NHK 마크를 실로 꿰맨 그 제복은 그의 피부의 일부처럼 보였다. 이 사람은 그 제복에 감싸여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것에 감싸여 화장되는 것이다. 실제로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마지막으로 몸에 걸칠 옷으로는 그것 외의 다른 것은 덴고도 생각나지 않았다. 바그너의 악극에 등장하는 전사들이 갑옷에 감싸인 채 화장되는 것과 같다.




"셰익스피어가 썼듯이," 다마루는 그 일그러진 무거운 머리를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오늘 죽어버리면 내일은 죽지 않아도 돼. 서로 되도록 좋은 면을 보도록 하자고."

<헨리 4세> 였는지 <리처드 3세> 였는지, 그 대사의 출전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다마루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우시카와가 새삼 정확한 출처를 알고 싶어할 것 같지도 않았다.





"미안하지만 헤클러 & 코흐는 돌려주지 못할 거 같아요." 아오마메는 말한다.

"괜찮아. 개인적으로 증정한 물건이야. 보관하기 귀찮아지면 도쿄 만에 내버리면 돼. 그만큼 세계는 조금이나마 비무장에 한 걸음 다가갈 테니."

"결국 마지막까지 권총은 불을 뿜지 않을지도 몰라요. 체호프의 원칙에는 위배되겠지만."

"그것도 괜찮아. 불을 뿜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지. 지금은 이미 20세기도 끝이 멀지 않은 때야. 체호프가 살던 시대와는 사정이 달라. 마차도 달리지 않고, 코르셋을 입은 귀부인도 없어. 세계는 나치즘과 원자폭탄과 현대음악을 통과하면서도 그럭저럭 살아남았어. 그동한 소설작법도 적잖이 변했지. 신경 쓸 거 없어."





그들의 옷이나 얼굴은 지극히 청결하고 얼룩 하나 없었다. 그들은 오염이나 마모와는 인연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빌딩 바로 위에 뜬 달을 말없이 바라본다. 그것이 이제 막 떠오른 태양빛을 받아, 밤의 깊은 광휘를 급속히 잃고, 하늘에 걸린 한낱 회색 오려낸 종이로 변할 때까지.

다마루는 두 팔을 펼쳐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마치 사막의 한복판에 서서 비가 내리기를 고대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고 두툼한 손바닥이었다.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은 몸의 일부라기보다 거대한 중장비의 부품처럼 보였다.





“체호프가 말했어.” 다마루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다면 그건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한다, 고.”

“무슨 뜻이죠?”

다마루는 아오마메를 정면으로 마주하듯이 서서 말했다. 그가 아주 조금 몇 센티미터쯤 키가 컸다. “이야기 속에 필연성이 없는 소도구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거지. 만일 거기에 권총이 등장했다면 그건 이야기의 어딘가에서 발사될 필요가 있어. 체호프는 쓸데없는 장식을 최대한 걷어낸 소설 쓰기를 좋아했어.”

아오마메는 원피스 소매를 바로잡고 숄더백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당신은 그걸 걱정하는 거군요. 만일 권총이 등장한다면 그건 반드시 어딘가에서 발포되는 결과를 낳고 말 거라고.”

“체호프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래.”

“그래서 가능하다면 내게 권총을 건네주고 싶지 않은 거고.”

“위험하기도 하고 불법이기도 해. 게다가 체호프는 믿을 수 있는 작가야.”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아니에요. 현실세계의 일이지.”

다마루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하고 아오마메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걸 누가 알지?”





“바니 비가드는 천재적인 2루수처럼 아름다운 플레이를 해.” 그녀는 언젠가 말했다. “솔로도 멋지지만 그의 장점이 가장 잘 나타나는 건 역시 남의 뒤에 숨어서 연주할 때야. 엄청나게 어려운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워버려. 그 가치는 주의 깊은 귀가 아니면 결코 알지 못해.”

LP의 B면 여섯번째 곡 〈애틀랜타 블루스〉가 시작될 때마다 그녀는 항상 덴고의 몸 어딘가를 꼭 잡고, 비가드가 연주하는 그 간결하고도 절묘한 솔로를 절찬했다. 그의 솔로는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와 트럼펫 솔로 연주 사이에 끼어 있었다. “저거, 저거, 잘 들어봐. 우선 처음에 작은 아이가 내는 듯한, 와악 하는 긴 부르짖음. 놀란 건지 기쁨이 뻗친 건지 행복하다는 호소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게 유쾌한 날숨이 되어서 아름다운 물길을 구불구불 나아가 어딘가 단정한, 사람들 모르는 곳으로 매끈하게 빨려드는 거야. 들어봐. 이렇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솔로는 그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못 불어. 지미 눈도 시드니 베셰도 피 위도 베니 굿맨도, 모두 다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이긴 한데 이런 정교한 미술 공예품 같은 건 아무튼 못 해.”

“오래된 재즈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덴고는 언젠가 물었다.

“내게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과거가 아주 많아. 아무도 바꿔 쓸 수 없는 과거가.” 





그가 최근 십 년 동안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워스트드레서를 선정하라고 한다면 이 인물은 그 리스트의 최상위권에 들어갈 것이다. 그저 단순히 옷차림만 지독한 게 아니다. 그곳에는 복식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도적으로 모욕하려는 듯한 인상마저 엿보였다.





그가 웃자 지독한 치열이 그대로 드러났다. 며칠 전 큰 해일에 씻긴 바닷가의 말뚝처럼 그 치아는 다양한 각도로 구부러지고, 다양한 방향을 지향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이제 와서 그것을 교정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그에게 올바른 양치질법을 가르쳐주는 게 마땅한 일일 것이다.





“나는 항상 겉모습만으로 인간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다가 실수해서 후회한 일이 전에 있었거든. 하지만 그 사람은 척 보자마자 도저히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던데.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기만이 아니야.” 덴고는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만이 아니다.” 그녀는 그 문장의 정밀도를 확인하듯이 반복했다.





“그건 그래. 물론 잘 짜인 사기일 수도 있지. 전화 하나 놓고, 받는 사람 하나 쓰면 되는 일이니까. 영화 〈스팅〉에서처럼. 하지만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 덴고 선생은,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뜯어갈 만큼 돈이 많은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 덴고는 말했다. “영혼 외에는.”

“어째 메피스토펠레스가 나오는 이야기 같네.” 그녀는 말했다.





아오마메는 나른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카펫 위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사용할 기회가 없는 근육을 하나하나 소환하여 시스테마틱하게 철저히 비틀어올린다. 근육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땀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그 스트레칭 프로그램을 스스로 고안하여 보다 격렬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나날이 갱신해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스포츠클럽 강의에는 적용하지 못한다. 보통사람들은 그토록 큰 고통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 동료 인스트럭터들조차 대부분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해치우는 동안, 그녀는 조지 셀이 지휘하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레코드를 걸었다. 〈신포니에타〉는 약 25분이면 끝나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근육을 한바탕 효과적으로 괴롭히는 게 가능했다.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다. 딱 적당한 길이다. 곡이 끝나고, 턴테이블이 멈추고, 턴암이 자동적으로 원위치로 돌아갔을 때는 머리도 몸도 걸레를 쥐어짠 듯한 상태가 된다.

아오마메는 이제 〈신포니에타〉를 구석구석까지 모두 기억했다. 몸을 극한 가까이 늘이면서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거기에서 그녀는 고문하는 자이며 고문당하는 자였다. 강제하는 자이고 강제당하는 자였다. 그처럼 내부로 향한 자기 완결성이 곧 그녀가 바라는 것이고, 그것은 그녀를 위무해주었다.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는 그러기 위한 배경음악으로서 매우 유효했다.





가방 안에는 색이 바랜 푸른 목욕타월이 들어 있고 그것을 펼치자 검게 빛나는 금속제품이 나왔다. 소형 오토매틱 권총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권총을 아오마메에게 내밀었다. 아오마메도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손 안에서 가늠했다. 보기보다 훨씬 가볍다. 이렇게 가벼운 것이 사람에게 죽음을 몰고 오는 것이다.





“물론.” 아오마메는 말했다. “하지만 정말 돈을 안 받아도 괜찮아요?”

다마루는 고개를 저었다. “돈은 필요 없어. 이 세상은 돈보다 오히려 서로 빚을 주고받는 걸로 돌아가거든. 나는 빚지는 건 싫으니까 가능한 한 빚 받을 데를 많이 만들어두지.”





덴고는, 새로 제작되어 나온 여든여덟 개의 건반을 처음 마주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처럼 열 개의 손가락으로 허공에 조용한 물결을 만들어보았다. 그러고는 이윽고 마음을 정하고 워드프로세서 화면에 문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의 핵심에 있는 것은 무無가 아니다. 황폐하고 메마른 사막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랑이다. 나는 변함없이 덴고라는 열 살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의 강함과 총명함과 다정함을 그리워한다. 그는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육체는 멸하지 않고, 서로 나누지 않은 약속은 깨지는 일이 없다.





그는 정말로 트러블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덴고는 자주 그런 느낌을 받았다. 고마쓰에게서는 파멸에 대한 바람 같은 것이 때때로 엿보였다. 계획이 모조리 까발려지고, 질척거리는 스캔들이 성대하게 터지고, 관계자 모두가 하늘 높이 날려가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마쓰라는 인간에게는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마쓰는 냉철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바람은 바람으로 어딘가에 놔두고, 실제로는 그리 쉽사리 파멸의 경계선을 넘어서거나 하지 않는다.





「공기 번데기」를 읽은 뒤에 “미스터리어스한 물음표의 풀에 내던져진” 선남선녀들에게 덴고는 동정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컬러풀한 둥근 튜브에 매달린 사람들이 난처한 얼굴로 물음표가 가득한 넓은 풀에 한없이 둥둥 떠 있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하늘에는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인 태양이 빛나고 있다. 덴고는 그러한 상황을 세상에 유포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사람으로서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체 어느 누가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덴고는 그렇게 생각한다). 온 세상의 신들이 한자리에 모여도, 핵무기를 폐기하지도 테러를 근절하지도 못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의 가뭄을 끝내게 하지도, 존 레넌을 다시 살아나게 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러기는커녕 신들끼리 패가 갈려 격렬한 싸움이나 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세계는 좀더 혼란스러운 사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런 사태가 몰고 올 무력감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을 잠시 미스터리어스한 물음표의 풀에 떠 있게 하는 것쯤은 그나마 죄가 가벼운 편이 아닐까.





“내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남자는 물었다.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적어도 덴고는 감정 같은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다만 억양에 희미하게 사투리의 흔적이 있었다. 히로시마나 규슈, 아마 그쪽 지방이다. 정확하지는 않다.





아버지는 덴고가 방에 들어가도 한 차례 흘끗 쳐다보았을 뿐, 계속 바깥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니 인간이라기보다 쥐나 다람쥐류에 가까운 생물처럼 보였다. 그다지 청결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만만치 않은 지혜를 갖춘 생물. 하지만 그건 틀림없이 덴고의 아버지였다. 혹은 아버지의 잔해라고나 해야 할까. 이 년의 세월이 그의 몸에서 많은 것을 앗아가버렸다. 마치 세금 징수인이 가난한 집에서 가재도구를 인정사정없이 빼앗아가듯이. 덴고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씩씩한 남자였다. 자기성찰이나 상상력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나름의 윤리관이 있었고, 단순하지만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인내심 강하고, 불평이나 우는소리를 입에 올리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빈 허물에 지나지 않았다. 따스함을 남김없이 빼앗겨버린 빈 집에 지나지 않았다.





덴고는 숨을 삼키고, 잠시 할말을 잃었다. 아버지도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각기 뒤엉킨 사고의 행방을 더듬었다. 매미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한껏 소리 높여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남자가 크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우물 속에서 올라오듯 느리고 굵은 날숨이다. 이어서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숲의 수목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강풍처럼 거칠고 불온하다. 그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소리가 번갈아 거듭되었다. 그 중간중간에 기나긴 침묵의 간격이 있었다. 리드미컬한, 또한 많은 의미를 포함한 그 반복은 아오마메를 침착하지 못한 기분으로 몰아갔다. 지금까지 듣고 본 적 없는 영역에 발을 들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를테면 깊은 해구 밑바닥이나, 혹은 미지의 소행성의 지표면 같은 곳. 어떻게든 도달할 수는 있어도 되돌아오는 건 불가능한 곳.





다테야마에서 갈아탄 상행 특급열차는 올 때보다 사람이 많고 북적거렸다. 승객 대부분은 해수욕을 마치고 돌아가는 가족 일행이었다. 그들을 보고 있으려니 덴고는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런 가족 소풍이나 여행이라는 것을 그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추석이나 설 연휴에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집에 누워 잠을 잤다. 그런 때의 아버지는 마치 전원이 끊긴 무슨 지저분한 장치처럼 보였다.





“거기로 갈게요.”

덴고가 뭔가 말하려고 했을 때 회선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다들 대화 중간에 자기들 마음대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마치 도끼를 휘둘러 외줄 다리를 끊어버리듯이.





젊고 활기찬 학생들 속에 섞여 있으니 우시카와의 이상한 꼬락서니는 한층 더 두드러졌다. 그가 있는 쪽만 중력과 대기 농도와 빛의 굴절도가 달라 보였다. 멀리서 보니 그는 실제로 불행한 뉴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라서 카페테리아는 몹시 붐볐지만, 우시카와가 앉은 6인용 테이블에는 누구도 동석하지 않았다. 영양들이 들개를 피하는 것처럼, 학생들은 자연스러운 본능에 따라 우시카와를 피하고 있었다.





기묘한 일이라고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나는 이 사내를 살해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가방 안에는 특제품 극세 아이스픽이 들어 있다. 그 바늘 끝을 이 남자의 목덜미 적합한 자리에 대고 자루 부분을 톡 내리치면 그걸로 모든 게 끝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상대는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의 몸은 결과적으로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런데도 나는 전력을 다해 이 사내가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려고 땀을 흘리고 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기 때문이야,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눈앞에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이다. 문제가 있는 근육을 정상화하라는 일이 주어지면 전력을 다해 그것에 임한다. 어떤 인물을 살해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래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나는 또한 전력을 다해 그것에 임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두 가지 행위는 각각 대립하는 목적을 갖고 있고, 서로 어우러질 수 없는 방법이 요구된다. 그래서 한 번에 어느 한쪽밖에 할 수 없다. 지금 나는 이 남자의 근육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려고 한다. 나는 이 작업에 의식을 집중하고 내가 가진 힘을 총동원한다. 그다음 일은 그것이 끝난 뒤에 다시 생각하면 된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남자는 말했다.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묘사한 것도 그러한 세계의 양상이야.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그 자체가 선인 게야. 내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네.”

“당신을 죽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아오마메는 단호히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죽일 목적으로 이곳에 왔어요. 당신 같은 인간이란 존재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세계에서 말살할 작정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럴 마음이 없어요. 당신은 끔찍하게 고통받고 있고 그 고통을 나는 알아요. 당신은 그대로 고통에 허덕이며 너덜너덜해진 채 죽어가야 마땅해요. 내 손으로 당신에게 편안한 죽음을 선물해줄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군요.”

남자는 몸을 엎드린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자네가 나를 죽인다면 내 사람들이 자네를 어디까지든 쫓아다닐 게야. 그들은 광신적인 자들이고, 강하고 집요한 힘을 갖고 있어. 내가 없어지면 교단은 구심력을 잃겠지. 하지만 시스템이라는 건 일단 모양새가 만들어지면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는 것이야.”





“너무해.” 아오마메는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유미를 죽여봤자 현실은 아무것도 변할 게 없었는데.”

“아니, 그들은 살인자가 아니야. 자신들이 직접 손을 대서 누군가를 파괴하는 일은 없어. 자네 친구를 죽게 한 것은 아마도 그녀 자신이 내포하고 있던 것이었겠지. 늦건 빠르건 그와 똑같은 비극이 일어났을 게야. 그녀의 인생은 리스크를 안고 있었어. 그들은 단지 거기에 자극을 주었을 뿐이야. 타이머의 설정을 변경하듯이.”





아오마메는 말했다. “복수만큼 코스트는 높고 이익은 생기지 않는 일은 없다, 고 누군가 말했죠.”

“윈스턴 처칠이야. 다만 내 기억으로는 그는 대영제국의 예산부족을 변명하기 위해 그같은 발언을 했지. 거기에는 도의적인 의미는 없었어.”





덴고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조금 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3층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에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수상한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수상한 자동차도 서 있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이 어딘지 심심한 주택가의 어딘지 심심한 풍경이 그곳에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구부러진 나뭇가지가 달린 가로수는 회색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 가드레일은 여기저기 우그러졌고, 녹슨 자전거 몇 대가 길가에 방치되어 있었다. ‘음주운전은 인생의 파멸로 가는 일방통행’이라는 경찰 표어가 담벼락에 나붙어 있었다(경찰에는 표어를 만드는 전담 부서가 따로 있는 걸까?). 심술궂게 생긴 노인이 머리가 나빠 보이는 잡종견을 산책시키고 있었다. 머리가 나빠 보이는 여자가 못생긴 경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못난이 전봇대가 심술궂은 전선을 공중 여기저기로 뻗고 있었다. 세계가 ‘비참한 것’과 ‘기쁨이 결여된 것’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제각각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작은 세계의 한없는 집적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창밖의 풍경은 보여주고 있었다.





"1Q84년." 아오마메는 말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1Q84년이고 그건 진짜 1984년이 아니다, 그런 말인가요?"

"무엇이 진짜 세계냐 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문제야." 리더라고 불리는 사내는 엎드려 누운 채 그렇게 말했다. "그건 결국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되지. 하지만 이곳은 진짜 세계야. 그건 틀림없어. 이 세계에서 맛보는 고통은 진짜 고통이야. 이 세계에 찾아오는 죽음은 진짜 죽음이지. 흐르는 건 진짜 피야. 이곳은 가짜 세계가 아니야. 가상의 세계도 아니지. 형이상학적인 세계도 아니야. 그건 내가 보증하지. 하지만 이곳은 자네가 알고 있는 1984년이 아니야."





아오마메는 거실 카펫 위에서 늘 하던 스트레칭을 했다. 한 시간 동안, 그녀는 근육을 혹사했다. 합당한 고통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온몸의 근육을 하나하나 순서대로 소환하여 세세하고도 삼엄하게 심문했다. 그러한 근육의 이름과 역할과 성질은 아오마메의 머릿속에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그녀가 놓치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땀이 쏟아지고 호흡기와 심장이 최대치로 활동하고 의식의 채널이 전환되었다. 아오마메는 혈액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고 내장이 말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수신했다. 얼굴 근육을 크게 움직여 다양한 표정을 만들면서 그 메시지를 곱씹었다.





틀림없다. 달은 두 개다.

하나는 옛날부터 있던 원래의 달이고, 또 하나는 훨씬 자그마한 초록색 달이다. 그것은 원래의 달보다 모양이 삐뚜름하고 밝기도 덜했다. 얼결에 떠맡은,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못생긴 먼 친척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부정할 수 없이 그곳에 분명히 존재했다. 환영도 아니고 착시도 아니다. 실체와 윤곽을 가진 천체로서 확실하게 그곳에 떠 있었다. 비행기도 아니고 비행선도 아니고 인공위성도 아니다. 누군가 장난 삼아 종이로 만든 연극 소품도 아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바윗덩어리다. 오랜 숙고 끝에 찍은 구두점처럼, 혹은 숙명이 내려준 몸의 점처럼, 그것은 말없는 가운데 흔들림 없이 밤하늘 한곳에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개의 달의 모습은 덴고에게 현기증과 같은 어지러움을 몰고 왔다. 신경의 균형이 손상된 것 같다. 그는 미끄럼틀 위에 앉아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그것을 지그시 견뎠다. 주위의 인력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듯한 감촉이 있었다. 어디선가 바닷물이 차오르고 어디선가는 바닷물이 빠지고 있다. 인간은 insane과 lunatic 사이를 무표정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





다시 한번 남자를 잘 봐야 해. 하지만 왠지 눈의 초점을 맞출 수가 없다. 어떤 힘이 작용해 좌우의 시력이 돌연 크게 달라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린다.

운전기사의 말투에는 뭔가 은근히 걸리는 게 있었다. 늘 중요한 것 하나는 말하지 않고 남겨두는 듯한 말투다. 예를 들면(어디까지나 예로서) 도요타 자동차는 차음에 관해서라면 아무 불만이 없지만 그밖의 다른 뭔가에 관해서는 문제가 있다, 라는 듯한. 그리고 말을 마친 뒤에는 함축적인 작은 침묵 덩어리가 남았다. 차 안의 좁은 공간에 그것은 가공의 미니어처 구름처럼 덜렁 떠 있었다. 





정면에서 가만히 얼굴을 관찰하면 좌우 귀의 모양과 크기가 상당히 다르다는 걸 알아볼 수 있다. 왼쪽 귀가 오른쪽 귀보다 훨씬 크고 모양이 비뚤어졌다. 하지만 그걸 알아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귀는 대개 머리칼 아래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한일자로 꾹 다문 입술은 매사에 쉽게 섞여들지 않는 성격을 보여준다. 작고 갸름한 코, 약간 도드라진 광대뼈와 넓은 이마와 길고 직선적인 눈썹도 그런 성향에 저마다 한 표씩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단정한 달걀형 얼굴이다. 저마다 취향이 다르다 할지라도, 일단 미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얼굴 표정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단단히 닫힌 입술은 웬만해서는 미소 한 번 짓지 않는다. 두 눈은 우수한 갑판 감시원처럼 빈틈없이 차갑다. 덕분에 그녀의 얼굴이 사람들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일은 거의 없다. 대체로 사람들의 주의나 관심을 끄는 것은 가만히 있을 때의 얼굴 생김새보다는 오히려 표정 변화의 자연스러움이나 우아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오마메의 얼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일단 눈을 떼면 그녀가 어떤 얼굴이었는지 떠올리지 못한다. 개성적인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도 세세한 부분의 특징이 왠지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교묘하게 몸을 숨기는 곤충을 닮았다. 색깔과 모습을 바꾸어 배경 속에 숨어드는 것,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 간단히 기억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아오마메가 추구하는 것이었다. 

“나도 읽어봤어.” 고마쓰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말했다. “자네에게서 전화 받고 곧바로 원고를 읽었어. 아, 그런데 지독히 서툴더라고. 조사助詞 사용도 엉망이고,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는 문장도 있어. 소설 쓰기 전에 문장 쓰는 법을 기초부터 다시 공부하는 게 좋을 거 같아.”

  “하지만 끝까지 읽어버렸다, 그렇죠?”

  고마쓰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열리는 일 없는 서랍의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낸 듯한 웃음이었다. “그건 그래. 분명 자네 말이 맞아. 끝까지 읽었지. 나도 놀랐어. 신인상 응모작을 내가 끝까지 다 읽다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지. 게다가 부분적으로 다시 읽어보기까지 했어. 이건 뭐, 행성직렬 현상만큼이나 희귀한 일이야. 그건 인정할게.”





가는 철사처럼 뻣뻣한 머리칼은 이마 윗부분이 슬슬 희끗희끗해지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칼은 귀를 덮을 정도다. 신기하게도 그 머리 길이는, 일주일 전쯤 이발소에 갔어야 하는데, 라는 정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덴고는 알 수가 없다. 이따금 겨울 밤하늘에서 별이 반짝이듯이 안광이 예리해진다. 무슨 겨를엔가 일단 입을 꾹 다물면 달의 뒷면에 박힌 바위처럼 한없이 침묵한다. 그럴 때의 그는 표정도 거의 사라지고 체온조차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저 교단에 서서 수학 문제 풀이를 가르치면 된다. 그리고 숫자라는 도구를 사용한 순수한 관념의 행사는 덴고가 천성적으로 잘하는 일이었다.





“잘 들어봐.” 고마쓰는 커피 스푼을 손에 들고 지휘자가 지휘봉으로 독주자를 지정하듯이 그것을 덴고에게 향했다. “이 후카에리라는 아이는 뭔가 특별한 것을 갖고 있어. 그건 「공기 번데기」를 읽어보면 알아. 이 상상력은 평범한 게 아니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문장력은 시원찮아. 아주 조잡하기 짝이 없어. 허나 자네는 문장을 잘 써. 소질도 있고 감각도 있어. 덩치는 크지만 문장은 지적이고 섬세해. 필력도 확실하고. 그런데 후카에리와는 반대로, 무엇을 써야 할지 아직 제대로 갈피를 못 잡고 있어. 그래서 때때로 이야기에 심지가 보이지를 않아. 자네가 원래 써내야 할 이야기는 분명 자네 안에 있을 거야. 그런데 그것이 깊은 구멍 속으로 도망쳐 틀어박혀버린 겁 많은 작은 동물처럼 좀체 밖으로 나오질 않아. 동굴 깊숙이 숨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밖으로 나오질 않는 데야 잡을 도리가 없지. 내가 시간을 들이는 게 좋겠다고 말한 건 그런 의미야.”





“그렇게 쉽게는 들키지 않아. 나는 마음만 먹으면 아주 용의주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어. 그리고 설령 들켰다고 해봤자 회사 따위는 기꺼이 그만두지. 어차피 윗사람에게 미운 털이 박혀서 내내 찬밥 신세였어. 일자리쯤이야 금세 또 구할 수 있어. 내가 말이지, 무슨 돈을 바라고 이런 일을 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문단을 조롱해주자는 거야. 어둠침침한 동굴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서로 칭찬하고 상처를 핥아주고 서로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한편으로는 문학의 사명이 어쩌고저쩌고 잘난 소리를 주절거리는 한심한 자들을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어. 시스템의 뒤통수를 치고 들어가 철저히 조롱해줄 거라고. 유쾌할 거 같지 않아?”





비상계단은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지 군데군데 거미줄이 있었다. 조그만 검은 거미가 그곳에 달라붙어 조그만 사냥감이 걸려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거미로서는 애당초 참을성이라는 의식도 없을 것이다. 거미는 집을 짓는 것 외에 특별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저 거기 가만히 붙어 있는 것 말고는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자리에 붙어 계속 사냥감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수명이 다하면 허옇게 말라죽는다. 모든 것은 유전자에 일찌감치 설정되어 있는 일이다. 거기엔 망설임도 없고 절망도 없고 후회도 없다. 형이상학적인 의문도, 도덕적 갈등도 없다. 아마도.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스타킹을 엉망으로 만들며 별 볼 것도 없는 산겐자야 근처에서 수도고속도로 3호선의 영문 모를 비상계단을 홀로 내려간다. 좀스러운 거미의 둥지를 털어내며, 어처구니없는 베란다의 너절한 고무나무를 바라보며.





심장의 고동이 들린다. 그 고동에 맞춰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도입부의 팡파르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려퍼진다. 부드러운 바람이 보헤미아의 초록빛 들판을 소리 없이 건너간다. 그녀는 자신이 둘로 분열되어 있는 것을 안다. 그녀의 반은 매우 쿨하게 죽은 자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나머지 반은 지독히 겁에 질려 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당장 이 방에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곳에 없다. 나는 동시에 두 개의 장소에 있다. 아인슈타인의 정리에는 반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살인자의 선禪이다.





고마쓰에게 수도 없이 말했었다. 한밤중에는 제발 부탁이니 전화하지 말아달라고 분명하게 당부했다. 수확 전의 논밭에 메뚜기 떼는 제발 보내지 말아달라고 신께 기도하는 농부처럼. “알았어. 이제 밤중에는 전화 안 할게”라고 고마쓰는 말한다. 하지만 그런 약속은 그의 의식에 충분히 뿌리를 내리지 않기 때문에 한 차례 비가 내리면 깨끗이 어딘가로 휩쓸려가버린다.





덴고는 방금 사온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주술에 대한 책이다. 일본 사회에서 주술이 어떠한 기능을 담당해왔는지 논하고 있다. 주술은 고대의 커뮤니티에서 중요한 역할을 펼쳐왔다. 사회 시스템의 미비점이나 모순을 메우고 보완하는 것이 주술의 역할이었다. 꽤 즐거워 보이는 시대다.





“수열 강의를 할 때는 좀더 정열적이 될지도 모르는데.” 덴고는 말했다. “고등학교 수학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수열을 좋아하거든.”

“수열을 좋아해요.” 후카에리는 다시 물음표 없이 물었다.

“내게는 바흐의 평균율 같은 거야. 싫증나는 일이 없어. 항상 새로운 발견이 있지.”





덴고는 말했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언어를 사용하여 내 주위의 풍경을 내게 보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환해나가. 즉 재구성을 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나라는 인간이 이 세계에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그건 수학의 세계에 있을 때와는 상당히 다른 작업이야.”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후카에리는 말했다.

“아직 제대로 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덴고는 말했다.

후카에리는 덴고의 설명을 납득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갔을 뿐이다. 그리고 마치 스트로로 빨듯이 와인을 조금, 소리도 없이 마셨다.

“내가 보기에는 너 역시 결과적으로는 그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어. 네가 바라본 풍경을 너의 언어로 바꾸어 재구성하지. 그렇게 너라는 인간의 존재위치를 확인하고 있어.” 덴고는 말했다.

후카에리는 와인 잔을 든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의견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하나의 형식으로 남겼어. 작품으로.” 덴고는 말했다. “만일 그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건 객관적 가치를 가진 문학작품이 돼.”





“고마워요. 됐어요, 이제.” 아오마메는 바텐더에게 말했다. 바텐더는 직업적인 웃음을 적절한 문장부호처럼 떠올리더니 자기 일로 돌아갔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당신은 분명코 대머리야,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만일 인구조사에 대머리라는 항목이 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거기에 체크가 될 거라고. 천국에 간다면 당신은 대머리 천국에 갈 거고, 지옥에 간다면 당신은 대머리 지옥에 갈 거라고. 알았어? 알았으면 사실을 외면하는 건 관둬. 자, 가자구. 당신은 대머리 천국으로 직행하는 거야, 이제부터.





덴고가 실제로 고쳐 쓰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낮 열두시 반이었다. 「공기 번데기」 원고의 처음 몇 장을 나누기 좋은 곳까지 원문 그대로 워드프로세서 화면에 타이핑했다. 우선 이 부분을 납득할 만한 수준이 될 때까지 고쳐보자. 내용 자체에는 손을 대지 말고 문장만 철저히 수정해나간다. 아파트 리모델링 공사와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구조는 그대로 둔다. 구조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수도 설비의 위치도 변경하지 않는다. 그 이외의 교환 가능한 것—마룻바닥과 천장, 벽이나 칸막이—을 뜯어내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나간다. 나는 모든 것을 위임받은 솜씨 좋은 목수다, 라고 덴고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해진 설계도 같은 건 없다.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직감과 경험을 구사해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한 번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는 좀더 설명을 붙여 문장의 흐름을 알아보기 쉽게 했다. 군더더기와 중복된 표현은 없애고, 충분히 말하지 않은 부분은 보충했다. 군데군데 문장의 순서, 어절의 순서를 바꾸었다. 형용사나 부사는 원래부터 극단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 특징을 존중하면서도 뭔가 수식하는 말이 필요하다고 감지했을 때는 적절한 말을 골라 넣었다. 후카에리의 문장은 전체적으로 미숙했지만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이 분명하게 갈렸기 때문에 취사선택이 예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유치한 탓에 이해하기 어렵고 쉽게 읽히지 않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유치하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눈에 확 들어오는 신선한 표현도 있었다. 전자는 미련 없이 포기하고 걷어낸 뒤에 다른 것으로 바꾸고, 후자는 그대로 살려두면 된다.

고쳐 쓴 결과, 원고의 양은 대략 두 배 반 정도로 늘어났다. 지나치게 쓴 곳보다 보충해야 할 곳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앞뒤를 맞춰서 고쳐 쓰다보니 전체적인 분량은 아무래도 늘어났다. 어떻든 처음 원고가 구멍 숭숭인 것이다. 문장의 앞뒤가 맞아떨어지고 시점이 안정되고, 그만큼 읽기는 쉬운 글이 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이 어딘지 모르게 뻑뻑하다. 논리가 지나치게 겉으로 드러나서 원래 원고가 갖고 있던 날카로운 맛이 약해졌다.

다음에 할 일은 그 늘어난 원고에서 ‘없어도 무방한 부분’을 덜어내는 작업이다. 쓸데없는 군살을 모조리 쳐나갔다. 덜어내는 작업은 덧붙이는 작업보다 훨씬 간단하다. 이 작업으로 분량이 대략 70퍼센트까지 줄었다. 일종의 두뇌게임이다. 늘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늘리기 위한 시간대가 설정되고, 그다음에는 깎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깎아내기 위한 시간대가 설정된다. 그같은 작업을 번갈아가며 집요하게 거듭하는 사이에 진폭이 점점 작아져서 글의 분량은 자연스럽게 적정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더이상 늘릴 수 없고 더이상 깎아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아가 지워지고 쓸데없는 수식이 떨어져나가고, 빤히 보이는 논리는 깊숙한 뒷방으로 물러난다. 그런 작업은 덴고의 천성적인 특기였다. 타고나기를 기술자로 타고난 것이다. 먹잇감을 찾아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카로운 집중력을 가졌고, 물을 운반하는 당나귀처럼 참을성이 강하며, 게임의 룰에는 한없이 충실했다.

후카에리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의도를 가진 침묵이 아니었다. 단순히 덴고의 질문의 목적을, 또한 그런 발상 자체를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질문은 그녀의 의식의 영역 어디에도 착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의미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허무 속으로 영원히 빨려들어간 것이리라. 명왕성 옆을 그대로 지나가버린 고독한 행성탐사로켓처럼.





노부인은 언제나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지워져버릴 정도의 음량이다. 그래서 상대는 항상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오마메는 이따금 손을 내밀어 볼륨 스위치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물론 볼륨 스위치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다마루는 미소를 연상시키는 작은 주름을 입가에 만들었다. “어딘가에 반드시 끝은 있는 법이야. ‘여기가 끝입니다’라고 일일이 적어놓지 않았을 뿐이지. 사다리의 가장 높은 단에 ‘여기가 끝입니다. 이보다 위쪽에는 발을 얹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어?”

아오마메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 똑같아.” 다마루는 말했다.

“상식을 발휘하고, 눈을 똑똑히 뜨고 있으면 어디가 끝인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아오마메가 물었다.

다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알지 못하더라도……” 그는 손가락으로 낙하하는 시늉을 했다. “어쨌든 그곳이 끝이야.”





아오마메는 자리에서 일어나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요트파카의 후드를 바로잡았다. 다마루도 일어섰다. 키는 결코 크지 않지만 그가 일어서면 마치 그곳에 돌벽이 생긴 것 같다. 항상 그 긴밀한 질감에 놀란다.

1Q84년. 이 새로운 세계를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아오마메는 그렇게 정했다.

Q는 question mark의 Q다. 의문을 안고 있는 것.

그녀는 걸으면서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좋든 싫든 나는 지금 이 '1Q84년'에 몸을 두고 있다. 내가 알고 있던 1984년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1Q84년이다. 공기가 바뀌고 풍경이 변했다. 나는 이 물음표 딸린 세계의 존재양식에 되도록 빨리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숲에 내던져진 동물과 똑같다. 내 몸을 지키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장소의 룰을 한시라도 빨리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눈은 이따금 가늘어지고 다시 커졌다. 사진가가 렌즈의 조리개를 조절할 때처럼.





어쨌든 아오마메는 고환의 공격 방법을 열 가지 종류쯤 터득하고 있었다. 남자 후배들에게 보호구를 채우고 실제로 시도해보기도 했다. "선배의 불알차기는 보호구를 해도 지독히 아파요. 제발 좀 봐주세요"라고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아오마메는 만일 필요하다면 그 세련된 기능을 실천에 옮기는 데 눈곱만큼도 망설임이 없다. 혹시라도 나를 공격하는 무모한 놈이 있다면, 그때는 세계의 종말을 생생하게 보여주리라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왕국의 도래를 똑똑히 직시하게 해주리라. 한 방에 저 남반구로 날려보내 캥거루랑 왈라비와 함께 죽음의 재를 듬뿍 뒤집어쓰게 해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그르칠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노부인은 말했다. "무엇 하나도. 그건 알고 있지요?"

"알고 있습니다." 아오마메는 말했다. 그 말이 맞다고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자신을 그르칠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는 조용히 뒤에 남는다. 와인 병 밑바닥의 침전물처럼.





"하지만 저는 이런 일로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그런 마음은 잘 압니다. 하지만 그 한심한 사내들이 제대로 이동해준 덕분에 번거로운 이혼소송도 없고 친권을 둘러싼 다툼도 없어요. 남편이 언제 찾아와 얼굴이 비뚤어질 만큼 폭력을 휘두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필요도 없지요. 생명보험금도 들어오고 유족 연금도 지급됩니다. 당신에게 건네는 이 돈은 그 사람들이 보내준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해줘요. 당신은 분명코 올바른 일을 했어요. 하지만 그건 무상의 행위여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잘 모르겠어요." 아오마메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천사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니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행동이 순수한 마음에서 나왔다는 건 잘 압니다. 그래서 돈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은 그 심정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란 건 또 그것대로 위험한 것이랍니다. 살아 있는 몸을 가진 인간이 그런 걸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마음을 기구氣球에 닻을 매달듯이 단단히 지상에 잡아둘 필요가 있어요. 그러기 위한 것이에요. 옳은 일이라면, 그 마음이 순수한 것이라면 어떤 일을 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지요. 내 말 알겠어요?"





"하지만 아오마메 씨." 아유미는 말했다. "내 생각엔 말야, 이 세상이라는 건 이치가 통하지도 않고 친절한 마음도 너무 부족한 거 같아."

"그럴지도 모르지." 아오마메는 말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교환할 수는 없어."

"반품 유효기간은 진즉에 지났지." 아유미는 말했다.

"영수증도 내다버렸고."

"그러게."

"하지만 괜찮아. 이런 세상 따윈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려." 아오마메는 말했다.

"그런 거, 굉장히 재미있을 거 같아."

"그리고 왕국이 임하지."

"어서 왔으면." 아유미가 말했다.

"이봐 덴고, 지금 잠깐 힘겨운 건 잊어 버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자고. 이런 건 평생 동안 그리 자주 찾아오는 일이 아니야. 화려한 피카레스크 소설의 세계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악의 냄새를 흠씬 즐겨. 급류타기를 즐기자는 말이야. 그리고 폭포 위에서 떨어질 때는 함께 요란하게 떨어져보자고."





몸을 숙이면 수직으로 떨어지는 긴 머리칼 속으로 얼굴이 숨었다.





"그렇답니다. 우리는 몹시 미묘하고 가느다란 외줄 위를 걷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현재부터 한참 과거까지. 물론 거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에요. 한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완전히 알아낸다는 건 어느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마 신이라도."

"악마라도." 아오마메는 말했다.

"악마라도." 노부인은 되풀이했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소녀시절에 종교와 관련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걸 알아요. 당신 부모님은 열성적인 '증인회' 신자였고 지금도 그렇지요. 그리고 당신이 신앙을 버린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아요. 그것이 지금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지요."

아오마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인은 말을 이었다.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증인회'는 제대로 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어린아이일 때 큰 부상을 입었거나 수술이 필요한 병에 걸렸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지 몰라요. 성서 원문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교리를 내세워 생명 유지에 필요한 수술까지 부정하는 종교는 컬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정한 선을 뛰어넘은 도그마의 남용이에요."

전철역까지 걸어가면서 아오마메는 세계의 기묘함에 대해 생각했다. 노부인의 말처럼 만일 우리가 단순히 유전자의 탈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째서 우리 인간 중 적지 않은 자들이 그토록 기묘한 형태의 인생을 살아가는 걸까. 우리가 심플한 인생을 심플하게 살고, 쓸데없는 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생명유지와 생식에만 힘을 쏟으면, DNA를 전달한다는 그들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될 게 아닌가. 인간들이 복잡하게 굴절된, 때로는 너무나 이상하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 유전자에게 과연 어떤 메리트가 있다는 것일까.

초경 전의 소녀를 범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남자, 기골이 장대한 게이 경호원, 수혈을 거부하며 스스로 죽어가는 신앙심 깊은 사람들, 임신 육 개월에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는 여자, 문제 있는 사내들의 뒷덜미에 날카로운 침을 꽂아 살해하는 여자,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 남자를 증오하는 여자들. 그런 사람들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과연 유전자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유전자들은 그런 굴절된 에피소드를 컬러풀한 자극으로서 실컷 즐기고, 혹은 뭔가 또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일까.

아오마메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아는 것은 자신은 이제 또다른 인생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것 정도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인생을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반품하고 새 것으로 바꿔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기묘한 것일지라도, 일그러진 것일지라도, 그것이 나라는 탈것의 존재방식이다.





덴고가 한밤중에 소설을 쓰는 건 드문 일이다. 그는 바깥이 환할 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바깥을 돌아다니는 때에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위가 어둠에 잠겨 깊은 고요 속에 빠져 있는 시간에 글을 쓰면 문장은 이따금 지나치게 농밀해진다. 밤에 쓴 부분은 한낮의 환한 빛 속에서 다시 처음부터 고쳐 써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런 수고를 들이느니 처음부터 환한 시간에 글을 쓰는 게 낫다.

하지만 오랜만에 한밤중에 볼펜을 들고 글을 쓰고 있자니 머리가 부드럽게 회전했다. 상상력이 팔다리를 펴고 이야기가 자유롭게 움직였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또다른 아이디어로 흐르듯이 이어져나갔다. 그 흐름이 끊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볼펜 끝은 쉼 없이 흰 종이 위에 고집스런 소리를 내며 자리를 옮겨갔다. 팔이 아파오면 볼펜을 내려놓고 피아니스트가 가상의 음계를 연습하듯이 오른손 손가락을 허공에서 움직였다. 시곗바늘은 한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기할 만큼 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시의 상공을 뒤덮은 두툼한 솜 같은 구름이 쓸데없는 소리들을 흡수해버린 모양이다.





덴고는 자신의 뇌에 대해 생각했다. 뇌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다.

인간의 뇌는 최근 이백오십만 년 동안 그 크기가 약 네 배로 증가했다. 무게만으로 보면 뇌는 인간의 몸무게의 2퍼센트를 차지할 뿐이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체의 총 에너지의 약 40퍼센트를 소비한다(그가 지난번에 읽은 책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뇌라는 기관의 그러한 비약적인 확대에 의해 인간이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간과 공간과 가능성의 관념이다.

시간과 공간과 가능성의 관념.

시간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덴고는 알고 있다. 시간 그 자체는 균일한 성분을 가졌지만, 그것은 일단 소비되면 일그러진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떤 시간은 지독히 무겁고 길며 어떤 시간은 가볍고 짧다. 그리고 떼떼로 전후가 바뀌거나 심할 때는 완전히 소멸되기도 한다. 있을 리 없는 것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인간은 아마도 시간을 그처럼 제멋대로 조정하면서 자신의 존재의의 또한 조정하는 것이리라. 다르게 말하면, 그같은 작업이 더해짐으로써 가까스로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신이 어렵사리 지나온 시간을 순서대로 고스란히 균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면 인간의 신경은 도저히 그것을 견뎌내지 못할 게 틀림없다. 그런 인생은 아마도 고문이나 다름없으리라. 덴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뇌의 확대에 의해 시간성이라는 관념을 획득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것을 변경하고 조정해가는 방법 또한 몸에 익혔다. 인간은 시간을 쉴새없이 소비하면서 그것과 병행하여 의식에 의해 조정된 시간을 쉴새없이 재생산한다. 이건 보통 작업이 아니다. 뇌가 신체의 총 에너지의 40퍼센트를 소비한다고 일컬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기억에는 생생한 현실감이 수반되어 있다. 분명한 감촉이 있고 무게가 있고 냄새가 있고 깊이가 있었다. 그것은 폐선에 달라붙은 굴처럼 그의 의식의 벽에 강력하고 단단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씻어내려 해도 그것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했다.

적확성의 추구는 덴고가 천성적으로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올바른 구두점을 찍거나 최단거리의 수식을 찾아내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제대로 설명은 할 수 없으나 고마쓰가 걸어오는 전화는 언제라도 그의 전화라는 것을 안다. 벨이 울리는 낌새부터가 특이한 것이다. 문장에 문체가 있듯이 그가 걸어오는 전화는 독특한 방식으로 벨이 울린다.





"나도 왠지 궁금해서 그뒤에 개인적으로 좀더 조사해봤어. 하지만 조사할수록 이거 아무래도 수상쩍어. 종교단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인증도 받기는 했는데 종교적인 실체 같은 건 쥐뿔도 없어. 교의적으로 탈구축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종교적인 이미지를 죄 모아놓고 거기에 뉴에이지 정신, 멋들어진 아카데미즘, 자연회귀와 반자본주의, 오컬티즘이라는 조미료를 적당히 가미했어. 그냥 그거뿐이야. 실체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아니, 그보다 실체가 없다는 게 말하자면 이 교단의 실체인 거지. 매클루언적으로 말하자면 미디어가 곧 메시지인 거야. 그러는 게 쿨하다면 쿨하긴 하지."

"매클루언?"

"나도 책은 좀 읽는 편이라고." 아유미는 볼멘소리를 했다. "매클루언은 시대를 앞서갔어. 한때 유행이 되는 바람에 어쩐지 가볍게 보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사람이 하는 말은 대충 옳아."

"그러니까 패키지가 내용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 얘기?"

"그렇지. 패키지의 특질에 의해 내용이 성립된다. 그 반대가 아니라."





"자기, 영어의 lunatic루나틱하고 insane인세인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 그녀가 물었다.

"둘 다 정신에 이상을 일으킨다는 형용사지. 자세한 차이까지는 모르겠어."

"insane은 아마 천성적으로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게 바람직하다는 거야. 그에 비해 lunatic은 달에 의해, 즉 luna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신을 빼앗긴 것. 19세기의 영국에서는 lunatic이라고 판정받은 사람은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그 죄를 한 등급 감해줬어. 그 사람의 책임이라기보다 달빛에 홀렸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법률이 실제로 존재했어. 즉 달이 인간의 정신을 어긋나게 한다는 걸 법률적으로도 인정했던 거야."

바야흐로 평가 시즌이었다. 작년 한해 동안 한 일에 대한 성적표를 받는 시간. 평가 등급은 총 다섯 등급이었는데, 최상위 등급이 O, 그다음 순서대로 I, M, B 그리고 마지막 N, 이렇게 나뉘었다. 최상위와 최하위를 제외하고는 상대평가여서 누군가는 반드시 M이나 B를 받아야 하는 구조였다. 각 등급의 알파벳은 이런 뜻이었다.

Outstanding: 특출함

Incredible: 뛰어남

Meet requirement: 요구 충족

Below requirement: 요구 이하

Need supplement: 보충 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바꿔 불렀다. 아무래도 이쪽이 훨씬 직관적이었다.

O: 오짐

I: 인정

M: 무난

B: 별로

N: 나가 (p.22)

우리 회사만의 정설이 있다. 식후 커피가 스타벅스면 순수한 동료, 커피빈이면 썸이다.

정설은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사내의 어떤 인물과 왠지 가깝고 특별한 사이가 된 것 같다고 가정해 보자. 메신저로 업무를 주고받다가 어느새 일과 관련 없는 사적인 연락이 오가고, 자연스럽게 회사 근처에서 점심도 몇번 따로 먹었는데 아직 저녁 약속까지는 가지 않았을 때. 좀더 발전 가능한 관계인지 아니면 착각일 뿐인지 헷갈릴 때. 점심 외식 후의 커피 타임이 스타벅스에서 이루어졌다면 마음을 접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고, 커피빈이었다면 조금 더 진도를 나가도 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다음 약속은 점심이 아닌 저녁으로 질러봐도 괜찮을지도.

(...) 커피 브랜드에 별다른 함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스타벅스는 회사 건물 바로 맞은편에 하나, 그리고 두 블록 건너 식당이 밀집해 있는 곳에 2층짜리가 하나 더 있다. 둘 다 사무실에서 접근성이 좋았다. 커피빈은 2층짜리 스타벅스에서 한 블록을 더 지난 다음 작은 길을 한번 더 건너는 수고를 해야 나타났고, 살짝 외진 곳에 있다. 잠시라도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면, 굳이 맛도 크게 다르지 않은 프랜차이즈 커피 한잔 마시는데 그곳까지 갈 이유는 없었다. 비록 5분 차이의 거리라고 해도 말이다. 5분은 점심시간 전체의 8.3333...%에 해당할 정도로 소중한 시간이니까. 게다가 탁 트인 스타벅스와는 달리, 이곳의 커피빈은 테이블 사이에 칸막이가 세워진 자리가 네칸이나 마련되어 있어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했다. 우리는 이곳을 '기차 칸'이라고 불렀고, 입구와 가까운 쪽에서부터 1호 칸, 2호 칸, 3호 칸, 4호 칸이라고 이름 붙였다. (p.35)

참 이상했다. 소리를 지르고 난 뒤에는 곧바로 웃음이 따라나왔다. 비록 그게 헛웃음일지라도 말이다. 비명과 웃음은 어쩌면 한 세트일지도 몰랐다. 한차례 더 강풍이 불었고 지송이와 내 사원증의 플라스틱 케이스가 바람에 날려 서로 부딪치면서 달그락 소리를 냈다. 우리는 또 한 번 비명과 웃음의 사이클을 반복했다. 은상 언니가 몸을 잔뜩 움츠리며 한탄했다.

"아, 좀 걷자고! 뛰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걷기만 하겠다는데 그게 왜 이렇게 힘들어?"

지송이가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꾹 누르고 인상을 잔뜩 쓴 채 말했다.

"꼭 그것 같아. 게임하다가 디버프 걸리면 걸음 느려지는 거. 앞으로 전진하는 방향 키를 아무리 눌러도 발에 모래주머니 단 것처럼 무겁게 천천히 나가는 그런 거."

"완전...... 우리 인생이잖아?"

내가 말했고, 

"어휴,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벗어나야지."

언니가 대답했다.

"어떻게?"

내가 다시 묻자 언니가 팔짱을 더 세게 꼈다.

"디버프 해지 스킬을 써야지."

바람이 한 번 더 불었고, 한 번 더 비명을 질렀고, 한 번 더 와르르 웃었다. (p.57)

언젠가는 이직해볼 요량으로 취업 포털 사이트에 가입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보려면 재직 중인 회사의 후기를 먼저 작성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기브 앤드 테이크. 공짜 점심은 없다. 정보를 얻으려면 정보를 제공해야 했다.

나는 '우리 회사의 장점'이라는 항목을 빈칸으로 남겨두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단점은 서식란을 꽉 채울 정도로 한 바닥 써놨기 때문에 양심상 장점도 한두개는 써야 할 것 같았다. 아...... 너무 어렵다. 난제다, 난제...... 가만있어보자...... 아......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날까? 그래도 하나쯤은 있을 텐데...... 그래! 나는 겨우 하나를 생각해냈다.

과자 무료 제공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버튼을 눌렀더니 '장점은 최소 10자 이상 입력해주세요'라는 알림창이 떴다. 나는 한 단어를 더 추가했다.

과자 무료 제공(무제한)

과자 하나는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 마론제과의 최대 장점이었다. (p.142)

은상 언니는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그러잡고 끊어내기라도 할 기세로 세차게 흔들었다. 뒤이어 "이걸 왜 아직도 매고 있는 거야?"라면서 공연히 버럭,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화내더니 머리 위로 끈을 올려 사원증을 빼냈다. (...) 입사 당시 언니가 제출했던 증명사진이 인쇄된 사원증. 사내 인트라넷의 조직도와 메신저에도 일괄 적용되는 바로 그 사진. 우리 회사는 그 사진을 절대 바꿔주지 않았다. 퇴사하고 재입사를 하지 않는 이상, 입사할 때 제출한 사진이 영원히 따라다녔다. 그래서 다른 부서의 사람들과 사내 메신저로만 이야기하다가 실제로 만났을 때 너무 달라져버린 얼굴 때문에 못 알아보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 약속이라도 한 듯 살이 찌곤 했는데, 통 때문에 그 격차가 더욱 심했다. 하지만 단순히 체중이 불고 얼굴선이 무너지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그 사진과 실제 얼굴 사이에 존재했다. 그 간극을 대체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쩐지 휑한 공간감이 고스란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얼굴. 그건 살이 조금 찐 나도, 조금 많이 찐 윤과장도, 안 찌고 단순히 늙기만 한 우리 팀장이나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의 회계팀장도 피해갈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자신에게 원래 있는지도 몰랐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빠져나간 자리. 그 흔적만이 남은 얼굴. 월급 받아 먹고사는 사람들의 얼굴. (p.162)

"우리 같은 애들은 어쩔 수가 없어."

우리, 같은, 애들. 난 은상 언니가 '우리 같은 애들'이라는 세 어절을 말할 때, 이상하게 마음이 쓰리면서도 좋았다. 내 몸에 멍든 곳을 괜히 한 번 꾹 눌러볼 때랑 비슷한 마음이었다. 아리지만 묘하게 시원한 마음. 못됐는데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만 못된 마음. 그래서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 (p.193)

지송이가 먹고 싶어 하던 신메뉴 피자를 배달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미트볼을 아낌없이 넣은 파스타 3인분을 만들었다. 그사이 둘이 쇼핑백에서 집들이 선물을 주섬주섬 꺼내놓았다. 지송이가 레드와인을, 은상 언니가 크리스털 와인잔을 사 왔다. 한 쌍씩 두 박스. 총 네 개였다. 언니의 선물이 너무 과한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났다.

"아니, 무슨 혼자 사는 집에 와인잔을 네 개나 사 왔어?"

"와인잔은 원래 쌍으로 팔아. 우리가 세 명인데 두 잔만 사 올 수는 없지 않겠냐? 오늘 하루 마시는 거래도 누구는 와인잔에 마시고 누구는 머그컵에 마시면 모양 빠지잖아."

언니가 와인잔을 박스에서 모두 꺼내고 완충재 포장을 벗겨냈다. 뒤이어 잔을 거꾸로 뒤집은 다음 바닥에 붙은 스티커를 조심스럽게 손톱으로 떼어내며 덧붙였다.

"그리고 원래 와인잔 같은 건 인원수보다 여유 있게 사는 거야. 얇아서 금방 깨져버리거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잔을 미리 씻어 놓겠다더니 지송이가 실수로 와인잔 하나를 깨뜨린 것이었다. 다행히 싱크볼 안에서 깨져서 파편이 많이 튀지는 않았지만 혹시 몰라 급히 지송이와 은상 언니에게 내 양말을 덧신기고, 청소기를 꺼내 돌리고, 바닥과 싱크대에 롤테이프 클리너를 꼼꼼히 여러 번 굴렸다. 지송이와 내가 우왕좌왕하며 깨진 와인잔의 흔적을 치우고 있는데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돌프가 그려진 양말을 신은 언니가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와인잔 세 개를 테이블 위에 나란히 줄 맞춰 세우면서 말했다.

"내 말 맞지? 뭐가 언제 깨질지 모른다니까. 이것 좀 봐. 와인잔이 하나, 둘 셋."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이제 딱 맞잖아." (p.273)

오랜만에 만난 은상 언니의 안색은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밝아졌고, 무엇보다 한결 생기 있었다. 눈동자가 말갛게 빛났고 눈매와 입매는 뭐랄까, 편안하고 개운해 보였다. 산뜻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피부가 몰라보게 반질반질해져 있었다. 누가 두 손가락으로 꿀이라도 찍어 쭈욱 발라놓은 것처럼, 관자놀이부터 광대뼈까지 사선으로 길게 광이 났다. 언니가 서 있는 자리가 천장에 달린 레일 조명을 곧바로 받는 자리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언니의 옆얼굴에 고여 있는 빛은 어쩐지 외부로부터 와서 반사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확실히 뭔가 달랐다. 반사가 아닌 발광. 문자 그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얼굴 안쪽에 무언가를 환히 켜둔 것 같은 빛. 그건 분명, 안에서부터 시작되어 바깥으로 배어져나온 윤기였다. (p.302)

나를 수요일마다 속수무책으로 그 자주색 오토바이 앞에 붙들리게 만든 건 같은 반 친구의 손에 들려 있던 갓 뽑아낸 분홍색 솜사탕이었다. 윙윙대는 모터의 소음. 한 스푼 두 스푼 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색색깔의 가루들. 쉴 새 없이 뽑아져나오는 가락가락의 설탕과 그것들을 한 데 모아 휘휘 젓는 매혹적인 손놀림 끝에 자태를 드러낸 둥실한 솜사탕. 그러나 내 것은 아니었던 솜사탕. 커다랗고 보송보송한 솜사탕을 받아 들고 베어 먹기 직전, 너그러웠던 친구는 한 조각을 떼어 그걸 뚫어져라 보고 있던 내 입에 넣어주었다. 보드라운 솜사탕은 혀에 닿지마자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처음 맛보는 특유의 폭신하고 달콤한 감촉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자기 몫의 솜사탕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친구의 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 나는 단 한 번의 기회를 기다리며 거기 서 있었다. 보송한 한 조각. 달콤한 한 입이 내게 주어질 찰나의 순간을......

마침내 원심력에 튀어나온 솜사탕 한 조각이 둥실 떠올랐고 나는 재빠르게 뛰어올라 솜사탕 조각을 낚아채 입에 넣었다. 그걸 본 주변 아이들이 야유와 함성을 동시에 내뱉었다. 솜사탕을 사 먹을 수 없었던 나와 비슷한 아이들이 점점 몰려들었고 솜사탕 파편이 날아오를 때마다 너도나도 손을 뻗어 점프하기 시작했다. 솜사탕 아저씨는 나무젓가락을 휘두르며 다들 꺼지라고 소리쳤다. 저리 꺼지라고. 거지새끼들이라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와아 웃으며 학교 운동장 안으로 도망쳤지만 그때뿐이었고, 어느새 다시 슬금슬금 오토바이 앞으로 몰려들어 간절한 점프와 착지를 반복했다. 나는 무리 속에 섞여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실수로 떠오른 솜사탕을 낚아채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너무나 포근하고 달콤했기 때문에. 그 달콤함이 좀처럼 잊히지 않았기 때문에. (p.313)

각자도생. 이 말이 생의 ‘의지’에서 ‘생존’으로 둔갑된 것은 최근 일인 것 같다. 촛불혁명을 지나 코로나를 거쳐 획득된 체념의 정서. 공동체는 개인인 나에게 그 무엇도 (해결해)줄 수 없다라는 분명한 명제를 볼드 처리하게 만든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냉정한 현실인식 속에 기적 같은 (계급)변화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체념의 정서가 그 말에 전격 포진되어 있다. 인사처럼 생존합시다,를 꺼내도 상대방이나 나나 아무런 감정이 붙들려 나오지 않은 지금을 마냥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걸까? 사실 이런 질문이 건네는 순수한 사회 순응적 태도조차 비판되거나 비평되지 못하는 형국에서는, 그런 안부조차 ‘괜찮을 거라는’ 위로형 팬시 같은 것일 수도 있으려나. 





봄에서 여름, 가을에서 겨울로 향하는 동안 그녀는 도끼를 다루어야만 하는 궁지 속으로 천천히 내몰린다. 시간이 흘러 농장에서 키우던 새끼 양을 베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이유는 티그의 말,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점점 자라는 새끼 양이 대담하게 행동하며 티그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안락한 농장을 위협하는 존재는 제거되어야 한다. 도끼를 휘두르지 못하는 넬은 티그와 함께 새끼 양을 싣고 도축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수한 소의 사체와 날카로운 도구를 든 도축업자를 목도한다.

날에 베인 것처럼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건 그다음 장면이다. 그들은 잠시 후 상자에 담겨온 새끼 양의 살과 내장을 구워 먹는다. 애정을 쏟아 키웠던 양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녀는 고기를 맛있게 먹는다.

나는 육식 동물이야. 그녀는 이상할 만큼 초연한 태도로 생각했다.(247쪽)
    
스스로를 육식 동물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모든 것은 명료해진다. 그 뒤로 이어지는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단숨에 그녀의 미래를 그려낸다.

아마도 그녀는 이 농장 생활을 통해 술수에 능해질 것이다. 아마도 어둠의 일부를 흡수하게 될 것이다. 어둠은 결코 어둠이 아니라 지식일 수도 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조언을 구하러 오는 여성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응급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에게 연락할 것이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감정 따위는 생략해버리고 피에 흠뻑 젖고 냄새가 나는 의무를 무엇이든 완수할 것이다.(247쪽)
    
여러 개의 미래형 문장으로 이루어진 결말은 넬의 미래가 그녀와 전혀 달라 보이던 로블린의 삶을 따라 흘러갈 것을 암시한다. 언뜻 농장 생활에 완벽히 적응한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기묘하게도 낙관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나오는 마지막 문장. “그녀는 능숙하게 도끼를 다루게 될 것이다.”(247쪽)

도끼로는 스스로를 해할 수 없다. 도끼는 대상을 가까이서 겨냥해야만 하는 도구이니까. 내가 살기 위해 무언가는 반드시 상처받고 피를 흘린다.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의 작고 큰 도끼질의 연속이라는 것, 견고한 경계선을 가진 안전지대는 무수한 핏자국으로 이루어진 영토의 또 다른 말이라는 것을 그녀는 체득하게 된 게 아닐까. 먼 훗날 그녀는 어느 농부가 건넸던 조언을 다른 여성에게 돌려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기르지 말게.”
“살아 있는 놈들을 키우면 죽는 놈도 나올 걸세.”(216쪽)
    
그리고 이 담담한 예언 앞에서 나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삶의 이치라면 초연히 받아들여야 할까.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도끼를 쥐는 일이 두렵다면, 차라리 누군가 내 머리를 베어줬으면 하는 것은 그래서인가. 이 이상한 적응기는 나를 더 혼란하게 한다. 

‘은방울꽃은 영혼을 팔지 않는다.’

조향계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프랑스어로 뮤게(Muguet)라 불리는 은방울꽃은 연두색 줄기를 따라 방울을 닮은 꽃망울들이 교차로 매달려 있는 청초한 자태를 지녔다. 그 향기는 실로 화룡점정이다. 향으로 망막을 적실 수 있다면 나는 이슬이 맺힌 도톰한 우윳빛 꽃잎을 보았다 할 것이다. 은방울꽃은 5월을 전후로 한 달 남짓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개화한다. 고작 한 달이지만 만인을 자신의 향기에 매료시키기에 부족함 없는 기간이다. 지금껏 수많은 조향사들이 은방울꽃의 아름다움을 추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지만 현존하는 어떠한 기술로도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은방울꽃은 그의 영혼을 팔지 않는다. 다만 은방울꽃은 자신의 영혼을 꿈꾸게 만든다. 





소연은 셀 수 없이 많은 낮과 밤 동안 무감하게 육욕의 동물들을 그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선을 따고 채색을 넣었다. 소연이 그 욕망의 표정들을 해박하게 잘 알고 있어서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이 만화, 저 만화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구도를 패턴화해서 가져오기만 하면 그뿐이다. 수학 공식 같은 거였다.

수학 공식은 원리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받아들이고 암기하면 문제는 풀린다. 인수분해 공식은 인수분해 공식인 거다. 인수란 무엇이고 분해는 왜 하는지 궁금해하면 그때부터 인생이 복잡해진다. 





“네가 먼저 잘돼서 정말 좋아. 나에게는 예행연습이 된다고 할까?”

‘네가 먼저 잘돼서 좋다’는 그 말을 큐가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큐는 언젠가 자신에게도 그러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 순수한 예견에서 오는 자신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예견 뒤에 다른 방식의 꼬리표를 붙이고 있었다. 큐는 정말 배우가 될까?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언제? 도대체 언제쯤?

“좋은 것만은 아니야. 만날 때마다 술을 너무 마셔서.”
“한때 우리도 자주 마셨잖아.”
“그런 수준이 아니야. 거의 영혼을 세척하는 느낌으로 마셔.”

큐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긴 말인가. 나는 곧 그 말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다시 만난 일이 반가워서 그런 이유로 유난히 기분이 좋아서 평소보다 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연 작가님이 말해줬는데, 라이터스 헤븐과 액터스 헤븐이 있대.”
“그게 뭐야?”
“그러니까, 연 작가님이 말하길 그런 게 있다는 거야. 라이터스 헤븐이랑…….”

액터스 헤븐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윤 감독의 집에서 만난 날이었다. 연 작가는 술이 들어가자 흥이 올랐는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라이터스 헤븐과 액터스 헤븐.”
“네? 헤븐?”
“천국 말이에요.”
“알죠. 저 영어 나쁘지 않아요.”

연 작가는 풋, 웃더니 그 앞에 마주 앉은 나와 오겸을 차례로 가리켰다.

“라이터스 헤븐, 그건 내가 가야 할 곳이고, 엑터스 헤븐은 두 사람이 가야 할 곳이죠.”
“작가의 천국? 배우의 천국?”

오겸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입가로 천천히 가져가며 연 작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각자의 업마다 갈 수 있는 천국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천국에 가는 조건은 뭐예요?”
“작가라면 좋은 작품을 쓰고 배우라면 좋은 연기를 하는 거죠. 일생에 한 번이라도 그런 걸 해내면 천국행 티켓을 받는 거예요.”
“아무리 나쁜 일을 저질러도 작품이든 연기든 훌륭하게 해내면 천국에 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