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리트, 설재인

 

 

 

 

 

 

비로소! 진솔은 눈꺼풀이 반쯤 덮였으면서도 그 단어를 입안에서 몇 번이고 굴렸다. 비로소, 비로소. 남들은 대화 중에 절대로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단어가 해수의 성대를 통해 나왔다는 게 짜릿했다. 비로소, 비로소. 계속 반복하니 영험한 주문 같기도, 혹은 어느 미지의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의 이름 같기도 했다. 비로소. 삼국시대에 고아로 자라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훌륭한 어른이 되어 전장을 평정하는 고구려의 장수, 비로소.





해수는 그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말고도 학교에 오지 않는 아이들은 많았다. 등교하지 않으면 담임이 형식적으로 한 번씩 전화를 걸고 만다고, 안 받으면 장땡이라고 아이들은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냥, 온종일 이불에 파묻혀 있었다.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꿈속을 헤매다 눈뜨면 햇빛 한 번 받은 적 없는 방 특유의 고단한 어둠이 해수의 몸을 덮고 있었다. 





유령들이 조용했다면, 그러니까 마치 공포영화에서처럼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기만 했다면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유령들이 계속해서 지긋지긋한 목소리를 낸다는 데 있었다. 유령들은 계속해서 지껄였다. 제대로 된 문장이나 맥락 있는 단어의 나열이 아닌, 그저 파편들뿐이었다. 접시를 바닥에 내던지듯 온전한 문장들을 산산조각 낸 다음 고친답시고 서로 다른 조각을 이어 붙인 것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주절거렸다. 가끔은 아주 크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듯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들도 가끔 있었다. 돈. 돈. 돈. 딱 한 글자의 단어라 가능했다. 어느 날은 자기도 모르게 귀가 뜯길 것처럼 긁다가 짝꿍에게 손목이 잡히기도 했다. 그 단어는 벌레 같았다. 귓구멍에 기어 들어가 알을 줄줄이 낳을 것만 같은, 그런 벌레.





지하 통로를 마주하는 것은 엄마 아빠가 사라진 후로 처음이었다. 해수는 혹시 몰라서, 텅 빈 교실에 가만히 앉아 그간 통로에 갔던 시간, 외고의 저녁 식사 시간까지 기다렸다. 단톡방은 여전히 떠들썩했고 교실은 고요했다. 엄마는 머리를 풀고 마룻바닥 위를 기어다녔다. 아빠는 손톱으로 칠판을 긁었다. 자음과 모음이 마구 뒤섞여 빗물 위에 떠다니는 더러운 담배꽁초처럼 교실을 더럽혔다. 해수는 친구가 빌려준 만화책에 코를 박고 절대로 눈을 떼지 않았다. 만화책에서는 세상을 떠난 엄마가 보고 싶은 나머지 연금술로 엄마를 다시 만들어 내려다가 저주를 받은 어린 형제의 이야기가 나왔다.

완전 반대네. 해수는 생각했다. 그리고 비록 저주를 받긴 했어도 그 형제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엄마를 사랑했으니까. 엄마를 다시 만들어 낼 정도로 그리웠던 것이다. 자신처럼 있었던 사람을 없애 달라고 빈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군가를 저런 식으로 그리워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일까? 나에게도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이 있을까? 유령을 보는 것은 인간답지 못한 내게 내리는 벌일지도 몰라.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미워한 죄로 하늘에서 내린 벌.

해수는 그렇게 곱씹으며 만화책을 읽었다. 그러다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내려갈 시간이었다. 몇 달 동안 매일같이 통로에서 진솔을 만나며 몸에 밴 시간관념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진솔이었다. 그러나 말보다 몸으로 먼저 용기를 낸 것은 해수였다. 방금까지도 자신의 존재에 계속 회의하며 이따위로 삶을 계속 버텨 낼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솔이 우두커니 익숙한 방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마자 자신에게도 그리운 존재, 어떻게든 다시 찾고 싶은 존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꽉 껴안고 나니 퍼즐 조각처럼 익숙하게 맞아떨어졌다. 둘이 함께한 경험들이 가득 쌓여서 이제는 몸 안에 진솔이라는 이름의 폐나 쓸개가 하나쯤 해수에게 더 있을지도 몰랐다.





“우리가 몰랐던 건 ‘먼 훗날’이란 말이 오늘 하루의 모멸감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이었어.”

 

미희와 연림은 서로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청소업체에서 고용한 사람들은 일단 다 같이 업체에 모여 승합차를 타고 학교로 이동했다. 연림은 미희와 달리 청소 일이 처음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연림은 출근길에 지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어머, 체했나 봐. 아니면 어디 아픈가? 모두 한마디씩 하고는 바쁘게 하차했고, 운전사는 삐딱하게 연림을 쳐다보더니 일을 못 할 것 같으면 그냥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때 누군가 연림의 목 언저리와 손을 주물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혈 자리를 잘 아니까 조금만 참아요. 그 사람은 뜨거운 손을 계속해서 움직이며 말했다. 그가 미희였다. 연림은 모르는 이의 손이 몸 여기저기를 주무르는 것이 부끄러워 전전긍긍했는데, 미희는 별 상관도 안 하고 센 악력을 아낌없이 썼다. 그러고는 연림에게 핸드폰을 내밀더니 번호를 찍어 달라고 했다. 그날 밤, 연림은 새벽까지 미희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있는 67개의 사진을 닳도록 보았다. 그래도 질리지 않았다.

저 애들도 비슷할 것이다. 용암이 끓듯 여기저기서 뜨거운 감정이 터져 나올 것이다. 무섭고 두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저 애들처럼 감정의 주위를 피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르면 결국엔 또 어떠한 종류의 땅을 일구어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답네, 아름답지, 하는 말을 하게 만들 것이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깔깔 웃으며 맨발로 펄쩍펄쩍 뛰고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할 것이며, 어떤 학교의 아이들은 단체로 여행을 와서 서툴게 차려입은 옷맵시를 자랑하며 사진을 찍을 것이다. 옛 감정이 폭발해 눈처럼 내리고 쌓여서 끝내는 식고 굳어 버린 잔해 위에서.





문이 열렸다. 연림과 미희는 벌떡 일어서서 광대가 아플 정도로 방긋 미소를 짓고, 손끝으로 조용하고 아주 빠르게 박수를 쳤다. 둘은 생각했다. 세상에는 땅 아래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모르고 언제나 위로, 더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만 그득하지. 하지만 너무 높은 곳을 보려고 고개를 젖히다가는 까딱 잘못해 그대로 뒤로 넘어가. 그때 땅 아래 있던 이들이 부드러운 손과 강인한 팔로 붙들어 주지 않으면 크게 다칠 거야. 근데 그들은 그걸 잘 몰라.

위에 별로 좋은 것이 있지도 않은데. 높이라는 건 사실 너무나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공기 없는 척박한 우주 어딘가에서는 우리에게로 닿는 것이 가장 어렵고 또 가장 동경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일이 아닐까?

그러니 너희가 힘들 땐 아주 빠르게 치던 박수를 생각해.
그 격려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해.
오늘 이 촛농의 모양과 케이크의 맛 같은 것을 생각해.

 

이상하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조금 전까지도 멀쩡했는데. 해수는 자신이 힘들 때도, 수모를 겪을 때도, 종이에 인쇄된 죽은 이들의 초상을 봤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필사적으로 뻐끔거리는 입과 아가미가, 해수가 쌓아 왔던 둑을 터뜨린 것 같았다. 슬퍼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이 방의 주인에게 열대어는 아주 쉽게 교체될 수 있는, 별로 소중하지 않은 생명일 테니까. 죽어 버린 학생들처럼. 열대어의 삶은 하나도 중요치 않은 것이다. 관상용. 이 공간이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결국 이 재단에게 학생 역시 관상용이 아닐까. 좋은 모습이 아니면 교체해 버리는 게 나은. 죽으면 흉하니까 얼른 치워 버려야 하는.

 

그때 진솔은 생각했다. 안도와 사랑은 단 몇 글자의 말에서 오는지도 모른다고.

그러한 말들은 사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아주 평범하고 단출하다. 머리를 있는 대로 굴리며 멋진 척을 해야 할 필요도 없고, 칼로리가 소모될 정도도 아니다. 매일 숨 쉬는 것처럼, 그냥 입을 조금 벌리고 성대만 진동시키면 된다. 그뿐이다.

그런 말은 증오를 녹인다.

그러나 진솔은 그렇게 쉬운 말을 지금껏 해수에게서만 들어 왔다. 다들 어렵게 어려운 말만 한다. 따지고 계산하고 멸시하고 갚으려 들지, 아주 쉬운 말들은 아주 쉽게 넘겨 버린다. 마치 게임의 첫 스테이지에서 너무나 익숙한 장애물을 넘듯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지. 미희는 코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양팔 저울 위에 선 사람들이 세상의 반대 방향으로 오르막을 올라가 접시에 선 다음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자꾸만 무거운 쪽으로 굴러떨어지려 한단 말이야. 버티는 게 힘이 드니 편하게 내리막으로만 가려 하는 거지. 다 같이 나쁜 방향으로, 다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