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의 아이들 데모닉 2, 전민희

 

 

 

 

 

 

날씨를 보아하니 켈티카에서부터 걸치고 온 낡아빠진 코트는 곧 용도를 다할 성싶었다. 분수대 속에서는 초여름 태양이 소원을 비는 금화처럼 빛나고, 푸르고 흰 조각들은 하늘을 흉내내며 흘렀다.

 

이윽고 막시민은 안경을 물에 첨벙 담갔다가 코트 자락을 활용해 닦는 것으로 올 계절 코트의 마지막 임무를 마무리했다. 벗은 코트는 둘둘 말아 배낭끈에 달아맸지만 어디든 헐값에 팔 수 있다면 좋겠다는 희망을 뇌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물을 마실 사람은 아랑곳 않고 분수대에서 세수까지 해버린 막시민은 덕택에 나름대로 멀끔한 얼굴이 되어서 조슈아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첫 번째 장소를 쑤셔보러 떠났다. 한 손에는 아궁이 쑤시는 막대기 대신 낡아빠진 바이올린 한 개를 쥐고서.

 

"어서 아궁이 재 속에서 나와라, 이 빌어먹을 회색 고양이야."

 

 

 

 

 

그렇게 해서 불지르고 혼자 달아나려 한 남자, 무대 밑에 누가 깔려 있든 친구만 구해 나가려 한 소년, 쓰러진 사람이 시체든 아니든 자기 나갈 길만 생각한 소녀, 그리고 모두가 자길 구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는 순식간에 '자기밖에 모르는 4인조'를 결성하여 쪽문을 통해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그들 중 불길로 가로막힌 맞은편 입구를 자기가 나서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대한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만 더 설명 없이 저런 데로 데려가면 그땐 끝장이야."

 

다른 생각에 잠긴 듯한 막시민의 대답은 이랬다.

 

"끝장이라니, 우리가 언제 뭘 시작했냐?"

 

이러니 발을 한번 밟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끝장나게 때려주겠단 말이야!"

"........"

 

꽤 아프게 밟았는데도 별반 반응이 없어서 리체는 가다 말고 물어보았다.

 

"안 아파?"

"아니, 아파."

"그런데 왜 안 아픈 척해?"

"술 사줬으니 술기운에 참는 거지."

"참다니, 아픈 걸?"

"아니, 널."

 

 

 

 

 

"말끝마다 미녀 조수라고 해야만 되는 거냐?"

"사람들한테 '소년 탐정과 미녀 조수라고 불러주세요'라고 하지만 않으면 되지, 왜 따지고 그러니?"

 

막시민은 대꾸 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군."

"뭐가 어쩔 수 없어?"

 

그러자 막시민이 리체를 돌아보더니 '의지 굳은', '심각한', '사명감을 불어넣는' 눈빛으로 말했다.

 

"의뢰인의 안전을 위해 우리의 안전을 희생하자."

"뭐야! 의뢰 따위 받은 일 없잖아!"

"이 경우엔 '미녀 조수'가 채용되기 전에 받은 거겠지."

"만일 내가 찬성하지 않으면?"

"그러면 나 혼자 가겠지.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 '미녀 조수'는 탐정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결국 뒤따라온다고 되어 있던데."

"내가 읽은 책에는 그런 얘기 없었어!"

 

그러나 막시민은 이미 성큼성큼 정문 앞으로 가는 중이었다. 병사 한 사람과 마주치자 품속에서 꺼낸 편지를 내보였다. 예의 아르님 가문 문장이 찍힌 편지였지만 용도는 좀 바뀌었다.

 

"급전입니다. 켈티카에 계신 아르님 공작부인께서 이 댁에 계신 분께 편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섬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막시민이 소화한 일정의 특성상 그의 몰골은 방금 먼지를 쓰고 도착한 심부름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사실이 일말의 신빙성을 더하여 막시민, 그리고 결국 뒤쫓아오고 만 '미녀 조수'는 정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비극적 낭만주의자, 연산은 끝났어?"

 

 

 

 

사실 배를 타는 것은 막시민도 처음이었다. 배가 너무 작아서 별일 없을까 조금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저 비현실적인 천재가 걱정스러웠다. 

 

막시민은 선 채로 앉아 있는 조슈아를 내려다봤다. 잠시 후 몸을 돌렸지만 결국 하고 싶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네가 만일 뻔히 보이는 백 개의 멀쩡한 길을 무시하고 딱 하나뿐인 늪길로 들어가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넌...... 엔젤릭이다."

 

조슈아가 움찔하며 올려다봤다.

 

"엔젤릭...... 이라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이 들려왔다.

 

"너희 집에선 데모닉이 천재라는 뜻이라며, 그럼 엔젤릭은 돌대가리란 뜻일게 뻔하지."

 

막시민이 한 말치고는 꽤 우아하게 돌려 말한 셈이었다.

 

 

 

 

 

램프의 불빛이 흔들렸다. 기름이 다한 모양이었다. 얼마간 흔들리다가 사그라지자 회랑 전체에 어둠이 깔렸다.

 

테오는 약간 발돋움을 했다. 그림 속 아내에게 짧은 입맞춤을 하기 위해서였다. 둘 다 싸늘한 입술이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줄게. 걱정 마. 난 아주 근사한 칼을 쥐었거든."

 

그런 다음 한 발짝 물러나 아내를 올려다봤다. 미간을 찡그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강한 시선으로 억눌렀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아니야. 내가 그러지 않았어.

 

아르님 성을 가진 자들은 널 사랑하지 않았어. 네 사랑을 받은 주제에, 너의 찬란한 사랑을 받은 주제에 제 고통밖에 돌아볼 줄 몰랐지. 최후까지도 네 대신 살아남다니. 정말이지, 너무 기울어 저울의 팔이 부러질 지경 아니야?

 

그런 건 바로잡아야지. 아주 묵직한, 납덩이 같은 악몽을 얹어주어야지.

 

돌아선 테오는 회랑의 어둠 속으로 두 발짝 걷다가 몸을 돌렸다. 손끝을 눈썹에 대고, 그만이 부르는 이름으로 인사했다.

 

"잘 있어, 데모닉 이브노아."

 

 

 

 

 

주연이 가장 화려하게 치장하는 북부 가면극과 달리, 남부에서 주연배우는 화려한 가면을 쓰지 않지. 모두들 공작 깃털이니 비단 터번이니, 화려한 안료와 색실과 황금빛 술로 장식한 가면을 쓰고 있을 때, 무늬 없이 단순한 흰 가면을 쓴 자가 주연이야. 그러면 주연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있어선 주목을 받을 수 없지. 그는 춤추고, 노래하고, 달려야 돼. 누구도 그가 주연이라는 것을 잊지 못하도록 가진 재능을 다해 불타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로써 오늘 당신의 시도는 조화의 우미를 잃게 됐군요. 이건 후렴구가 길어지다 못해 압운이 흐트러진 시와 마찬가지죠. 다시 말해 피날레가 없는 악극이랄까요.내가 당신이라면 여기저기 기운 누더기에 만족하느니 새 무대를 마련해 다시 시도할 겁니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 같은 말을 들으며 막시민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뜻밖의 결과가 벌어졌다. 남자가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당신은 이 시점에서 내가 놓친 압운이 뭐라고 생각하지?"

 

조슈아는 손을 들어 자기 목을 천천히 매만지며 대답했다.

 

"당신의 특별한 오른손으로 내 목을 부러뜨려 죽였어야 했죠.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지루한 왼손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선 납득할 수 없을 대화였으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다음엔?"

 

조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손을 들어 식당 창밖의 처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쯤 매달면 어떨까요."

 

막시민은 '무엇을?'이라고 물으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몰라서 물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정신 나간 대화를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나쁘지 않아. 아니, 좋군. 당신은 과연 예술가다워."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아쉬운 듯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느껴져서 막시민은 다시 한번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입술을 조금 떨었다.

 

"당신이 말한 압운은 강하고 멋이 있군. 그런데 끝 소절 변형은 없는 건가? 정통 루그란식은 아니지만, 훨씬 역동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좋아하는데."

 

조슈아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쯤에서 변조도 나쁠 것 없죠. 대단원을 밀어 올리는 느낌을 주려면 이 방에 불을 지르거나, 당신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어떨지. 아니면 밖의 풀밭을 피로 적셔서 까마귀들을 부르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피가 좀 많이 필요하겠지만."

 

농담의 선은 이미 넘었다. 일부러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며 즐기는 사람들은 종종 있다. 그러나 명백한 살의를 가진 자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방법, 그리고 죽인 뒤의 연출에 대해 논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넌 내 상태가 어떤지 몰라."

 

드디어 조슈아의 얼굴에도 분개한 표정이 서렸다.

 

"데모닉이란 게 어느 정도로 끔찍한 상태인지 다른 사람이 이해한다고? 누워 잠을 청하는 동안 낮 동안 했던 모든 대화가 저절로 재생되는 기분을 알아? 펜을 들고 낙서하다 보면 어느새 예전에 본 것 중 가장 복잡한 아라베스크를 똑같이 그리고 있는 상태가 이해돼? 숫자 몇 개를 떠올렸는데 무심코 그걸 곱하고 더해서 수십 자리의 괴물 같은 숫자를 만들고도 멈춰지지 않아 머리를 벽에 부딪쳐가며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애쓰는 부분을 아느냐고!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비취반지 성의 계단 난간에 새겨진 무늬를 전부 기억할 수 있어. 그와 마찬가지로, 내게 일어났던 수만 가지의 일들이 항상 엊그제 겪은 듯 머릿속을 어지럽히지. 고통도, 절망도, 부끄러움도 모조리 방금 당한 것처럼 또렷하게. 너라면 어떨 것 같아? 이런 상태로 말끔한 제정신일 수가 있겠는지 말해보란 말이야!"

 

그 말에 입을 연 사람은 막시민이 아닌 리체였다. 그것도 몹시 당황한 말투였다.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그게 전부 사실이야? 천재란...... 본래 그런 건가?"

 

(...) 생각을 뚫고 조슈아의 조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소는 리체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너도 이런 내가 끔찍한가 보지?"

"이것 봐, 조슈아."

 

리체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막시민이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응석 부리는 건 그만둬라. 흉터 자랑하는 어린애 같은 꼴이야. 너에게 데모닉으로서의 고통이 있다 치자. 그러면 난 아무 어려움 없이 편안한 인생을 산 것 같으냐?"

 

막시민의 목소리도 미세한 열에 들뜬 듯했다.

 

"어머니는 기억조차 희미하고, 아버지는 집을 떠난 뒤 동전 한푼 갖다준 일이 없지. 동생은 여섯 명에, 동냥젖이 필요한 어린 아기도 키워봤어. 내가 우리집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한 나이는 여덟 살이다. 난 그나마 여덟 살이기라도 했지만 너무 어렸던 내 동생들은 그후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여덟 살짜리가 돌보는데 오죽하겠냐? 바람처럼 돌아다니는 네 작은 할아버지가 도와준 시기는 그런 내 인생 가운데 특집편 같은 거였어.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을 것 같아? 난 코츠볼트에서 자라는 모든 잡초와 나무껍질의 맛을 알고 있어."

 

조슈아가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막시민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 데모닉. 고통스럽겠지. 네게도 힘든 일은 많았지. 하지만 넌 저 여행 식량이 입에 맞지 않아 먹기 힘들 정도의 생활을 유지해왔어. 네겐 당연한 것이겠지만, 당연하지 않은 사람에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혜택이란 말이다. 또, 만일 노래를 잘하고 싶어서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실패한 사람이 있다면 네 재능은 혼을 팔아서라도 갖고 싶은 것일 거다. 이래도 네가 저주받은 것 같냐? 미쳐도 용서될 정도로 운이 없는 것 같아?"

"그만."

 

조슈아가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막시민은 홱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바라봤다.

 

잠시 후 리체가 말했다.

 

"난...... 오늘은 이걸로 충분한 것 같다. 내가 너희를 이해하려면 알아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는 것만은 알겟어. 지금의 난 단지 신기한 이야기책을 읽은 것처럼 당혹스러울 뿐이야. 그건 너희의 이야기가 내 문제로 느껴지지 않아서겠지.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마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으로는 모르겠다는 것만은 말해둘게. 난 너희를 이해하지 못했어. 이 말은 우리가 아직 친구가 아니란 뜻일 거야."

 

리체는 그들 사이로 걸어가 모닥불을 완전히 밟아 껐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선 채로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리체의 시선이 막시민을 향했기에 막시민도 고개를 들었다.

 

"어제 그 남자와 식당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대강 알 것 같아. 그래, 난 그런 얘기가 미친 짓이라는 데도 동의해. 그런데 말이야, 그때 조슈아가 너나 나에 대해서도 얘기했니?"

 

(...) 막시민의 얼굴에 표정이 떠오르기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여러 명을 죽이면 된다'고 말하는 그 남자에게 '학살자가 되지 말라'고 말하던 조슈아를 기억해냈을 때, 그제야 맺힌 매듭 하나가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아니었어."

"나라면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래, 미친 짓은 맞지만, 솔직하게 생각해봐. 그런 상태로는 미칠 수밖에 없다는 말도 일리가 없진 않잖아? 난 그 데모닉......이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조금 전 얘기는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어. 넌 친구라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조슈아의 얘기가 납득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해선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그들은 말없이 새벽이 밝는 것을 지켜봤다. 푹 잔 덕택에 몸은 어느 정도 회복세였다. 드디어 목적지도 멀지 않았다. 꺼진 모닥불에서 엷은 연기가 올랐다. 오해인지 이해인지 모를 이야기가 한바탕 오가고, 남은 것이 재일지 불씨일지는 아직 몰랐다.

 

리체가 말했다.

 

"난 몽플레이네 씨나 깨우러 가야겠다."

 

조슈아는 세자르가 있는 쪽으로 가는 리체의 뒷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곳에도, 자기한테 없는 것이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넌...... 너무나 명쾌하군."

 

조슈아의 눈은 우울하다 못해 비현실적인 빛을 띄었다.

 

"데모닉이 왜 데모닉인 줄 알아? 난, 데모닉이라는 별명을 제일 먼저 붙인 사람이 데모닉 이카본 본인이 아닐까 생각해. 너무나 진실에 가까운 이름이니까. 타인이 대신 꿰뚫어 볼 수 없는 본질이 거기 있어. 악마가 줬다는 능력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 관용도 너그러움도 없는 것."

 

마지막 목소리는 평소 알던 조슈아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서늘했다. 막시민은 대답 없이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사슴처럼 빨리 달린다면, 다른 사람이 모두 느릿느릿 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죽도록 답답해도,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니 별수없이 발뒤꿈치에 덫을 단 것처럼 걸음을 맞춰야 해. 그러다가 종종 미칠 지경에 몰리는 게 이상한 일일까? 어떨 때는 최소한의 기능만 가진 나무 인형들로 둘러싸여 사는 것처럼 느껴져. 아, 죄받을 악한 생각....... 하지만 이 모든 걸 참는 것이 정말, 이렇게 태어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일까? 의심스러워. 모든 것이 느린 이곳에서, 미쳐버리면 차라리 편안해질 것 같아. 내 죄를 대신 짊어진 것 같은 누나, 결국 삶을 그렇게 마친 누나, 그래서 난 누나를 생각하는 게 싫어. 나의 원죄를 땅에, 무덤 속에 파묻어버린 것처럼. 난 나보다 느린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없어. 너그러워질수도 없어. 그냥 참을 뿐이야. 내가 누나를 사랑했을까?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그곳에서는 진짜로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졌다. 주문을 시전하기도 전에 '그것'은 완성되어버렸다. 단지 도착하는 것만으로. 그리고 금지된 물건을 갖고 있던 아넬리는 사라졌다. 흔적 하나 없이, 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 간신히 도망쳐 나왔을 때,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만든, 이 세상 어떤 마법사도 성공시킨 적이 없는 굉장하고 끔찍한 피조물이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막 태어난 밤하늘 같은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떠오르던 순간을 그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몰라서. 고대의 마법사들이여, 그대들의 불꽃을 훔쳐 무한히 뛰어난 존재를 만든 저는 백지장처럼 어리석어 이 아이에게 줄 어떤 대답도 갖지 못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