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허연

 

 

 

 

 

 

몰락한 갱스터 이야기를 담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 <칼리토Calito's Way>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두들 어쩌다 지금의 자신이 되지...... (everybody ends up where they are......)"

감옥에서 나와 맘 잡고 첫사랑 여인과 카리브해 섬으로 도망가 살 계획을 세웠던 주인공 칼리토는 부하의 총에 죽음을 맞으며 이렇게 되뇌인다.





투우에서 맨날 소가 지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가끔 소도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나무의 사생활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다. 나무는 다른 생명체, 특히 동물과는 엄청나게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동물들이 단 몇 분 만에 할 일을 나무는 수년에 걸쳐서 해야 한다.

하지만 나무도 영역 다툼을 하고, 사랑을 하고, 번식을 한다. 단지 이것을 해내는 시간의 간격이 다를 뿐이다.





치과와 바슐라르, 고래밥과 표준편차.

가슴이 답답할 때 치과에 간다. 그 통증과 소리와 냄새. 아프고 역겹지만 짜릿하기도 하다. 치과 의자에 앉아 집중하고 있으면 그 고통의 안과 밖이 다 보인다. 개운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치료 중에 잠이 들어서 간호사에게 혼난 적도 있다. 몇 군데 병원을 옮겨 다니며 치과 의사들의 '연주 솜씨'를 비교하기도 한다. 질 나쁜 치아를 물려준 조상께 감사한다. 그래, 난 치과에서 바슐라르를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난 고래밥을 먹으며, 각기 다른 고래밥의 모양을 세며 표준편차를 이해했던 것 같다.





나는 자주 아프다. 약한 체질을 타고난 것 같다. 내가 튼튼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굳이 스피노자나 모리스 메를로 퐁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몸이 정신을 지배한다는 주장이 맞는 듯하다.





노을 속 막 이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계산된 선일 텐데 이렇게 아름답다니. 테크네는 아르스다.





멀리서 보면 기차 레일은 생선뼈처럼 생겼다. 발라먹고 남은 생선뼈는 자신의 살을 먹어 치운 사람들을 태우고 어디론가 간다. 사람들은 생선뼈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는다. 미끄러지듯 생선뼈 위를 달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가끔 내가 몇 명 남지 않은 '책의 제사장'일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책 읽기'라는 거대한 제의를 진행하고, 그 형식을 계승시키고, 사람들에게 짐짓 엄숙한 화두를 던지는 제사장 말이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그 제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밤기차의 불 켜진 창은 생의 스크린이다.





여행 중 지평선을 본 적이 있다. 횡단철도를 타고 고비사막쯤을 지날 때였다. 멀리 물결 같은 게 보였다. 사막에 저렇게 푸른 물결이 있을 턱이 없는데 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착시의 일종이었다. 끝도 없이 지평선이 펼쳐지다 보니 하늘색이 진해 보이고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것이 물결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수십 킬로미터 밖의 지평선 위를 흐르는 바다. 실재하지는 않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바다. 그 바다는 내가 가까이 가면 더 멀리 도망쳤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착시의 바다.

그래도 나는 그 바다에 가 닿고 싶었다.





파도를 피해 포구에 몸을 누인 목선은 흔들리면서 지구를 읽는다.

이런 상상을 자주 했었다. 지구는 둥그니까. 바다는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배는 그 위에 또 매달려 있고.

매달린 채 흘러내리지 않는 바다.

물론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면 설명이 충분한 일이지만 동원하고 싶지 않다.

바다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목선들은 그 바다에 매달려 있다. 불온한 상상일지라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모든 조류는 기회만 되면 날기를 포기했다. 진화 생물학자들의 말이다.

새들은 날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예외 없이 날기를 포기했다. 천적을 피해 굳이 도망칠 필요가 없는 고립된 섬 같은 곳에서 진화한 조류들 중 날개가 퇴화된 종이 많은 걸 보면 과학자들의 말이 실감이 난다.

생각해 보면 중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땅에서 '난다는 일'은 얼마나 힘겨운 것이었을까. 중력과 바람의 저항에 맞서 끊임없이 날갯짓을 한다는 건 얼마나 가혹한 숙명일까.





우주 탐사선 파이어니어 11호엔 지구인들이 보낸 이런 메세지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혹성 '지구'에서 왔다고...... 남자 그리고 여자가 존재한다고...... 우리는 친선을 원한다고...... 우리 이외의 지각을 가진 그 어떤 생명체도 만나지 못했다고...... 우리는 외롭다고......"





타클라마칸은 아름답지 않았다.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이라는 고혹적이면서도 두려운 뜻을 지닌 그 땅에서 나는 두고 온 것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그리웠을까. 왜 난 그리운 것을 놔두고 길을 떠나왔을까.

길은 인터넷 초기화면에 나오는 고운 모래사막이 아니었다. 붉은 불모지, 흡사 달이나 화성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불모지. 사막보다는 암막巖漠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그런 길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국을 떠난 비행기가 시카고를 거쳐 서른네 시간 만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할 때까지 난 어떤 모임에서 만났던 여인이 들려준 말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외교관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서른 살이 될 무렵까지 무려 열한 개국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그중 어느 나라가 가장 기억에 깊게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아르헨티나요."

다시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공기마저도 그리워요."

알려진 것처럼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는 좋은 공기라는 뜻이다.

아르헨티나는 내게 '탱고'와 '공기'로 다가왔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민낯의 파리'다. 실제로 남미의 파리라 불릴 만큼 전성기를 누렸고 그 호시절은 매력적인 흔적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유럽의 파리가 화장을 짙게 한 얼굴이라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있는 그대로의 민낯이다.





헤겔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밤이 되어야 날아오른다"는 말을 한 이후부터 지혜는 밤의 몫이 됐다.

하긴 그렇다. 눈앞의 현실과 거리두기가 가능할 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내면으로 들어와 사유에 빠질 때, 격정에 흔들렸던 낮 시간을 후회할 때 지혜는 우리를 찾아올 테니 말이다.





불온한 시를 위하여 살았다.

빗나가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을 증거하고 싶었다.

시를 만나는 일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세상과 친해지는 일이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