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듀, 박서련

 

 

 

 

 

 

신학교가 영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첫째 내 발로 찾아간 것이었고, 둘째 교수들이며 교장으로부터도 귀여움을 듬뿍 받았으며, 셋째 공부가 흥미로웠다. 학교는 교토 도시샤 대학의 분교로서 일본어로 윤리학을 가르쳤다. 나는 외국어와 인문학에 취미를 붙이게 되어, 수업이 끝나면 당대 국내 유일의 서양철학자 김만수 선생의 집으로 가 영어와 철학을 수학했다.

그런데 그 공부라는 것이 외려 문제였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니 배운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학교가 싫어지는 모순이 발생했다. 가령 우리 학교는 비록 분교라지만 저 관서 4대학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도시샤 대학에 속해 있고, 우리는 본교생들과 똑같이 성서 배경사와 종교이론을 배우고 있는데, 그렇다면 본교의 학생도 나와 같은 구주를 영접하는가? 황국신민과 불령선인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인가? 그렇다면 하나이신 하나님은 어찌 열도인의 반도 침탈을 허하셨는가?

 

멀리 열도의 본교까지 갈 것 없이 동기들에게도 불만이 많았다. 만세 운동으로 뜨거워진 가슴을 안고 신학에 투신한 나로서는 명문이고 나발이고 간에 일본 학교의 분교에서 수학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타협으로 느껴졌고, 김만수 선생 댁에 가느라고 도시샤 대학의 사각모를 쓰고 길에 나서면 주머니에 위조지폐를 가득 넣은 채 백화점에 들어선 사기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기들은 내가 일면 부끄러워하는 이 학교를 각자의 가장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에게 이런 심정을 함부로 터놓을 수도 없었다.

 

행여 그 여자를 놓칠까 봐 부랴부랴 카메라와 필름통을 끼고 대합실로 달려갔다. 짐도 무겁거니와 앞뒤 없이 달려간 참이기도 해서 부딪치듯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여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크고 동그랗되 눈썹 길이만큼 옆으로 길게도 뻗어 있는 눈 한쪽은 쌍꺼풀이 짙었고 한쪽은 홑꺼풀인 듯 속쌍꺼풀이 있어 묘한데, 서로 비대칭처럼 보이는 눈의 균형을 좁은 콧대가 아슬아슬 조심스레 가누었고 그 아래에 붉은 마침표 같은 입술이 갓난애의 조막만 한 크기로 야무지게 놓여 있었다.

신파新派, 신파다.
새 시대의 얼굴이다.

나는 속절없이 그 여자의 마스크에 끌린 까닭을 그렇게 알았다. 이 여자가 내 영화에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는 많았지만 와꾸는 둘째 치고 기본적인 연기 연습도 되지 않은 이가 대부분, 기껏 뽑아놓아도 집안에서 반대하니 혼처가 정해졌니 하며 촬영 시작도 전에 말을 바꾸는 이가 또 반절 이상, 남자 이상으로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애초부터 기생이라 예능 수업을 받았거나 한 경우라야 겨우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는데 또 한쪽이 다른 쪽을 괄시하거나 백안시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조선의 배우 판이라는 것은 도대체가 구제불능의 남초 판이었는데 그 여자의 얼굴은 이런저런 사정을 모두 뒤로 하게 하는 것이었다. 백치여도 좋고 벙어리여도 좋았다. 그 얼굴을 빳빳이 들고 내 영화에 나와주기만 하면 되었다.

“아저씨.”

그런데 그 여자가 먼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아저씨 맞지요?”

너무 놀라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놀라움은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다시 보니 나를 아저씨라고 부른 그 여자는, 그러니까 7년 만에 마주친 미옥은 개구리의 울음주머니처럼 볼록해진 배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미옥의 얼굴과 배를 번갈아 보았다. 





〈곰〉은 체호프의 곰. 곰 따위는 나오지 않는 〈곰〉. 체호프가 남자 주인공 배역을 처음 맡아준 배우에게 헌정했다는 〈곰〉. 나의 신극 연출 데뷔 작품인 〈곰〉.

 

관부연락선의 관은 빗장을 뜻하는 관, 시모노세키下關를 한자로 썼을 때의 관. 부는 가마를 뜻하는 부, 부산釜山의 부. 말하자면 그것은 문간에서부터 부뚜막까지 오가는 배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과연 문간과 부뚜막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주부처럼 연락선은 부지런히 드나들었고 집의 문간부터 부엌까지의 거리가 그렇듯 부산과 시모노세키 또한 서로 가까이에 있는 도시였지만, 나는 그사이를 한 번도 건너가본 적 없었다. 조선에서 나고 자란 사내들 대부분이 그렇듯. 그런데 불현듯 나타난 미옥은, 아니 앨리스는, 산뜻하게도 그사이를 건너뛰는구나. 처음도 아니라는 양으로. 펼쳐보지도 못한 삼각대와 카메라를 들고 항구 대합실을 나서는 심정이 어쩐지 민망스러웠다. 





“이러지 말아요. 내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인 걸 모르나요?”

왜 이런 대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을까?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기생을, 도무지 얼굴이 외워지지 않던 여자를 의식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여자의 생령이 내게 빙의했는지도.

“그건 그저 형편에 따른 것, 실은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소! 게다가 당신의 목숨은 꺼져가고 있어. 남은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적어도 한 시간에 걸쳐 찬찬히 드러내야 할 기본 설정을 대사 한 번으로 다 친절하게 알려주다니……. 그렇지만 즉흥극에서는 ‘아니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앞선 사람의 즉흥적 상황 부여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했다. 내가 불륜 설정을 끌고 와 당황한 것은 윤백남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우리는 누가 누구를 더 놀래킬지 경쟁하듯 서로 받아치며 무리한 설정을 덧붙여갔다. 말문이 막히면 나는 조금 돌아서서 우는 척했고 윤백남은 발을 구르며 분을 냈다. 관객들은 놀랍게도…… 몰입하고 있었다. 

 

다이쇼大正……. 언제 들어도 농담 같은 소리였다. 무엇이 크게 바르단 말인가. 일본인들이 일제의 자본으로 세운 영화사의 이름이 ‘조선키네마’인 것이, 그것으로 ‘내지’ 영화계를 공략한다는 작전이 어떻게 ‘크게 바른’ 정신이 될 수 있는가.





처음에 우리 배우들은 왜인인 그의 이름을 우리식 한자어 그대로 음차하여 고좌高佐라고 불렀는데, 누가 그에게 그게 조선에서 쓰는 욕된 말과 발음이 비슷하다 일러준 모양이었다.

“이 감독, 고즈와는…… 후노不能라는 뜻이라지요?”

촬영 초반 그는 무엇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다 내게만 넌지시 그렇게 묻고는 그 다음번에 ‘왕필렬’이라는 조선식 이름을 지어왔다. 영화 포스터에 조선인 감독인 것처럼 이름을 찍어내면 흥행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핑계를 댔고 그건 영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으나, 우리끼리는 계속 그를 다카사라고 불렀고 고좌는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를 부르는 별명이 되었다.





〈보 제스트Beau Geste〉라는 영화가 있다. 인기 모험소설 시리즈를 원작 삼은 것으로 열에서 스무 해 정도 간격을 두고 몇 차례 다시 만들어져 동명의 영화가 서너 편 있는 것으로 안다. 그중 39년에 만들어진 게리 쿠퍼 출연작이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듯한데, 하지만 내게는 역시나, 로널드 콜먼이 같은 배역을 연기했던 26년 판이 원조로 느껴진다. 26년 판이 먼저 나와서가 아니라 운규가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게리 쿠퍼가 출연한 〈보 제스트〉를 운규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게리 쿠퍼를 좋아하면서도 미워했던 (명연기를 해내는 배우지만 지나친 미남이기도 해서) 운규라면 게리 쿠퍼가 영화를 되살렸다고 생각할까, 아주 망쳤다고 생각할까.





“내일도 오세요.”

본래가 나는 그렇다. 생각은 내달리는 야생마 같은데 말은 생각의 꼬리를 잡으려고 헉헉대며 달리는 늙은 개처럼 비루하고 초라하다. 언제나 그랬듯 운규와의 첫 대면에서도 나는 그처럼 멋없게 굴고 말았다. 운규는 씩 웃으며 헌팅캡을 눌러 보이고 (나름대로 서양식 인사를 하려던 모양) 망토를 펄럭이며 나갔다. 운규가 떠난 감독실에서 혼자 생각하기를, 나는 나에게 해롭고 위험한 것에 끌리는가?




하여간에…… 거리에 흐르는 혁명의 뜨거운 피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영업 중인 주점이 1789년 파리 그곳에 있었다. 매일 저녁 악당들이 모여드는 기묘한 주점. 실은 이 주점의 주인이 과거 극장을 차렸다가 망한 전력이 있는데, 예전에 극단에 속했던 배우들을 모아 범죄자 연기를 하도록 주문한 것이었다.

주점 주인과 배우들은 매일 저녁의 범죄자 연기를 ‘공연’이라 불렀고, 이 공연은 뜻밖에도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배우들은 그날그날 내키는 대로 방화광이 되거나 색한이 되거나 좀도둑이 되거나 살인마가 되었다. 말하자면 공연은, 범죄자 연기를 본바탕에 두고 전개해가는 ‘즉흥극’으로서, 공연이라고는 하나 딱히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주점의 종업원(배우)들이 손님인 체하며 진짜 손님들과 어울리고 뒤섞인 채로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고백하여 산발적인 일인극을 벌이는…… 즉 거짓말의 전당이라고 할까. 그리하여 손님들은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범죄의 고백이 어차피 모두 거짓인 것을 아는 채로 방문했으며 그 자신들 또한 악한으로 의태擬態했다. 대체로 귀족으로서 무슨무슨 자작, 후작, 후작부인 따위 작위를 단 점잖은 손님들이 파리의 밑바닥 인생들을 관람하며 저 자신의 일면도 슬쩍슬쩍 내비치는 것이었다.





한편 7월 14일에 이 주점을 찾은 사람 가운데에는 진짜 범죄자도 있었다. 2년간의 옥살이를 마친 전과자는 자기도 범죄자 연기를 하고 싶다고 고용주에게 통사정을 하고서는 제 버릇을 개 못 주고 손님들의 소매를 털기도 했다. 이 사람의 눈에 좀도둑 연기를 하는 종업원들은 우습고 의아할 뿐이다. 평소 “자네의 범죄자 연기는 대담하지 못하다”며 배우들을 다그치던 주점 주인은 진짜 범죄자의 등장으로 난처해지고 만다. 주점 주인이 총애하던 주역 배우는 자기가 바깥에서 사람을 죽이고 왔다고 고백하고, 그날 저녁의 소란한 분위기 속에서 그 고백은 사실인지 연기인지를 분별해내기 어렵게 된다. 이윽고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주점에는 파리 시민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어와 바스티유 함락의 승전보를 외친다……. 객석과 무대와 진실과 거짓이 어지럽고 위태롭게 공존하던 주점 안의 생태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의 개입으로 또 한 번의 전복을 맞이한다.

이 주점의 이름은 초록 앵무새Der grüne Kakadu, 또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쓴 동명의 단막 희곡 줄거리였다. 





일컬어 이 작품을 ‘그로테스크극’이라고 한다. 그로테스크라고 하면 쇼와 초기를 주름잡은 에로, 그로, 난센스의 그로. 나중 어느 신문에서 일축한 바에 따르면, 한마디로 에로는 정사, 그로는 기괴. 그런데 이 작품의 기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에로인가 그로인가 난센스인가를 따지자면, 이 우습고 야시시한 극 중에는 아무래도 난센스의 성분이 가장 높고 그다음은 에로가 아닌가. 하지만 그로란 기괴나 괴기로 일축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 그로의 요체는 납량이 아니라 폭력에 있다. 해명 불가한 압도적 힘과 그에 의하여 거침없이 파괴되는 대상의 낙차가 그로를 발생시킨다. 〈초록 앵무새〉의 그로함은 저항할 길 없이 거센 시대의 흐름과, 그럼에도 시대를 거스르려는 퇴폐의 문화와, 그 둘의 충돌에서 삼중으로 뻗어나온다. 





혹자는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작품을 통해 고발하려 한 것이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왕가의 부패함이었다고 하지만 내게는 그가 보다 근원적인 뭔가를 탐구하려 했다는 믿음이 있다. 가령 〈초록 앵무새〉에서의 혁명기 불란서 귀족 풍자가 슈니츨러의 조국 왕실 풍경과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고, 그런 것은 한낱 장치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일면식도 없는 먼 타국의 작가지만 나는 어쩐지 그의 내면을 알 것 같은, 마치 그와 잠시 연결된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가 프로이트를 두고 자신의 정신적 도플갱어라 표현한 것처럼 나도 그를 정서적 친척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순전한 우연에 불과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의학 교수였고 그 또한 의학을 전공하였으나 아버지 사후에야 극작가로 전업한 점에서도. 





하여간에 그래서 나는 운규가 여자를 좋아하는 줄로 착각했지만 운규는 기생을 좋아하는 것이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생들은 예藝에 밝고 천하니까. 어떻게 들릴지 조심스럽지만 운규는 기생들이 천해서 좋아했다. 자기처럼 천하고 자기만큼 천해서. 

 

지금껏 그 존재를 몰랐으나 새로 이식받아 알게 된 장기처럼, 새삼스럽고도 몸에 꼭 맞게 느껴지는 이상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나는 깨끗이 씻은 간을 몸에 넣은 토끼였고, 제우스와 화해하여 더는 닳지 않는 새로운 간을 얻은 프로메테우스였다. 





친구가 나를 명옥과 떼놓으려고 한 말 중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짓말은 하나도 없을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더욱 문제가 된다) 그 순간에 알았다. 나의 한 시절이 끝났다는 사실을. 나는 친구와도 영희와도, 당연히 명옥과도 더는 만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돌아보니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영희와 손길 한 번 스친 적이 없었고, 물론 만나면 좋기야 했지만 갈급한 끌림 같은 것은 아무래도 느끼지 못했다.  

 

운규는 커피를 마시고 이루 말할 길 없이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고 당장에라도 카메라에 담고 싶을 만큼 걸작이기도 했다. -





“안무비요?”
“네, 배우들이 탈을 쓰고 춤을 춥니다.”
“선생도요?”
“네. 저, 그러니 약을 좀 독하게 써주십시오.”
“〈숙영낭자전〉에 원래 그런 대목이 나오던가요?”
“나의 오리지날입니다.”

탈이란 즉 가면, 마스크, 얼굴 위의 얼굴. 그것의 사용은 본디부터 극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중세까지는 배우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지 않는가. 가면이 역할의 은유가 아니라 역할 그 자체였던 시대를 지나, 인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배우들은 가면을 벗었을 것이다. 그때에는 그것이 극의 혁명이었을 것이다. 구극이 기껏 벗어던진 가면을 신극이 다시 한번 집어 들게 된 것은 그것을 언제든 벗을 수 있게 되어서다. 과거에는 가면을 벗는 것이 금기였으나 오늘날 가면을 쓰는 것은 금기가 아니며, 한때의 금기마저 연출의 한 소도구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날의 신극. 또한, 이러한 예술적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나 정도밖에는 없지 않나 하는 자부에 나는 심취해 있었다.





산타클로스가 빨간 옷을 입게 된 것은 코카콜라의 홍보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겨울철 급감하는 콜라 판매량에 대응하기 위하여 산타 영감을 광고 모델로 데려다 세우고 자기네 브랜드의 붉고 흰 컬러를 테마로 옷을 입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다. 산타클로스는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빨간 옷을 입었다. 19세기 어느 미국인이 자기 딸을 위해 세인트 니콜라스를 주인공으로 한 시를 썼고, 미국 신문의 풍자 만화가가 그 시를 보고 털 달린 빨간 옷을 입은 뚱보 영감을 그린 것이 우리가 아는 산타클로스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코카콜라가 산타클로스를 마케팅에 동원한 것은 30년대부터이니, 역시나 코카콜라가 영감에게 붉은 옷을 입힌 것보다는 영감이 애초 붉은 옷을 입고 다니다 코카콜라에 캐스팅된 거라 봄이 옳다. 





한참 만에 앨리스는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로 뭐라 말한 다음의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 멀리에 서 있었고 우리 사이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앨리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입 모양과 아주 가늘게 들려온 목소리로 내용을 짐작할 뿐. ……지 마. 앨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오지 마 또는 죽지 마. 앨리스는 나에게 뭔가를 금지하려 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예배당으로 돌아갔을 때, 연극은 모두 끝나 있었다. 

 

내 말이 맞죠. 아이는 의기양양해하며 1층 광장을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 앞으로 나를 이끈다. 붉은색 반팔 셔츠 차림의 중창단이 트리 앞에서 크리스마스캐럴을 부르고 있다. 눈 대신 솜으로 장식한 트리와 높은 확률로 단원 전체가 불교도일 캐럴 중창단 앞에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들이 여기에 성탄을 불러오려 한 노력은 조금도 우습지 않지만, 오히려 참된 마음으로 그들의 노력을 치하하고 싶지만, 그들이 있는 힘껏 재현한 모조 성탄 덕에 새삼 깨달아버린 것이다. 내가 겨울을 영원히 압류당했다는 사실을. 

 

스크린 밖으로.

그 여자는 밖에 있다. 지금 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 여자는 내 의도에 갇힌 적이 한순간도 없다. 언제나 내가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발견된다. 내가 쓴 앨리스가 나를 발견한다. 내 특기는 여주인공을 놓치는 것.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의 서사를 스스로 장악하고 있다 착각해왔다.

 

그리고 현앨리스가 나타난다.

 

이것이 나에게 일어날 모든 일의 가장 불가해한 요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