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카미유 클로델, 이운진

 

 

 

 

 

 

십수 년 전, 나는 그녀의 작품 중에서 겨우 한 점의 석고상과 두 점의 청동 조각을 직접 보았을 뿐이다. 기대도 없이 만났던 그녀의 작품들, <로댕 흉상> <애원하는 여인> <왈츠>를 처음 보았을 때의 떨림은 이 글의 성긴 행간을 조금 채웠을 것이다. 팬레터를 쓰는 심정으로 시작한 원고가 무거워질 때, 그녀 인생 전체로부터 흘러나온 말들은 나의 감정을 일깨우기도 했지만 마비시키기도 해서 모른 척 피하고 싶었던 적도 있음을 고백한다. 

 

(...) 그녀에 대한 진실을 절반도 적지 못했어도 나는 관객이 없는 무대에서 그녀와 슬픈 왈츠 한 곡을 곡진히 춘 듯한 기분이다. 이것은 고통을 겪은 마음에 숭고함을 되찾아주고 싶어지는 마음과도 같다. 하여 봄볕 같기도 하고 가을볕 같기도 한 어느 날에는 그녀와 그대들의 새로운 왈츠가 시작되기를 바란다. 슬프더라도 기꺼이 아름답기를! (p11)

 

 

 

 

 

최초의 숨결과 최후의 한숨 사이에 있는 삶의 모습은 모두 다르고 결국 같다. (p13)

 

 

 

 

 

정오의 태양이 어느 곳보다 뜨겁고 신비스런 열매들이 익어가는 곳에서 자랐다면 젊음의 피를 끌어당기는 도시의 활기에 저항하기 힘들다. 등 떠밀리듯 철들기 이전부터 카미유는 빅토리아 시대의 모범적 여성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미켈란젤로 같은 조각가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은 파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p16)

 

 

 

 

 

전통과 현대, 자유와 향락, 사치와 가난이 뒤섞여 있는 파리는 세계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세련됨으로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인생에 한번은, 파리로!"라는 구호를 따라 지식인, 예술가, 기술자,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노동자와 고급 창녀들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파리로 모였다. 4만 5000여 개의 카페가 파리의 사교장을 열어주었다. 그중에서도 몽마르트르 밑자락의 누추한 카바레, '검은 고양이'라는 뜻을 가진 '샤 누아르Chat Noir'에는 알퐁스 도데,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린뿐 아니라 작곡가 에릭 사티와 클로드 드뷔시가 모여 파리의 유쾌한 저녁을 만들곤 했다.

 

사람들, 사람들. 그래서 파리는 악취가 심했다. 카미유가 파리에 도착하기 270여 년 전, 루이 13세가 여섯 살에야 처음으로 발을 씻던 시절보다는 아주 조금 나아졌지만 길거리에는 오물이 쌓여서 썩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 데서나 급한 일을 해결했다. 궂은 날이나 여름이면 향수를 잔뜩 뿌린 손수건으로 코를 막아도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밤이면 화장실 오수를 통에 퍼담아 옮기는 소리와 악취가 밤하늘을 뒤덮었다. 뒷골목에는 아름다움보다 아우성이, 웃음보다 한숨이 켜켜이 쌓여 무어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은밀한 연애를 하고 거친 유머와 욕망이 흘러넘치는 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 무렵 파리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카드놀이만큼이나 불확실한 것이었다. (p17)

 

 

 

 

 

카미유가 파리에 흠뻑 취해 있는 동안, 폴 클로델은 파리에서 불행했다. 거대한 도시의 지적인 활력에도 불구하고 폴 클로델의 내면에는 우울의 저류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시골뜨기라는 말에 분개한 소년처럼 파리에서는 저주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는 자신이 묘사한 대로 둔하고 땅딸막하고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클로델 남매는 투박한 말씨와 행동으로 어디서든 눈에 띄었지만 억양이나 태도를 파리식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성장한 두 남매는 자연의 좀더 강한 법칙을 몸에 익혔고, 사회의 기대를 배반하는 천성과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다. 폴 클로델은 잿빛의 빽빽한 건물과 불결한 거리, 엄청난 소음과 넘쳐나는 사람들의 이 끔찍한 도시를 부수고 싶다고 일기에 쓰며 간신히 청소년기를 보냈다. 만약 그에게 보들레르와 랭보가 없었다면 파리에서의 이질감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p23)

 

 

 

 

 

이 도시는 적당히 얼버무리는 웃음처럼 미묘하고도 고집스러운 데가 있는 듯하다. (p25)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연인을 신으로, 눈빛을 별빛으로, 그 사람의 말을 율법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모든 피조물과 모든 순간을 다시 발견하고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에 경탄한다. 서로가 운명의 존재라는 아름다운 환상은 그 어떤 행복감보다 크게 우리를 감싼다. 만나기 전부터 갖고 있던 둘만의 공통점을 찾을 때마다 환상은 확신으로 굳어간다. 무슨 일이든 흔쾌히 응하지 않는 성격, 좋아하는 색과 자주 바라보던 달 모양, 같은 쪽 팔에 있는 작은 점, 이 모든 것이 다 운명의 증표가 된다. (p40)

 

 

 

 

 

로댕, 나의 로댕. 나보다 더 나 같은 사람. 그녀는 여러 번 불러본다. 그녀에게 금지된 꿈들을 다 모아놓으면 그 이름이 되지는 않을까. 그 누구와도 같지 않고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람. 운명이자 금기인 그 이름을 불러본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르는 것만으로도 맥박이 되는 이름을 가졌으므로 그녀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p44)

 

 

 

 

 

귀스타브 에펠의 생각대로 탑은 완성되었다. 아직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기 전인데도 탑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었다. 박람회 동안 20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탑을 짓는 동안 심각한 재정적 위기를 겪었던 에펠은 탑을 완성한 첫해에 비용을 회수했고, 이후 에펠탑 모형 판매와 입장료 등으로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 천박하고 미학적 아름다움이 없다고 격렬하게 반대했던 예술가들도 웅장한 탑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p52)

 

 

 

 

 

사랑과 삶에 미세한 파열의 금이 가고 있는데, 그것은 육안으로는 아직 보이지 않고 가슴으로만 겨우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 가는 선을 메울 만한 것은 없었다. 약속의 말 같은 건 애초부터 소용이 닿지 않았다. 깨진 부분을 정확히 복원하려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지만, 그건 바람에 날리는 꽃잎도 마음을 짓밟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p59)

 

 

 

 

 

어떤 것이든 진실하게 창조된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공통된 감정 상태를 만들어낸다. 마치 첫번째 슬픔 같은 것을 나눈 사이처럼. (p72)

 

 

 

 

 

카미유는 부부라는 말을 생각해보았다. 결혼식을 하지 않았어도 로댕의 곁에서 수십 년을 함께한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매일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면서도 함께 지내며 꺼져내리는 흐릿한 눈동자로 깊고 많은 주름을 보고 입 냄새가 나도 편안하게 입맞춤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어떤 무게일까. 그렇게 되려면 주머니에서 조금씩 뭉쳐지는 먼지처럼 세월이 꼭 필요한 것일까. 한 남자가 한 여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한 여자는 그 남자의 가슴으로 세상을 읽는 일일까. 그게 부부일까.

 

(...) 그녀는 풀 죽은 얼굴로 알지 못하는 단어의 깊이를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 말에서는 몇 년이고 열지 않은 낡은 옷장 같은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보답 받지 못한 노력과 무시된 헌신의 마음으로도 곁을 지키는 로즈 뵈레의 무뚝뚝한 얼굴을 생각했다. 그녀와 로즈 뵈레는 높고 거친 파도와 깊은 해류의 차이 같은 것이었을까.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그녀를 압도했다. (p82)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밤과 더이상 바랄 수 없는 끔찍한 사랑 때문에 이 무렵 그녀의 피는 싸구려 포도주였다. 로댕에 대한 분노는 적포도주 병을 열게 했고 붉은 알코올은 로댕을 더 미워하도록 열기를 더해주었다. 그러면 더 많은 적포도주가 필요했고 더 많은 증오, 또 적포도주, 그리고 또 로댕과 다시 적포도주의 반복이었다. (p104)

 

 

 

 

 

로베르트 슈만은 아내 클라라 슈만에게 천사들이 노래하는 멜로디를 받아 적어야겠다고 말할 정도의 환청과 정신착란을 겪었는데, 그 병력으로 창조성을 잃었고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급기야는 라인강에 투신을 시도한 후에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완전히 고립되었다. 슈만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엔 스스로 굶어죽었다. 정신병원에서 나와 끝내 권총을 들어야 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어떤가. 그들의 열정을 이끈 힘이 그들의 몰락을 재촉한 건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원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p118)

 

 

 

 

 

벨 에포크Belle Epoque, 파리는 아름다운 시절의 끝에 와 있었다. 질 낮은 낭만주의자들의 천국 같았다. 쾌락이 곧 법이었고 관능과 오락에 심취한 도시 파리에서 밤마다 몽마르트르 극장의 피에로는 고독과 우울을 하얗게 감추고 사람들을 웃겼다. 익살을 부리고 속임수를 써도 샤를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까지 찬사를 보내는 존재는 피에로뿐이었다. 파리의 밤을 더욱 화려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물랭루주의 댄서와 매춘부는 툴루즈로트레크의 손에서 그림으로 태어나 세상에 남았다. 파블로 피카소와 파리에 사는 동안 서커스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마르크 샤갈은 매일 서커스극장에 앉아 있었다. 시인들은 살롱에 모여 담배연기와 알코올 속에서 인생의 쾌락과 비극을 노래하고 해가 지면 시민들도 무도회를 즐겼다. 1913년 파리는 샤를 보들레르의 말처럼 "가면으로 신분을 숨긴 채 곳곳에서 즐거워하는 왕자"가 될 수 있는 도시였다. (p121)

 

 

 

 

 

다시, 마르셀 뒤샹. 그는 부엌 의자에 자전거 바퀴를 거꾸로 박아넣어 돌리며 4년 뒤, 남성용 변기를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일의 첫걸음을 떼었다. 오귀스트 로댕은 대성당을 관찰하거나 관절염 때문에 손목에 붓을 묶고 작업해야 하는 늙은 르누아르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폴 클로델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선물을 받았다. 카미유가 정신병원의 차가운 방에 앉아 자신의 낡은 옷을 뜯어낸 천 조각으로 어린 조카의 이불을 만들어 보낸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손으로 만든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1913년을 보내며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2월의 파리는 춥고 저주받은 곳이라고 적었다. (p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