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의 말들, 공백

 

 

 

 

 

 

여행은 휴식의 일종이라 여겨지지만 종종 엄청난 긴장감을 유발한다. 때로는 사람의 진을 빼기도 한다. 같이 간 친구와 손발이 맞지 않거나, 지갑이나 핸드폰을 잃어버리거나, 기대했던 식당의 음식이 형편없거나, 머리카락과 물때가 가득한 비위생적인 호텔에 묵게 되거나. 그런 여행을 끝마친 후에는 지친 패잔병처럼 집에 귀환하기 마련이다. 여행travel의 어원이 ‘노동, 고통, 출산’reavail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특별히 고된 여행이 아니라고 해도 여행지에서 돌아올 때면 얼마간의 달콤한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문을 여는 순간 밀려오는 집 냄새와 세간 살림들의 모습은 낯선 듯 익숙하다. 온갖 물건이 꽉 들어찬 캐리어는 한쪽에 밀어 두고 샤워부터 하고 있자면 늘 써 오던 바디용품의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몸에 익은 잠옷의 편안함, 내게 꼭 맞는 베개의 높이와 이불의 감촉 같은 것들을 만끽하는 순간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감각에 휩싸인다. 바로 여기서부터, 두 번째 휴식이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독서량을 늘릴 수 있나요?’

북튜버로 활동하다 보니 어디서든 자주 듣는 질문이다. 상황에 맞는 여러 가지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만, 내가 어느 때고 빠짐없이 제안하는 방법이 있다. 약속 시간보다 한두 시간쯤 일찍 도착해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을 것. 책 읽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일정을 마치기 전이라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며, 약속 시간에도 늦지 않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석삼조인가.

독서량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약속 장소 근처에 있는 카페를 찾고,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한 뒤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고, 가지고 나온 책을 열심히 읽다가 10분 일찍 약속 장소로 들어서는 게 내 패턴이다. 업무 미팅이어도 마찬가지다. 이 시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일정 전후로 여유를 내기 힘든 날엔 찝찝한 기분마저 든다. 준비운동 없이 찬물에 뛰어드는 기분이랄까.

내일은 저녁 6시에 북토크 일정이 잡혀 있다. 다행히 일정 전에 두 시간쯤 여유도 있다. 소풍을 앞둔 아이가 과자를 고르는 마음으로 내일 읽을 책을 고른다. 출간되자마자 사 놓은 책이 눈에 뜨인다. 무척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다. ‘그간 자꾸만 손이 가려는 걸 참느라 애를 먹었지……’ 웃음이 슬슬 비어져 나온다. 책을 가방에 넣으며 확신한다. 내일도 멋지게 일하고, 멋지게 쉬게 되리라는 것을.





“오후 두 시의 라디오와 새벽 두 시의 라디오는 다르잖아요. 클래식 방송과 에프엠포유가 다르고요. 오후 두 시 라디오의 활기에 이끌려서 방송을 듣는 사람이 있다면, 새벽 두 시 라디오의 차분함이 좋아 방송을 듣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작가님은 새벽 두 시의 라디오 같은 사람인 거죠.”





2021년 4월 17일 전등사
2021년 5월 31일 밤 산책의 개구리
2021년 6월 17일 W호텔에서의 아침 산책
2021년 10월 9일 청사포의 파도
2023년 2월 13일 감지 해변

내 핸드폰에 저장된 오디오 파일들의 제목이다. 이 소리는 모두 휴가지에서 직접 녹음한 것들이다. 파일을 열어 귀를 기울이면 그날의 시공간이 훌렁 눈앞으로 펼쳐지고, 내 귓바퀴에는 다시 한 번 찬란한 쉼표가 고인다.





그리고 그해의 끝자락에 코로나19가 발생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앓고, 고립되는 동안 나 역시 전에 없던 우울감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종종 딜레마에 봉착하기도 했다. 팬데믹을 겪으며, 인간의 발길이 끊어져야 자연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자 하늘이 맑아졌고, 사람들의 통행이 뜸해진 곳으로 야생동물이 찾아왔다. 관광객을 제한한 보라카이가 그랬던 것처럼 환경오염으로 몸살을 앓던 섬과 해변은 방문객의 발길이 뜸해지자 그 찬란한 풍광을 되찾았다. 자연은 인간과는 결코 함께 쉴 수 없다는 듯, 인간이 없는 곳에서 제 몸을 회복했다.

코로나19라는 낯선 전염병을 맞이하여 서로 거리를 두고 일상을 봉쇄했던 기간은 끝났지만 당시에 느낀 불협화음의 기억만은 쉽사리 가시질 않는다. 이 불화를 어찌하나. 티 없이 맑던 보라카이의 풍경을 떠올리며 이따금 난처해지는 요즘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인스타그램을 뒤적거리는데 한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살리는 일>을 쓴 박소영 작가의 글이었다. 매일 길고양이를 돌보며 동물권 운동에 앞장서는 그는 길고양이들 밥이 자꾸만 빗물에 불어 버린다며 난처해하고 있었다. 새 사료를 부어 주면 또 불어 버리고, 또 불어 버리고를 반복한다고. 그 글을 보고 나서야 장마의 이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떠돌이 동물들의 밥과 보금자리를 앗아 가고, 수많은 집과 상가와 도로를 잠식하고, 끝내는 많은 인명 피해까지 낸 비의 무서운 실체가 그제야 내 눈에 보였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늘 비극이 벌어지고, 어떤 살풍경은 기어이 일상을 찢고 들어온다. 마음 편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이 풍경들을 등진 채 살아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찢어진 부위를 서둘러 봉합하고 그 흔적을 외면하며 살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실과 바늘을 쥔 손으로 뛰쳐나가 일상을 수선하는 데 기꺼이 바늘땀 하나를 더한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바늘을 들고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모습이 나를 바깥으로 끌어당겨 가리라 예감하는 사람이다.

장마전선이 물러나고 본격적으로 찌는 듯한 더위가 찾아왔다.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위에서 사람이고 동물이고 할 것 없이 혀를 빼물고 있다. 그늘 밑에서도 열기를 피하기 힘든 계절, 모두 이 여름을 어떻게 나고 있을까.





'저번엔 분명히 더 나았던 것 같은데......'

뻐근해진 엉덩이를 문질렀다. 명상이 너무 자주 노력을 배반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만큼 공을 들였으면 조금 더 수월해져야 하지 않나.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야 하지 않나.

하지만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축적이 곧장 나아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 역시 그러하다. 수도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심지어 후퇴할 수도 있다. 어제보다 나은 상태만을 갈망한다면 바로 그 어제에 발목을 잡힌다는 사실을, 늘 앞으로 나아갈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명상 수련을 지속할 수 있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현재에 머무르라는 오랜 가르침을 다시금 되새긴다. 그 지혜로운 목소리가 내 엉덩이를 붙들어 매고 또 한 번 자리에 앉을 용기를 준다. 평생에 걸쳐 이어질 긴 선을 그려 내기 위해 오늘 하루치의 점을 찍는다.





로빈 윌 키머러의 <향모를 땋으며>를 읽다가 '퍼퍼위puhpowee'라는 눈부신 단어와 마주쳤다. 퍼퍼위는 "밤중에 버섯을 땅에서 밀어 올리는 힘"을 뜻하는 포타와토미 족의 언어다. 이 비밀스럽고 찬란한 단어를 알고 난 후로는 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사방을 빈틈없이 에워쌀 때면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자라고 있구나. 잠들고 쉬면서 피어나고 있구나.





뒤뚱뒤뚱 멀어지는 할머니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편의점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몇 명이나 더 만났다. 달구경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느리게 걸었고, 느슨하게 벌어진 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무해하고 헐거운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서 나도 느릿느릿 더딘 걸음을 걸었다.





이서수의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 속 주인공들은 고단하다. 꿈을 좇느라 가난을 면치 못하고, 현실과 타협했어도 삶이 순탄하지 않다. 그들은 번듯한 직장도, 애틋한 연애 관계도, 안정적인 주거지도 없이 청춘의 한가운데를 고달프게 꾸역꾸역 통과한다. 소설은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처지를 마오쩌둥 시절 박멸되었던 참새에 비유한다.

1958년 중국은 마오쩌둥의 지시 아래 '제사해 운동'을 실행한다. 제사해는 '네 가지 해충을 제거한다'는 뜻으로, 그 해충은 참새, 들쥐, 파리, 모기였다. 참새가 쌀알을 축낸다고 생각한 당시 사람들은 참새를 없애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는데, 그중 하나는 참새를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낫을 휘두르고 꽹과리를 쳐 대는 통에 참새는 잠시도 쉴 수 없었고, 이내 피로와 고단함에 지쳐 땅으로 뚝뚝 떨어져 죽었다. 

이서수의 소설은 쉴 곳을 잃은 참새의 모습과 정착하지 못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겹쳐 그려 낸다. 연일 전세 사기 소식이 전해진다. 사기 피해자 중 열에 일곱은 20~ 30대 청년들이다. 평생 돈을 모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 집값과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고용 불안 속에서, 청춘들은 기반을 잃고 흔들린다.

참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제사해 운동의 결과, 중국은 심각한 생태계 불균형을 겪었다. 농업 해충이 창궐하자 대기근이 촉발됐고, 중국 공산당은 결국 소련에서 참새를 공수해 와야 했다.

쉴 곳을 잃어버린 청년 세대가 기운을 모두 소진한 채 땅으로 떨어지면 우리 사회가 잃는 것은 무엇일까. 자명한 사실은, 모두가 그 결과를 함께 감당해야 하리라는 점이다.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지만,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큰 화면과 음향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관람 내내 소란을 떠는 관람객들도 있고, 좌석 배치 간격이나 근처에 앉은 관객에 따라 시야가 불편한 경우도 있으니 영화는 가급적 집에서 시청한다.

하지만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을 땐 일부러 영화관을 찾는다. 아끼는 것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을 더 본격적으로 즐기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

그런 영화를 보고 나오면 한참을 걷는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걸음이다. 방황하듯 이곳저곳을 누비며 방금 본 영화의 OST를 찾아 듣거나, 영화가 만들어 둔 여백을 이리저리 메꿔 보거나,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되새기며 영화로부터 빠져나올 시간을 최대한 유예한다. 입안에서 오래 굴린 영화는 이내 사탕처럼 작아지고 온몸에 녹아든다. 그제야 집으로 돌아간다. 안에서 잠겨 있던 감각들을 열고, 바깥세상을 받아들인다.

그 독특한 단절의 순간과 소화의 과정이 그리워서,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고 싶다.