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허연

 

 

 

 

 

 

너무나 작은 키에 사시였으며, 게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상실한 소년이 있었다. 한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외할아버지 집에서 살아야 했던 소년은 마을의 놀림감으로 상처뿐인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 불운한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책이 있었다. 그는 외할아버지의 오래된 서가에서 삶의 좌표를 발견한다. 그렇게 소년은 거친 세상을 향해 생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장폴 사르트르 이야기다. 사르트르는 훗날 외할아버지 서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떠올린다.

"나는 뭉툭한 고대의 유물에 둘러싸여서 이 작은 성당 안을 뛰어다녔다. 내가 태어나는 것을 보았고, 또 나의 죽음을 지켜볼 유물들, 그 영원한 존재가 평온한 미래를 내게 약속해주었다. 나는 그것을 만져보았다. 먼지가 손에 묻는 것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책으로부터 구원받은 수많은 소년 사르트르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가난했고, 몸이 약했으며, 턱없이 예민했고, 너무나 많은 걸 기억하는 몽상가였던 나는 제도 교육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책이었다. 집안 창고에서 발견한 1950년대판 세로쓰기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나를 발견했고, 공간과 시간을 확장하는 법을 체득하기 시작했다. 골방을 비추던 흐릿한 알전구 밑에서 누런 갱지에 인쇄된 활자를 보며 세상을 만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책을 통해 내 자신을 이해했고, 책을 통해 사랑을 했고, 책을 통해 초월을 경험했고, 책을 통해 밥을 먹었다. 책은 내게 계시였으며 친구였고, 또 무기였다.

나는 늘 책과 함께 있었다. 휴가병이던 시절 귀대하는 시골 버스 안에서도, 어머니를 묻고 돌아온 날 창가에서도, 사랑의 환희에 들떠 있을 때도, 몸져누웠던 병원에서도, 수천 년 전에 세워진 피라미드 앞에서도 나는 늘 책과 함께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늘 책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책이라는 문명의 입석立石에게 나는 유일하게 뭔가를 배웠으며, 유일하게 패배했고, 유일하게 고개를 숙였다.





2016년 초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 거대하고 유기적인 도서관 하나가 사라졌다는 상실감이 몰려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도서관은 에코의 머릿속에 있었다. 동서고금을 넘어선 방대한 콘텐츠가 장착되어 있음은 물론 그 콘텐츠들이 쉴새 없이 대화를 나누는 곳. 그곳이 곧 에코의 두뇌였고 이상적인 도서관이었다.





사르트르는 자기 생을 지적 실험에 바친 투사였다. 레지스탕스 출신이었고 안정된 교수직도 내던졌다. 사유재산제를 부정해 숙박업소를 전전했으며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기 위해 계약결혼 후 아이를 갖지도 않았다. 소설 <말>에 이런 고백이 있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었다. 이것이 내 습성이고,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나무들은 지구가 하늘에 쓰는 시. 우리는 공허를 기록하기 위해 그들을 베어내 종이로 만들었다."

칼릴 지브란은 오해된 작가다. 그는 너무 많이 낭비됐다. 전 세계 연인들이 써대는 연애편지에서, 블로그와 카페 글에서 그는 잔인할 정도로 쉽게 소비되었다. 기도하는 듯한 그의 잠언들은 손쉽게 안식과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의 잡문 속에서 소비됐다.

사실 지브란은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분류가 불가능한 인물이다. 지브란은 구심점이 없는 작가다. 보통 작가들은 그를 설명할 수 있는 구심점과 거기서 비롯된 정체성이 있기 마련이다. 하ㅣㅈ만 지브란에게는 그게 없다. 이것이 지브란의 마력이고 지브란의 비극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하루키는 비판의 칼날 위에 서기도 한다. '삶에 대한 성찰이 없는 대중 지향적 소설'이라는 게 그를 비판하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가 소설 속에서 '아버지와의 결별'을 원칙으로 삼은 것은 문학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고 싶은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전쟁과 이념, 희생과 성장으로 점철된 과거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얼마나 다른지 문학을 통해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양을 쫒는 모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마 우리는 19세기 러시아에 태어났어야 했는지도 몰라...... 사냥도 하고 결투도 하고 형이상학적인 고민도 하고, 흑해의 저녁놀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기도 하는 거지. 노년에는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죽는 거야. 19세기에 태어났다면 좀 더 훌륭한 소설다운 소설을 쓸 수 있었을 텐데."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고, 고층 아파트 좁은 방에 살면서 거대한 산맥 같은 소설을 쓸 수는 없다. 모든 것이 기계처럼 꽉 짜인 시대, 부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도스토옙스키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하루키 문학이 우리 시대의 정직한 시대정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 사회가 60여 년 전에 쓰인 소설을 다시 불러낸 계기는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는 백악관이 만들어낸 신조어 때문이었다. 트럼프 취임식 인파가 사상 최대였다는 백악관의 발언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켈리앤 콘웨이 고문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이라고 변명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난데없는 신조어가 언어마저 지배하려고 했던 빅브러더 국가를 연상케 한 모양이다.

 

실제로 <1984>에 등장하는 사회에서는 ‘신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 사회에선 감정이나 사유를 발생시키는 말들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매우 좋은splendid, 훌륭한wonderful 등의 단어도 필요 없다. 그냥 ‘플러스굿plus-good’이나 ‘더블플러스굿double-plus-good’이라고 하면 된다.

<1984>는 언제 읽어도 섬뜩하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몇 명의 독재자를 풍자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폭력적이며 권력 지향적인 속성을 파헤치고 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은 작은 구약성서다. <모비딕>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과 묘하게 겹친다. 우선 포경선 선장인 에이허브Ahab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폭군 ‘아합’의 영어식 발음이다. 아합은 악행과 우상숭배를 일삼아 이스라엘을 혼란에 빠뜨렸던 인물이다.

에이허브가 거대한 흰고래 모비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비이성적 집착은 아합의 우상숭배와 흡사하다. 소설 속에서 고래는 파괴를 상징하는 일그러진 우상으로 그려진다.

“오, 세상에서 보기 드문 늙은 고래여. 그대의 집은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있다. 힘이 곧 정의인 곳에서 사는 괴물 거인이여.” 





<모비딕>은 “날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다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이스마엘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배에서 벌어진 일을 술회하는 주인공이다. 이스마엘 역시 성서 속 인물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종이었던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스마엘은 적자인 이삭에게 밀려 후계자가 되지 못한 채 방랑한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포경선에 오르는 소설 속 이스마엘과 많이 닮아 있다.

재미있는 건 이스마엘이라는 단어가 고대 히브리어로 ‘신은 들으셨다’는 뜻이라는 점이다. 멜빌은 혼자 살아남아서 포경선에서 있었던 비극을 신께 고하는 인물로 이스마엘을 설정한 것이다.

배가 출항하기 전 “단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일라이저 역시 성서 인물이다. 일라이저는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 엘리야Elijah다. 멜빌은 예언자와 동일한 이름의 등장인물을 통해 소설의 결말을 미리 암시했던 것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러 스타벅스에 갈 때마다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스타벅스 창업자인 하워드 슐츠는 왜 <모비딕>에 나오는 1등 항해사 이름인 ‘스타벅’을 회사 명칭으로 가져왔을까?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소설에서 포경선은 광기의 현장이다. 멜빌은 그 혼란의 장소에 현명하고 이성적인 인물 한 명을 등장시킨다. 그 인물이 바로 스타벅이다. 스타벅은 반미치광이인 에이허브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모비딕에 대한 집착을 포기할 것을 권고한다. 아마도 슐츠는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포경선)에서 이성과 평온을 가져다주는 커피 한잔의 매력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이성을 상징하는 인물 스타벅을 회사 이름으로 정한 것은 아닐까. 





오늘은 릴케를 선택할 것인가, 비빔밥을 선택할 것인가? 1980년대 중반 대학 시절. 학교 식당의 비빔밥 값은 공교롭게도 모 출판사에서 나오던 문고판 세계시인선 가격과 같았다. 물론 우연이었겠지만 비빔밥이 1,500원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시집 가격도 1,500원으로 올랐다.

나는 그 시절 아침마다 고민에 빠져야 했다. 어떤 날은 비빔밥과 스테판 말라르메가 결투를 했고, 어느 날은 비빔밥과 W. B. 예이츠가 대결을 벌여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말라르메와 예이츠가 비빔밥을 이기는 날이 많았고, 내 책장에는 세계시인선이 빼곡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책장을 들여다보며 어떤 창조적 계시를 받았다. 희망도 꿈도 없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1990년대 중반. 오든은 또다시 나타나 계시를 던져준다. 마이크 뉴웰 감독의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였다. 영화 속에 장례식 조시弔詩를 낭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시가 바로 “모든 시계를 멈추고, 전화도 끊어버려라. 개에게는 뼈다귀 하나 던져주어 짖지 못하게 하라”로 시작하는 오든의 〈장례식 블루스Funeral Blues〉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망자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레퀴엠이었다.

 

오든은 언어와 리듬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실험적인 시인이었다. 때로는 고풍스러운 문장을 사용하는가 하면 때로는 혼란스럽고 경쾌한 재즈식 문체를 사용하기도 했다. 거친 듯하면서도 따뜻한 풍자는 압권이었다. 〈미술관〉이라는 시의 일부다.

거장들은 알고 있었다
어느 후미진 곳, 어수선한 공터에서 순교자가 처형될 때
그곳에서 개들은 개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집행인을 태우고 온 말은
애꿎은 제 엉덩이를 나무 둥치에 비벼대고 있으리라는 것을

오든의 시는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술대 위의 메스처럼.




다행히 우리는 딜런 토머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가 자신의 대표 시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라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를 낭송하는 음성파일이 유튜브 같은 데 돌아다닌다. “하루가 끝나감에 대해 저항하고 소리쳐라 / 빛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분노하라”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소름이 돋는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마이클 케인이 낭송한 그 시다.

시의 원문을 보면 딜런 토머스가 얼마나 운rhyme을 생명처럼 지켰는지 알 수 있다. 모든 행은 night, sight, height, flight 등 ‘‐ ight’로 끝난다. 기가 막힌 각운이다.




생을 너무 뜨겁게 사랑했던 것일까. 남들 반에도 못 미친 삶을 살다 가면서 예세닌은 참 많은 흔적을 남겼다.
언젠가는 눈 쌓인 자작나무 숲에 가보고 싶다.




백석은 어떻게 나타샤라는 마법을 시 속에 장치할 수 있었을까. 이유는 명징하다. 백석은 대륙인이었다. 우리가 대륙과 단절되기 전 태어나 자란 세계인이었다. 그는 반도를 넘어 만주 일대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북방의 문화와 언어를 접했고,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며 영어와 신문물을 배웠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지만 경성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엔 누구보다 빛나는 모던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백석이 살았던 시대는 수많은 사상이 명멸하며 각축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는 그 사상들의 편린을 모두 맛보았다. 봉건제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가 그의 청춘을 스쳐 지나갔다. 





2016년 나는 한 후배로부터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다.

“형, 내가 아는 분이 요양병원을 하는데 한 노인이 엄청난 양의 책을 싸 들고 입원을 하셨더래. 몸도 너무 안 좋고 정신도 온전하지 않은 분이 무슨 책을 이렇게 싸 들고 오셨나 싶어서 이름을 찾아봤더니 차트에 ‘박인희’라고 써 있더래. 형도 알잖아, 박인희가 누구 본명인지.”

그랬다. 박인희는 박이문 선생의 본명이었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생의 마지막을 대면하러 오면서도 책을 싸 들고 온 사람. 그가 바로 박이문이었다. 





일본의 젊은 니체라고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에서 인류의 가장 중요한 혁명은 읽고 쓰는 것에서 시작됐음을 선언한다. 그의 선언은 천재적이고 경건하다. 책의 부제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사사키는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도스토옙스키, 버지니아 울프, 니체, 제임스 조이스 등을 거명하며 혁명이란 텍스트에서 나오는 것임을 논증한다. 그의 글은 흥분이 느껴질 정도로 매혹적이다.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도 아니고 권력의 탈취도 아닙니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사사키는 애덤 스미스의 예를 든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유명해지기 전까지 경제학을 강의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인물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에서 수사학과 문학을 가르쳤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문예창작과 교수였던 셈이다. 따라서 애덤 스미스에게는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사색한 내용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그렇게 탄생했다.

사사키의 주장은 맞다. 만약 애덤 스미스에게 읽고 쓰는 힘이 없었다면 그의 경험과 안목은 술자리 한탄으로 끝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사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에게는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읽기는 무의미하지 않다.”

남들이 문학의 종언을 외칠 때 문학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시간강사의 일갈은 매우 신선하다. 변혁을 꿈꾼다면 두 손으로 기도나 하지 말고, 책을 들고 읽으라는 사사키의 호기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왜일까.





크리스테바의 책은 난해하다. 개념과 개념, 현상과 현상 사이를 한 치의 오류를 용납하지 않을 듯 촘촘하고 복합적으로 서술하다 보니, 뛰어난 번역을 거쳐도 몇 번을 읽어야 이해가 간다. 그게 크리스테바의 매력이다. 그 몇 번을 반복하는 순간, 어떤 섬광 같은 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렵게 열어젖힌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더 반갑듯이.





거울 없이는 그 잘난 콧잔등 하나 볼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타자’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이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정의하려고 하는 모든 형이상학을 '뻘짓'이라고 생각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그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면 된다.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본질을 파고든 악마였다.

모든 천재가 그렇듯 그는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과 그 이후를 나눈 사람이다. 그를 통해 오랫동안 서양 철학사를 지배해온 '의식의 문제'들은 '언어의 문제'로 탈바꿈하게 됐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최고 철강 재벌의 아들이었다. 브람스, 클라라, 슈만, 말러 등이 그 집의 식객이었다. 클림트는 비트겐슈타인의 누이 초상을 그려주기도 했다.





대표작 <논리 철학 논고>는 전쟁터에서 쓴 것이다. 이후 그는 전 재산을 친구들과 예술가들에게 기부하고 정원사, 초등학교 교사, 약품 배달사원으로 일한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그는 무소유를 실천한 재벌 2세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못 말리는 악마성이 있었다. 자신의 논문을 심사하는 교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학생을 폭행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지인들의 평가도 엇갈렸다. 실제로 경제학자 케인스는 그를 신이라고 했고, 버트런드 러셀은 그를 악마라고 칭했다.

천사든 악마든 우리는 지금도 비트겐슈타인 속을 헤맨다. 그는 하늘이 우매한 인간에게 내려준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스타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늘 불공평하다. 역사는 절제되고 점잖은 사람보다는 격정적이고 직선적인 사람을 잘 기억한다. 또 역사는 중재와 화해를 주장했던 사람들보다 대립과 전쟁을 주장했던 쪽에 후한 점수를 준다. 역사책에서 '중용'은 매력이 없는 미덕이다. 





지멜 역시 자본의 어두운 면인 인간 소외의 문제에 주목했지만 돈을 타락의 토대라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돈을 영혼의 행위로 봤다. 지멜은 돈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성격이나 특성을 갖지 않지만, 현대인의 사회적/ 문화적 토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지멜은 돈의 추상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돈은 양적 가치로 시작하지만 결국 질적 가치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의 예언은 정확했다. 이미 사이버머니가 일반화하고 '감정 노동'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그의 탁견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는지 감탄하게 만든다.

지멜은 천재였다. 그는 이 위대한 책을 각주 하나 없이 에세이 쓰듯 써내려갔다. 이런 재능과 자세를 강단 철학자들은 시기하고 질투했다. 게다가 지멜은 유대인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천재라는 현상은 중간 관문을 뛰어넘는다. 천재는 스스로 직접 목적에 도달한다. 천재는 배우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천재는 수단을 앞질러 그것을 복종시키고 뛰어넘는다. 예술은 참다운 의미에서 천재들의 작업이다. 예술은 계획서 없이 늘 목적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이미 자신이 단 한 명의 지적 상속자도 없이 죽을 것을 예감했다. 그는 오랫동안 외로웠다. 그래서 더 오래 빛날 것이다.





천재는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이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이나 백을 아는 사람은 '준재'에 불과하다. 천재는 하나를 통해 무한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를 통해 세상의 비밀을, 그 전모를 파악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하나를 통해 세상을 알고, 그 세상을 통해 다시 하나를 역추적할 수 있는 사람이 천재다. 앨런 튜링이 그랬다.





1802년 하워드는 <구름의 분류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 한 편으로 구름은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논문은 층운, 적운, 난운 등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구름의 이름을 명명했다. 하워드는 구름의 성질과 생성 과정, 높이와 모양을 바탕으로 이름을 지었다. 하늘의 일을 인간의 땅으로 가져왔으니 기상학의 혁명이었다.





비구름은 하워드식 분류로 이야기하자면 난층운nimbostratus이다. 이 말의 라틴어 뜻에는 '온통 파묻히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렇다. 비를 퍼붓는 구름은 우리를 파묻히게 한다. 사랑이나 그리움이 우리의 온 생을 파묻어버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