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러키 스타트업, 정지음

 

 

 

 

 

 

이때 난 대한민국에 스타트업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소규모 블랙 기업 대표들이 ‘구글’, ‘애플’, ‘넷플릭스’를 언급할 때마다 고 허무맹랑한 주둥이에 벌금을 먹이는 법 말이다. 용도가 결백하지 않을 땐 ‘크리에이티브’, ‘린’, ‘그릿’ 등의 단어도 금지해야만 옳았다. 그것들은 원래의 건강한 의미를 잃고, 스타트업 대표가 노예에게 산업혁명을 떠넘길 때나 쓰이게 된 지 오래였다.  

 

 

 

명예와 긍지를 중시하는 수진 언니, 아니 수잔 과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그가 진저리 치며 건넨 새 명함을 받아 들었다.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 디지털전략총괄기획팀 과장 수잔 이수진’이라는 글자들이 조금의 빈틈도 없이 서로를 다닥다닥 끌어안고 있었다. 이따위 명함을 가진 인간이라면 응당 무능하겠거니 선입견이 생기는 물건이었다.

 

 

 

요즘 나는 전생설을 밀고 있다. 그는 저번 생에 너무 착한 천사였거나 인류를 멸망에서 구한 천재였을 거라고, 보답으로 이번 생은 악마나 바보로 살 권리를 받은 거라고. 

 

 

 

어쩌면 이것은 내 조상이 박국제의 주둥이를 빌려 도망 신호를 보내온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못 받아먹었다. 탄산처럼 싸한 촉을 무시한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후에 이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왜 ISTJ가 아닌지, 어째서 그가 ENFP에게 더 큰 배신을 당하지 못했는지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솔직히 나나 지구도 박국제와 겸상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 명 다 빠지면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티가 났다. 이럴 때 두 명만 나가 놈을 상대해 주는 것이 우리 사이의 ‘타격 품앗이’ 룰이었다.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두 명이 소란을 떨며 제일 충격받거나 화가 난 한 명의 침묵을 감춰 주는 것이었다. 

 

 

 

나는 무교지만 가끔씩은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저 자식이 제발 입 좀 닥치게 해 주세요. 아니면 다이소에서 CEO용 입마개를 살 수 있게 해 주시던가요. 어떤 신도 답하지 않는 가운데 지루한 월, 화, 수, 목, 금 들이 반복되었다. 

 

 

 

이 또한 모든 신께 번갈아 빌고 또 빈 사항이었지만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많이 빈 것에 비해 성과가 없는 걸 보니 신들의 세계에도 방관자 심리가 있어 ‘나 말고 쟤가 들어주겠지.’ 미루는 것만 같았다. 

 

 

 

─ 이거 봐. 쌀통 회사 문의 게시판인데, 원래부터 불친절로 유명한가 봐. 지구 너한테만 못되게 군 게 아니고 그냥 쌀통맨 인성이 그런 듯……?

─ 버릇없는 자식. 거의 할머니들이던데 왜 그러는 거지?

─ 제품 하자로 문의하면 열에 아홉한테는 그냥 쓰라면서 끊어 버린대.

─ 열에 하나한테는 친절하고?

─ 아니. 10퍼센트의 비율로는 더 막장 싸움이 나는 것 같아. 여기 보이지? 게시판에도 10건 중 1건 정도는 강성 고객이야. 

 

 

 

슬쩍 보니 어떤 글은 강성 고객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아마도 어르신일 유저가 쌀통맨을 두고 ‘ㅆㅣㅆ:팔세끼’라고 갈겨 쓴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다. 그분은 자신이 칠십 평생 인터넷에 후기나 리뷰랄 것을 써 본 적이 없는데 이 회사 젊은 놈은 너무 싹퉁 바가지가 없어 참을 수가 없더라는 사견을 덧붙였다. 나는 첫째로 이런 회사가 여태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했고, 고객 센터 평균 만족도가 1.6임에도 응대가 개선되지 않는 것이 두 번째로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